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look의 contacts

새로 전화를 사면, 아무래도 예전에 있던 전화로부터 각종 사람들의 이메일과 전화를 옮겨오는 작업을 하게 된다.
최근 전화를 바꾸면서, 그 작업을 하는 김에… 아예 내가 관리하고 있는 몇개의 이메일 어카운트에 있는 사람들 연락처와 전화번호들을 정리하고 있다.

대략 1500개가 좀 넘는 이메일과 전화번호들…
어떤 것은 이메일 주소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잘 기억이 가물가물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예전 이메일 주소만 남아 있어 더 이상 정보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것도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메일이 그저 그 사람들의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의 추억이고, 소중한 관계의 흔적으로 여겨지면 좋으련만…

많은 outlook contacts를 정리하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그 일을 하기가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중에도,
한 사람의 소중함을 잃지 않는 밸런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People to Love, People to Work with

내 심각한 인격적(?) 결함 하나.

나는 사람과 사귀어 가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나와 함께 일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오히려 약간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내가 더 마음을 쓰고 care 하는 것 처럼 보이는데,
막상 가장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쉽게 neglect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이러한 결함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물론 내 가족이다. 특히 내 아내.

내가 좀 더 성숙해 가면서…
내게 가까운 사람을… 내가 사랑할 사람으로 더 깊이 인식하는 전환이 더 많이 일어나길

원리적 기도와 관계적 기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할른지 하지 않을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서 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내 기도가 ‘올바른 기도’여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지내왔던 것 같다.
소위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려 했고…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많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리적’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바로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먹는 거라고.

그런데,
요즈음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스스로 ‘원리적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가
‘관계적 기도’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민우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지 못해 몹시 마음이 상해 있을때,
그것을 나와 나누지 못한 채…
그저 ‘원리적’으로…
그 장난감 욕심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당위와 자신의 욕심 사이의 간극(gap)을 나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스스로 메우려고만 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상할 것 같다.

일단,
민우의 생각이 정리되어있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하면서 ‘원리’ 혹은 ‘정답’을 찾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빠된 마음이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내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한다는 ‘당위’를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회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혼자 다 고민해서 하나님과는 전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정답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다면…
그것이 ‘원리적 기도’이기는 하겠으나…
‘관계적 기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겐… ‘관계적 기도’의 강조가 필요한 것 같다.

참된 ‘관계적 기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원리적 기도’를 하게 되지만,
‘원리적 기도’를 반복한다 해도 ‘관계적 기도’를 하지는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