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한 기도

어제 하루 종일,
회사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멀리 타국에서 사는 아무것도 아닌 한 사람이 그저 뉴스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분노하면서 기도하는것 뿐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어제는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그리고 일이 많이 힘든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워져 버겁게 기도했다.

아침에 5시 반쯤 일어나서 조금 있다보니 뉴스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러부터 국회에서 계엄선포 무효결의를 하는 아침 8시까지,
계속 마음을 졸이며 뉴스를 체크했다.
그 와중에 나는 아침에 나와서 회사에 가야 했고.

문득 생각했다.
요즘 나는,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던가….?

Jordan Peterson의 회심

Jordan Peterson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꽤 큰 뉴스가 되었다.
Jordan Peterson은, 말하자면 ‘우파’ 혹은 ‘보수진영’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이 결국 기독교인이 된 과정을 나름대로 복기해서 보면,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 체계는 유대-기독교적 문화 전통을 제외하고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부터 출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개인적으로, 또 가족 구성원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종의 ‘회심경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Jordan Peterson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이야기하는 영상 몇개를 모아놓은 것들.
과거에는 자신이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고, 그 대답에 대해 애매하게 피하면서 대답을 했는데, 이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결국 서구세계의 사상적 문화적 유산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은 기독교계에서도 꽤 많이 이루어져왔던 것 같다.

영국의 작가 Tom Holland의 Dominion이라는 책 같은 것에서도, 기독교가 인권, 민주 등 현대 인류가 유익을 얻는 많은 것들이 결국 기독교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Tom Holland는 영국의 철학자 AC Grayling이 기독교가 새롭게 인류에게 제시한 새로운 사상적 innovation을 하나라도 제시해보라고 이야기했을때, 결혼제도, 자연과학의 발전, 모든 인류가 존엄하다는 생각 등이 모두 기독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이야기했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들이 universal truth로 받아들인 것 역시 기독교의 공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접근은 영국의 기독교 방송인 Premier 채널의 변증 프로그램인 Unbelievable에서 많이 다루어지는 접근이기도 하다.

Tom Wright도 이와 비슷한 접근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도 했었고, Tim Keller도 역시 그랬다.

그래서 내가 하게되는 생각은 이것이다.
이런 접근이라면, 보주주의자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매력적일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들에게는?

Extra Nos

Extra Nos – outside of us

우리 밖에서 라고 번역할 수 있는 라틴어 문구이다.

도움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다.
안에서 만들어 지는 것은 도움이 아니다.
안에서 만들어 질 수 있다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도움이 밖에서 온다는 것은 결국 현재 상태에 대한 절망적 진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The help is coming from the outside.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많이 없는 상태.
은혜의 빛이 갈라진 어두움을 뚫고 들어오게되는 것.

Advent를 맞이하는 생각

디모데 전서 1:7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7)

사변적으로 따지며 생각하고 가르치기만하고, 막상 그 말씀의 목적인 깨끗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비판하는 말이다.

한때 이 말씀을 읽으며 내가 아는 누구, 내가 어디서 본 누구에게 이 말씀을 열심히 적용했던 어리석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말씀에서 숨이 턱 막힌다.
내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 지 못하고 있는건데…

….

피상적으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기보다는,
내 인격의 깊이를 위한 말씀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최소한 지금의 내겐 정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Your vote doesn’t count

  1.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의 경우,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사람의 1표는 그 의미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가 투표를 하느냐 마느냐로 크게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람의 표는 미국 전체 선거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이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미국 사람은 미국 대통령선거에 투표를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은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영향은 미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국의 큰 영향 아래 있는 하나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의 표는 미국 사람들의 표에 비해 현저하게 그 의미과 가치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3. 나 같이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은, 여러가지로 투표할 자격이 제한된다.
    우선 미국에서는 전혀 투표할 자격이 없고,
    한국 선거에서도 대통령선거 같이 전국 선거만 참여할 수 있다.
    나는 현 거주지가 미국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같은 것은 참여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의 표는 그나마 더 의미와 가치가 낮은 것이다.
  4. 그러니 내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 무슨 말을 하거나 걱정하거나 뭐 하든 그야말로 별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서도….
    이번 미국 선거는 정말 어느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한쪽 후보가 다른쪽 후보보다는 조금 더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러니… 뭐 이렇게 된거 이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거지 뭐.

멍청함, 무능함, 은혜

대단히 무능하고 대단히 멍청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호의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돌보아주고, 배려해주고, 격려해주고, 무엇보다도 포용해주어야 가능하다.

