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약자의 하나님

하나님은,
적어도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다소 편애가 있다고 보일 정도로….

‘약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강자의 웃음보다는 약자의 눈물에 더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너무 ‘강자’이다.

이런 시각에서…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내 강함을 정말 <<completely>> 약자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일까.

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원리적 기도와 관계적 기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할른지 하지 않을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서 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내 기도가 ‘올바른 기도’여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지내왔던 것 같다.
소위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려 했고…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많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리적’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바로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먹는 거라고.

그런데,
요즈음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스스로 ‘원리적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가
‘관계적 기도’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민우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지 못해 몹시 마음이 상해 있을때,
그것을 나와 나누지 못한 채…
그저 ‘원리적’으로…
그 장난감 욕심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당위와 자신의 욕심 사이의 간극(gap)을 나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스스로 메우려고만 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상할 것 같다.

일단,
민우의 생각이 정리되어있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하면서 ‘원리’ 혹은 ‘정답’을 찾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빠된 마음이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내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한다는 ‘당위’를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회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혼자 다 고민해서 하나님과는 전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정답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다면…
그것이 ‘원리적 기도’이기는 하겠으나…
‘관계적 기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겐… ‘관계적 기도’의 강조가 필요한 것 같다.

참된 ‘관계적 기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원리적 기도’를 하게 되지만,
‘원리적 기도’를 반복한다 해도 ‘관계적 기도’를 하지는 못한다.

KOSTA/USA-2004를 다녀와서

지난 한주동안 코스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이 여덟번째 코스타였으니… 이제는 제법 여러가지 일에 익숙해지기도 할만도 한데… 여전히 제게는 새로운 깨달음과 많은 숙제거리를 제공해준 코스타 였습니다.

1. 이번에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지 못한 채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면… 마라토너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습을 별로 하지 못하고 참석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선다는 것 이상으로 ‘엽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겐 마음의 부담이 큰 코스타 였습니다.

2. 그와는 달리 코스타에 현지에서 기도는 대단히 energetic 했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powerful 했던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제게조차도 그 힘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3.
코스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로서, 제가 성실하게 코스타에 임하지 못한 여러가지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여러군데에서 프로그램이 원래 의도하지 않은대로 진행되는 것이 감지되었고, 전체 집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발을 동둥 구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의 대부분은 ‘기획’의 미숙에서 나타난 것들이었습니다.

4.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새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60명에 가까운 해외 선교 헌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를 기도중에 쏟아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저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집회 중에 맨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려서… 제 신발이 젖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5. 매년 코스타를 섬기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준비하는 사람의 미숙함과 그 부족한 그릇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번 코스타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것은 아마도… 코스타를 준비하며 섬기는 저같은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touch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섬김위에 당신의 은혜로서 넘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작은 간장 종지위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섬김의 부분을 더 연구해서 채우는 일들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코스타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주시는 것 같습니다.

7.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년에도 저는 코스타에 참석 하겠지요. 참석해서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땀 범벅이 되어 뛰어다니겠지요. 또 다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겠지요.
그러나,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8. 그리고… 아마도… 제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코스타 기간 중이 아니고 코스타가 끝난 후의 제 삶의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그래 가자, 집으로 가자.
거기 우리 집에선 우리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테고,
거기 우리 집에선 이런 서러움 따윈 없을꺼야…


한 6년 쯤 전에(-.-) 제가 제 이메일(?)의 시그니처로 썼던 문구 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유학 생활이 그렇게 힘드냐고…
뭔 시그니처가 그렇게도 서럽냐고 하더군요.

유학생활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사실… 정말 ‘거기 우리집’ 이외에 정말 ‘서러움’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일로 눌리고 스트레스 받고 불안할 때,
역시 유일한 안식처는… ‘내 아버지’ 뿐이라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지네요.

이제야 조금씩 철이 드는걸까.

불사이자사(不思以自思)

不思以自思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생각이 난다.

김교신 선생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고자 했으나, 무의식 중에서도 끊임없이 그분을 묵상하는 것이 되지 않음을 한탄하던 중,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날의 일기에, 기쁨이 넘쳐서
不思以自思 라 쓰고 그 기쁨을 마음에 새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꿈 속에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들고,
아침에 깨서 첫 생각이 예수님이기를 바라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부)
–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감동이 있음을 느낀다. ‘서른 세 살의 젊은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아가며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은 언제나 감동을 가져온다. 사실 그 것을 그냥 감동이라고 표현하자면, 어쩐지 그것을 너무 폄하(貶下)하는 것 같아 선뜻 내키지 않는다.

요즈음 청년부의 모임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린다.
열정이 식었다는 말도 들리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기도가 부족하다, 말씀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여러 지체들의 사랑 가득한 충고와 해결책들도 자주 들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적은 매우 정확한 것이고 모임의 리더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게 된다.

