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

내 생각에,
고집이 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앙없음의 명확한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진정한 신앙을 가로막는 가장 큰 해악은, 자기 중심성이다.
사실, 자기중심성은 ‘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신앙은,
자신으로부터 detach 되어서, 하나님에게 attach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고집이 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념, 좀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판단과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때로, 두려움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고집을 강요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반신앙적인 것일 수 있다.

흔히 강한 자기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여 다른이들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핏보면 강한 신앙의 표현인 것 같아 보이나,
사실은 신앙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집이 세다.

하나님께 좀 대들어보기

어제,
한 동역자가 지난 몇개월간 백혈병과 싸워오다가, 이제 편히 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주 어린 두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선교에 passion을 가지고 있었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

이럴땐,
그냥 잠잠히 하나님의 위로만을 구하면서 기도할수 없다.
좀 따져봐야 한다. 하나님께 좀 대들어보아야 한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라고 갈 수 없다.
하나님께 좀 대들고 하나님과 맞장이라도 떠보기 전엔 말이다.
오늘은 그렇게 하나님께 좀 여쭙고 대들어볼 생각이다.

석찬형제… 얼마 지난 후에 건강한 몸으로 다시 만나요.

많은 말을 하고 싶을 때와 많은 기도를 하고 싶을 때

어떤땐, 말씀을 보면 보는 족족, 그야말로 내 안에서 ‘설교’로 변환되어 쏟아져 나올때가 있다.
(늘 그런건 당연히 아니다. ^^)
물론 나는 설교가가 아니므로, 그 설교들은 대개는 나 자신에게 하는 설교로 끝난다.
어쨌든… 하루 15분 말씀 묵상을 하고서, 10시간짜리 설교가 쏟아져나올때가 있다.
그 설교를 머리 속에서 정리하고나면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지침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내가 사역을 하는 힘을 주기도 하고, 물론 그중 일부는 실제 설교로 사용되기도 한다. ^^

그러나,
어떤땐, 말씀을 보면 보는 족족, 기도로 연결될때가 있다.
(역시, 늘 그런건 당연히 아니다. ^^)
15분 말씀을 보고서는 30~40분 기도를 하고나서도 그 말씀의 내용이 도저히 다 담기질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5분 말씀을 읽고, 10여분 묵상을 하는동안 작은 씨앗과도 같은 말씀이 거대한 열매와 같이 느껴지게된다.
그리고 30분 기도를 하면, 그 씨앗이 그 끝이 어딘지 모이지 않는 거대한 나무가 되어버리는 경험을 한다.

최근,
호세아 본문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의 내용이 내게는 그렇다.
예전에는 호세아 본문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설교거리가 쏟아졌었는데,
요즘은 이 말씀을 보고나서 기도가 쏟아진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기도가 깊을 때에는 말을 많이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아니 말을 많이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기도에 담기는 내용을 말로 풀어내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가 내 마음 안에 있는데,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뭇가지 하나 정도이니…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건 참 dynamic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나’를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할때,
나는 대단히 깊이있는 만족감을 얻게된다.

성령과 Deism

Deism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긴 하셨지만, 여러가지 자연법칙으로 그냥 돌아가게 놓아두시고, 그 안에 개입하시지는 않는다는 관점이다.

미국의 founding father들이 많은 경우 이런 관점을 가졌다. Thomas Jefferson 같은
(그래서, 미국이 마치 기독교적 아이디어로 세워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음… Deistic Christianity를 믿는 사람들은건가 ㅋㅋ)

2005년에, 미국의 youth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Moralistic Therapeutic Deism”이라고 기술했던 책이 나왔었다. 사실 현대의 신앙인들은 매우 Deistic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그런데,
Deistic한 신앙은, 사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때 대단히 어려움에 처한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때,
하나님께서 그 삶에 개입하시지 않는 다는 생각은, 비록 그것이 explicit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더 깊은 영적 정서적 정신적 구렁에 빠지게 한다.

나는,
결국 Deistic한 신앙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 성령이라고 생각한다.
내주하시는 성령을 인정하고, 그분에 의지하고, 그분의 세심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그분의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워낙 성령을 가지고 이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 등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성령을 무시하면, 이성적 신앙이 Deism에 빠지는 것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에서, 특히 영적 리더들이,
기도를 하면서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고,
성령의 능력 나타내는 것을 사모하고 – 그리고 그 능력을 나타내고,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수렁에 빠져있는 한국 교회에서,
심하게 polarize 되어 있어서 이 gridlock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모르는 세상 속에서,
세상의 힘에 압도당하여 결국은 바알과 아세라와 황제를 숭배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보며,
기도를 잃어버리고, 기도를 오용/남용하여 참된 기도가 실종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성령을 따르는 것을 다시한번 목마르게 추구해보는건 어떨까.

그립고 재미있다

나는 박사과정때, plasma라는 걸 했다.
음… 이게 뭐 우주나 태양에 있는 그런 plasma가 아니고,
또, 생물쪽에서 이야기하는 plasma도 아니고…
그것에 비하면 훨씬 낮은 에너지로 만든, 주로 vacuum chamber에서 만드는, 반도체 process 용으로 사용하는 plasma 이다.
Partially ionized gas.

plasma는 여러가지 semiconductor processing에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워낙 복잡해서 plasma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을 찾기가 참 쉽지 않다.