사람에 따라 얼마나 어떤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 똑똑한지 하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느낄때가 당연히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잘나서 그럴수도 있지만, 너무 못나서 그런 생각을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조금 더 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렇게 한계에 도달할때,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정서적, 물질적 한계에 도달할때,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은혜이다.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도 어떤 사람이 그 멍청함과 무능함에 의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은혜가 아닌가 싶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어제 설교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으로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그런데, 최근 그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대해 약간 다른 해석(?)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비슷한 해석을 한 다른 주석 같은 것을 아직은 보지 못해서…. 혹시 다른 누가 이렇게 해석을 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여리고에서 내려가는길에 어떤 사람이 강도(robber λῃστής)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이 ‘강도’라고 변역한 단어는 흔히 그 당시 열심당원들과 같이 폭력으로 저항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십가가 예수님 양 옆의 강도도 그냥 ‘잡범’들이 아니라, 로마 체제에 반역했던, 폭력으로 반항했던 저항인사들이었던 것이다. (십가가는 로마제국에 대한 반항을 처벌하는 도구였다.)

그러니,
어쩌면 여리고에서 내려가고 있던 이 사람은,
로마에 협력하고 있던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로마인일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니 강도 (λῃστής)가 그 사람을 폭력으로 해치려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이 사람을 피했다는 것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자신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러니 여기서는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긋고있는 종교지도자들과,
그 민족/종교의 바운더리를 넘어서 사람을 돌보는 사마리아인이 대비되는 것.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이같이 행하라’라고 한 것이 그러므로,
민족적/종교적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사랑,
나와 다른 사람과 이웃이 되는 자세를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시 요한복음을 공부해야 할 듯

이번학기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을 공부하고 있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것 같긴 한데, 나름대로 꽤 많이 공부하고 준비해서 하고 있다.
역사적인 예수와 신앙의 예수와의 간극이랄까 그런걸 나름대로 많이 느끼고 있다.

나도 공부하면서 새롭게 보게된 것들도 있고 더 깊게 생각하게 된 것들도 많이 있어 도움이 되었지만,
반면… 내가 정말 이 역사적 예수와 내 신앙의 예수를 제대로 integrate하고 있는걸까 하는 반성을 많이 하게되기도 했다.

그러던중 최근 요한복음을 쭉 읽었는데,
허어.. 이거 참 매우 새롭다.

내게 요한복음은…
20대 일때 내가 참 좋아했던 책이었고,
30대 일때 내 삶의 지침이 되어주었던 책이었는데,
40대가 되면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ㅠ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겐, 요한복음의 예수님이 한편 많이 필요한 것 같다.
다시 요한복음을 공부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Build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개발하고 있는 제품을 만드는 일을 ‘build’라고 표현하곤 한다.

10월, 11월, 12월, 1월 내내 그런 build 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부지런히 비행기도 타고, video call도 하고,
시간대가 다른 쪽과 일을 맞추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서 일을 하기도 한다.

나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고 설득해서,
다른 사람들도 고생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쪽에 중요한 부품을 만들어서 보내주어야 하는 회사가 일을 망치는 바람에 완전 난리가 났었다.
지난 금요일까지 받아야 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금요일 아침에 되어서야 다음주까지 보내준다고 이야기를 해 온 것이다.

완전 난리가 났다.

하루종일 이메일 하고, 전화하고, 회의하고, 목청 높이고, 열받고…

그날 내 slack은 불이 났고, 정말 여러 message를 한 100개쯤은 주고 받은 것 같다.

월급받으며 일하는거 참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기도할때 드러나는 추악함

나름대로 계속 여러 부담을 안고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아침에 시간이 되면 근처 한인 교회 새벽기도에 가기도 하고,
시간이 안되면 약간 일찍 회사에 가서, 회사 conference room 하나에 들어가서 한 20~30분 정도 기도를 하곤 한다.

기도의 부담이 있어서 계속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면 자꾸만 내 추악한 모습들만 자꾸만 보여진다.

예전에도 기도를 할때 그런 경험들이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많이 어려웠을때,
그 문제를 좀 해결해달라고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기도를 하려고 막상 하다보면…
한 5분쯤 지나면 내 기도의 방향이 계속 ‘하나님 나라’라는 쪽으로 흘러가버려서 한편 당황스럽고 한편 속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때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경험을 했었다.

요즘 내 기도는 꽤 치열한 싸움이다.
계속 하나님과 씨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