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1)

박 선배님,

오랜만에 연락을 드립니다. 안녕하신지요?

벌써 뵙지 못한지도 몇년이 지났습니다. 선배님께서 쓰시는 글들을 그저 인터넷에서 읽는 수준으로 선배님께서 여전하시구나 하는 것을 알고 지냈습니다. 여전히 선배님께서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이 멋있습니다!

최근,

선배님께서 인터넷에 고지론을 옹호하는 글들을 쓰신 것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 훌륭한 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지론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시는 선배님이시기에, 생각과 삶을 일치해서 살아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선배님,

그렇지만 선배님의 글을 읽으며 저는 뭔가 선뜻 선배님의 생각에 깊이 동의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을 또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의 삶과 생각과 신앙과 도전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제게 분명함에도 말입니다.

해서, 이 지면을 빌어 (screen 면이라고 해야하나요) 선배님에 대한 제 생각 몇가지를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읽기에도 손이 좀 오그라드는… 읽은 사람 입장에서는 역겨울만한… 그런 내용들을 좀 한번 나열해보겠습니다 

저는, 모 특목고를 2년만에 마치고, 고3을 건너뛰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것도 입학 성적이 꽤 좋았습니다. 

그 명문대를 과수석으로 졸업했고, 대학때엔 전공과목에서 A0 받으면 실망, A- 받으면 절망하는 수준의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그 후에는 저희 분야에서 소위 학교 순위로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미 동부의 모 공대에서 박사를 받았습니다. 

보통 저희 실험실에서 졸업하면서 논문 하나 낼까말까 수준인데, 저는 논문도 5개나 쓰고 나왔고, 그나마 그것도 지도교수 도움 없이 혼자 써서 낸 것들입니다.

고등학교때 IQ test를 했을때 나온 IQ는 155 였습니다.

지금은 소위 ‘최첨단’에 해당하는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데, 제가 속한 팀은 이쪽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앞서가는 leading group입니다. 저는 그 속에서 소위 ‘핵심 멤버’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그냥 괜히 소위 resume만 번드르르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제 전문분야에 관한한, 저만큼 잘 훈련되고 갖추어진 사람을 사실 그리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실력으로는 왠만한 상황에서 누구와 겨루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아… 제가 써놓고도 참 어이가 없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아시니까, 이해하실겁니다. 제가 무슨 어줍잖은 자랑하려고 이렇게 나열한게 아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제 resume를 다시 풀어서 쓴 이유는, 제가, 어찌보면 대단히 고지론적 위치에 있음을 설명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이런 내용을 거짓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다면… 과연 제가 ‘고지’에 선 사람일까요?

소위 resume 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찌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저는 제가 ‘고지’에 선 사람이라고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고 못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두가지만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제 socioeconomic class가 결코 ‘고지’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job security에 대한 걱정이 크고요, 10년후 뭐하고 사나 이런 고민도 많습니다. 공부를 오래하느라, 지금 40대 중반을 향해 가는데 아직 ‘내집’도 없습니다. 딸아이 하나 있는데, 그거 대학은 어찌 보내나 걱정도 크고요. 그저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고민을 그냥 하면서 삽니다. 회사에서 파는 점심 사먹는게 아까워서 싸구려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사회적 지위로 보더라도, 저는 그저 ‘회사원’ 혹은 ‘연구원’일 뿐입니다. 대단히 많은 이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제 개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결코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제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지금 제가 가는 길을 가기로 ‘선택’했습니다.

둘째, 저보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 역시 찌질이의 푸념이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소위 ‘고지’에 가까운 환경에 가면 갈수록 그런 일종의 소외감은 더 큽니다. 왜냐하면 제가 접하는 사람들은 역시 또 peer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바드를 졸업하면, 동창이 모두 하바드 졸업생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비교대상은 하바드 졸업생이지요. 아니, 그러니까 하바드 간것 만으로도 이미 고지라고 생각해야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위에 첫번째 이유로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

게다가, 저보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저보다 꼭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 이게 찌질하게 들리지 말아야 할텐데요… 저는 그 사람들을 결코 제 선망의 대상으로 두지 않습니다. 대학원때 제 officemate이었던 유태인 친구는 지금 최소 연봉 25만불을 받으며 지내고 있지만, 저는 그 친구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더 높은 고지에 올라선 친구들을 보면 소위 ‘운’이 좋거나, (실제로 첨단 학문쪽을 하다보면 ‘운’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이건 이쪽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아, 물론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아니면 이미 가진 줄/빽이 좋거나, 이미 가진 자산(금전, 인맥 등)이 압도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잘나가는 기준을 보면… 그렇게 ‘공정하지'(fair)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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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4번에 걸쳐, 편지글 양식으로 고지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편지글 양식으로 한 것은, 그래야 딱딱한 비판이 아니라 부드러운 대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였습니다. 

고지론 비판의 글이 아니라, 제 관점에서 바라본 고지론의 위치에 대한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바라기로는, 고지론 비판자들에게는 고지론을 ‘동지’로 여기게 되고, 고지론자들에게 역시 반고지론자들을 이해하는 tool을 제시하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 댓글로 생각을 좀 나누어주시면 저도 제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