내 박사과정때 지도교수는 이쪽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big 3 혹은 big 5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회에 가면, 순전히 그 사람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덕분에 나는 plasma에 대해서 꽤 탄탄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 동네 어떤 회사에서 interview를 본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원하는 사람이, plasma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의 10년 넘게 넘겨보지 않았던, 옛날 plasma 관련된 책이랑 note들을 어제 좀 읽어 보았다.

우아… 이거… 정말 재미있다!!!!
그래, 정말 내가 이거 진짜 재미있어 했었는데…
혼자서 나는 옛날에 보았던 것들을 보면서,
완전 재미있게 즐겼다.

이런걸 보면, 나는 공부를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긴 하다. 의외로… ㅋㅋ

@ 그렇지만, 오늘 interview를 하는 회사보다는, 내일 interview를 하는 회사쪽에 더 갔으면 하는 마음이 크긴 하다. ^^

에이, 못해먹겠다!?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실망하는 경우는 참 많다.
게다가, 내가 ‘우군’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큰 장애가 되는 일을 만나면 정말 크게 실망하게된다.

가령,
예전에 코스타 실무를 담당하고 있을때였다.
꼭 가치있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옆에서 (혹은 위에서 ㅋㅋ) 엉뚱하게 딴지를 건다거나, 우리가 하는 일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fair하지 않게 비난을 한다거나 하는 일을 참 많이 만났다.

어떤 것은 좀 견딜만 했지만,
어떤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것도 있었다.

에이, 내가 뭐 이거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나 안해.. 이렇게 던져버리고 싶은 때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럴때 나로 하여금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이거 그냥 던져버리면…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게 되는데…

복음을 듣고 성숙해야하는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어쩌라고…

그래서,
‘동역자들’ 때문에 힘들 때나,
‘어르신들’ 때문에 힘들 때,
그래서 확 때려치고 싶을때,
나는 코스타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었다.

말씀을 듣고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
찬양을 하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의 사진,
어쩌다 주고받은 개인적인 이메일들…

그런 것들을 보며 마음을 추스리곤 하였다. 그리고 때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결국 소중한 사역은,
동역자들이나 어르신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 아 물론, 건강하고 소중한 비판과 comment도 많이 있었다. – 그런 것들은 당연히 귀기울여 잘 들어야 하겠지만. ^^

The Desert Song

요즘은,
가끔 어떤 찬양을 듣다가 뭐 하나에 꽃히면 그 찬양을 20번쯤 반복해서 들으면서 가사를 깊이 묵상해보기도 한다.

이 블로그를 읽으시는 분들중,
어떤 분들께는 정말 이 가사의 내용을 꼭 말씀드리고 싶다.
I’m praying for you…

And I will bring praise
I will bring praise
No weapon formed against me shall remain

I will rejoice
I will declare
God is my victory and He is here

은혜와 복음을 향한 갈망

은혜는 복음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favor라는 개념은, 사실 복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복음을 향한 갈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 기도에 대한 열정, 그리고 구령의 열정 등으로 나타나고 표현된다.
그리고 복음을 향한 갈망은 은혜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깊으면 깊을 수록, 복음을 더 깊이 알고 싶은 갈망도 깊어진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비롯되는 복음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러부터 비롯되는 구령의 열정을 가지게될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은혜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은혜를 깊이 인식한다.
→ 하나님을 더 깊이 예배하고 싶은 열망이 깊어지고, 그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어 오고 싶은 열심이 생긴다.
→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 그런 사람들에 비해, 일종의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다.
→ 그래서 복음을 전할때, 은혜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나처럼 해봐 는 식의… 은혜가 빠진 공로주의적 접근이 되게된다.

말씀 사역자들, 성경공부 리더들, spiritual leader들이,
은혜를 망각한채, 다른 이들에게 대해 ‘영적 우월감’을 갖게되면,
결국은 전해야하는 message 자체가 오염되고 그들이 인도되는 곳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율법주의적 종교가 된다.

나 자신을 보면서,
요즘 내가 바로 이 함정에 깊이 빠져있음을 발견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⑦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15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

나는, ‘캘빈주의자’라고 나를 분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깊이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참 좋아한다. – 특히 청교도신학을 참 좋아한다.

예수님을 믿는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결국 그 복음 message의 내용에 내가 동의하고, 믿겠다고 이야기하는 결정일까.

음… 사실 한동안 그렇게 많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믿게되는 과정 속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내 안에 믿음을 주시게 된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사실 이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다보면 정말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성적으로 이해도 되고, 심지어는 감정적으로 동의도 되는데, 막상 ‘저 안에 정말 생명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요즘은,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깊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고 그분으로부터 그 선물을 받는 것에대한 강조를 거의 하지 않은채,
프로그램으로 신자들을 찍어낸다거나,
너무 쉽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것이다’라는 선동으로 사람들을 이끌거나,
아니면 그저 종교적 흥분 / 감정적 흥분을 고취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렇게 하다보니,
이제는 교회를 오래다녔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게 된다.
심지어는 목사님이나 나이 오래드신 사역자들에게서도 너무 흔하게 발견한다.
이런 분들은, 그 안에 생명이 없으므로, 그저 프로그램 / 종교성/ 사회운동 등으로 자신과 교회를 drive할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다.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나게되어,
목사님들, 사역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들을 꿈꾸어 본다.
종교적 감흥이나 의지적 헌신이 아니라, 정말 그 영혼 안에 생명이 들어가는 그런 회심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