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rdan Peterson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꽤 큰 뉴스가 되었다. Jordan Peterson은, 말하자면 ‘우파’ 혹은 ‘보수진영’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이 결국 기독교인이 된 과정을 나름대로 복기해서 보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는 유대-기독교적 문화 전통을 제외하고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개인적으로, 또 가족 구성원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종의 ‘회심경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Jordan Peterson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이야기하는 영상 몇개를 모아놓은 것들. 과거에는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고, 그 대답에 대해 애매하게 피하면서 대답을 했는데, 이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결국 서구세계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기독교계에서도 꽤 많이 이루어져왔던 것 같다.
영국의 작가 Tom Holland의 Dominion이라는 책 같은 것에서도, 기독교가 인권, 민주 등 현대 인류가 유익을 얻는 많은 것들이 결국 기독교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Tom Holland는 영국의 철학자 AC Grayling이 기독교가 새롭게 인류에게 제시한 새로운 사상적 innovation을 하나라도 제시해보라고 이야기했을때, 결혼제도, 자연과학의 발전, 모든 인류가 존엄하다는 생각 등이 모두 기독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이 universal truth로 받아들인 것 역시 기독교의 공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접근은 영국의 기독교 방송인 Premier 채널의 변증 프로그램인 Unbelievable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접근이기도 하다.
Tom Wright도 이와 비슷한 접근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도 했었고, Tim Keller도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가 하게되는 생각은 이것이다. 이런 접근이라면, 보주주의자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매력적일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경우,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는 그 의미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가 투표를 하느냐 마느냐로 크게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람의 표는 미국 전체 선거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사람은 미국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은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영향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국의 큰 영향 아래 있는 하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의 표는 미국 사람들의 표에 비해 현저하게 그 의미과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나 같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은, 여러가지로 투표할 자격이 제한된다. 우선 미국에서는 전혀 투표할 자격이 없고, 한국 선거에서도 대통령선거 같이 전국 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나는 현 거주지가 미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같은 것은 참여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의 표는 그나마 더 의미와 가치가 낮은 것이다.
그러니 내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거나 걱정하거나 뭐 하든 그야말로 별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서도…. 이번 미국 선거는 정말 어느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한쪽 후보가 다른쪽 후보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러니… 뭐 이렇게 된거 이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거지 뭐.
어제 설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으로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그런데, 최근 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대해 약간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비슷한 해석을 한 다른 주석 같은 것을 아직은 보지 못해서…. 혹시 다른 누가 이렇게 해석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여리고에서 내려가는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robber λῃστής)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이 ‘강도’라고 변역한 단어는 흔히 그 당시 열심당원들과 같이 폭력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십가가 예수님 양 옆의 강도도 그냥 ‘잡범’들이 아니라, 로마 체제에 반역했던, 폭력으로 반항했던 저항인사들이었던 것이다. (십가가는 로마제국에 대한 반항을 처벌하는 도구였다.)
그러니, 어쩌면 여리고에서 내려가고 있던 이 사람은, 로마에 협력하고 있던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로마인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니 강도 (λῃστής)가 그 사람을 폭력으로 해치려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이 사람을 피했다는 것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긋고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그 민족/종교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사람을 돌보는 사마리아인이 대비되는 것.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라고 한 것이 그러므로,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 이웃이 되는 자세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