우리 청년부는 참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이 20년,
30년 동안 가지고 있던 가치를 순식간에 포기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열정과 감격과 뜨거움이 있다. 어느 지체의 말대로 그야말로 매주 금요일이 수련회가 되는 모임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에 걸맞는 자유, 평화, 화평, 사랑, 안정감 등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예수를 믿고 이전에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하덕규 집사의 ‘자유’의 가사가 과연 우리에게도 풍성하게 느껴지는가? 오히려 해야할 일들만 더 늘어난 채 ‘종교생활’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소모적인 일인가?

우리 청년부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면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같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가졌던 유대주의의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들의 모습에서 제하여 나갔다. 예수님도 그들의 의를 높게 평가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열심을 가지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죽였다. 그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일은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혀 성경에 대한 통찰력 없이 나름대로 ‘말씀을 적용’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러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기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도저히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일 길을 여시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이 곳에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 우리의 주관적 ‘느낌’이 자칫 성경의 계시적 증거를 묻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그 말씀을 우리 모임에 잘 적용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바로 그 곳에 계신다고 하셨다. 멋있는 피아노와 최고의 연주자와 영적인 분위기가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모이면 그 곳에 계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까지 너무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을 본다.
찬양을 할 때에도 분위기에 맞추어 곡을 골라야 하고, 가능하면 인도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더욱 감동이 된다. 피아노 반주자는 최고의 솜씨로 연주를 하고 선곡된 찬양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따라 조절되고 가끔은 통성 기도를 하는 시간과 묵상기도를 하는 시간을 두어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도록 해야한다. (절대로 찬양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명백히 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찬양을 매우 좋아하고, 특히 우리 청년부의 찬양은 언제나 큰 감동을 준다. 그리고 분명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해야한다.) 목사님의 message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야하고 듣는 사람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어야 ‘은혜가 된다’. (이것도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런 message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우리
목사님의 message가 정말 이런 message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필자 개인 영성의 부족으로 자칫 귀만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공부 조장은 충분히 준비를 해와서 모르는 것을 대답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할 시간을 주어야 역시 ‘은혜를 받는다.’ 기도는 옆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 몇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뻥뻥 큰 소리로 소리를 질러주어야 나도 ‘은혜를 받아 기도가 트인다.’
만일 위에 열거된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필수 요건이라면 우리는 중국 오지의 선교지로 가서는 결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다. 북한 지하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날 기회는 전혀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중국 오지의 선교사님들이나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의 영성은 우리의 영성을 훨씬 더 앞서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세상 학문’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에 오면 그 모든 것들이 포기되어야 하고 내려져야 하고 잊혀져야 한다. ‘세상 학문’을 보다보면 믿음이 떨어지기 쉽고 은혜를 막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 이성에 관계없이 믿는 대상이므로 나는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지성은 과연 ‘고지를 정복하는’ 도구로밖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우리의 지성은 이 시대의 ‘대안적 지성’이 될 수 없는가?
우리 청년부가 한국 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각기 받은 은사에 따라서는 중국, 아프리카, 일본, 무슬림 지역에서 진정한 대안적 기독 지성이 길러지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는 ‘말씀의 깊이’와 ‘훈련’의 문제이다. 우리에게 말씀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교회를 떠나서는 그 감격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말씀의 깊이 없이 성경을 ‘점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읽을 때 얻는 감동이 ‘물방개점’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자극을 받으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기 마련이다. 만일 우리가 핵심과 근본에 대한 바른 통찰력 없이 매우 ‘자극적인 것’만을 구하다보면 자칫 더 큰 자극이 오지 않았을 때 실망하거나 낙심하게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감격과 열정이 충분히 표출되어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는 좀 더 말씀의 깊이와 훈련에 몰두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행동이 우리 신앙의 표현이고 성장의 수단이지만 종교적인 행동에 우선하는 신앙의 문제가 바로 세워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계속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근거로 우리의 모임을 ‘느끼는’ 모임에서 ‘배우고 훈련하는’ 모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개인적인 경험의 한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 것을 찾는 것과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할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지난 1월호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 실린 기독교학문연구회 회장을 지내신 KAIST 윤완철 교수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 믿음을 강조하되 믿음의 내용이 불분명한 열심
– 구원을 강조하되 그것만 넘어서면 방향을 잃는 목적 없는 신앙
– 하나님께서 우주 대신에 교회를 창조하신 것으로 믿는 편협함
– 신앙을 정서적인 영역에 가두고 성공의 이념으로 나머지를 채우는 이원론적 신앙
– 순종보다는 제사를 드리려는 제사 종교
–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잘 모르는 성경 공부
– 순종하려 하면서 계시를 묻지 않는 어두움
– 계명은 없고 사명만 있는 청년적 신앙
– 바울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와서 들어도 감탄할 오묘한 해석
– 감격으로 시작하지 않는 윤리, 윤리로 이어지지 않는 십자가
– 정열에 들떠 방향을 잃은 사람들, 방향을 잡느라 정열을 잃은 사람들

* 구체적인 이야기가 후에 더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개인적인 바램으로 (1부)라고 제목 뒤에 달았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권오승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