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후기 (2)

보통 이쪽 industry에서는 CM (Contract Manufacturer)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디자인과 기본적인 제품 개발은 우리 회사가 하고, 그 개발한 것을 만드는 것을 다른 회사에게 계약을 통해서 만들게 하는 것이다.

가령, Apple에서 iPhone을 개발하고 디자인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조립하는 것은 중국의 Foxconn같은 공장에서 한다. 이런경우 Foxconn은 Apple의 iPhone을 만드는 CM인 것이다.
iPhone의 CM이 Foxconn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iPhone의 CPU는 삼성과 대만의 TMSC에서 만들고, display는 LG display가 만들고… 이런 식으로 부품을 여러 회사에서 만들어서 Foxconn에 공급하면 Foxconn에서 최종 조립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가지 product를 만들때 아주 많은 회사들과 이야기를 해야하고, 이때 이야기하는 모든 회사들의 목록을 보통 supply chain이라고 한다.
내가 여러 회사를 그렇게 다녔던 이유는, 지금 개발하고 있는 한가지 product의 몇개의 key supply chain이 될만한 회사들을 보고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방문해서 가면, 대부분 이 회사들이 아주 많이 환영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어떻게 이 회사들을 평가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꽤 큰 액수의 계약을 이 사람들이 따게 될수도 있고 못따게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것은 아마 잘만 되면 일년에 $10~20M 정도의 revenue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아주 무지막지하게 큰 수준은 아니지만, 작은 회사에게 있어서는 그 회사의 운명을 확~ 바꿀 수 있는 수준이 되는 셈이다.

출장 후기 (1)

출장을 가면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질 않는다.
이번에는 그래도 비교적 일정이 좀 여유로운 출장이었는데도 시차 때문에 몸이 피곤하기도 하고… 하여간 그랬다.
그래서 출장을 가서 겪은 일들이나 거기서 했던 생각들을 이렇게 다녀와서 조금씩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번 출장은 일본에서 4개 회사, 한국에서 4개 회사, 스위스에서 2개 회사 (3개 office)를 찍고 오는 일정이었다.
원래는 그 모든 나라를 한번에 다 돌아보리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나… 그렇게 하면 완전 지구를 일주하게 되는 일정이었을텐데…
그래도 주말에 잠깐이라도 집에 좀 오고 싶어서, 아시아쪽 한번, 유럽 한번 이렇게 나누어서 돌고 왔다.

목적은, 지금 우리가 prototyping하고 있는 어떤 제품이 하나 있는데, 그걸 만들 수 있는 회사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총 여행경비는 대략 $12,000 쯤 되었고,
미국에서 San Jose, San Franciscor, Los Angeles
일본에서 Narita, Haneda
한국에서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스위스에서 Zurich
Layover로 캐나다 Toronto를 다녀왔다.

시차와 싸우는게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

밥 벌어 먹고 살기 (10)

밥 벌어 먹고 사는 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법 벌어 먹고 사는 유일한 수단은 직업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상수’로 두고 방정식을 풀어보아야 한다.
일단 밥은 벌어 먹고 사는데…
거기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 다운 것인지를 풀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승진을 하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포기 하지 않는것,
월급이 적더라도 탐욕에 빠지지 않는것,
자아성취보다는 다른이들을 살리기 위해 일 하는 것,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아끼는 것…

이런 것들이 따라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직장을 변혁하고, 세상을 변혁하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섬기는 일들이 포함될수도 있겠다.

이게 내 나름대로 요즘 내 생각이 다다르고 있는 지점이다. ^^
(이 시리즈 끝~)

밥 벌어 먹고 살기 (8)

(1) 낮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모든 영역들을 나눈다.
– 각 영역별로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찾아서 행동강령을 마련한다.
– 그것을 실현한다.

그러나,
(2) 높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세상의 모든 영역, 하나님의 주권 등등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는다.
– 이미 존재하는 여러 영역들에 그 고찰한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한다.
– 하나님의 주권을 행동강령으로 이해하지 않고 궁극적 이상으로 이해하고 현실에서의 유연함을 유지한다.

다르지 않은가?

말하자면,
북유럽 국가들이 사람을 더 존중하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1)의 방법을 취하기 보다는 (2)의 방법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사랑, 자비, 공의, 인애 등등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그 ‘개념’을 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적당한 현실적 방안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면,
(1)의 방법을 취한다면…
성경적 경제 체체를 이루기 위해
성경적으로 은행을 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세금을 운영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이자를 조정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이런식을 접근 하는 것이다.

(1)의 문제는,
2000년도 더 된 문서 속에서 21세기에 적용가능한 성경적 은행 운영의 원칙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고 왜곡의 위험이 크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생각들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한 후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을 감안해서 더 유연하게 해야하는 것이다.

소위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등식을 마련한 것은 (1)의 방법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성경적 직업관 = [x]’ 라고 해놓고, x에 어떤 것을 넣어도 같은 위험성이 있다.

성경적 직업관을 논하기 전에, 정말 성경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고찰하고…
그것을 현실(직업=밥벌어 먹기) 속에서 잘 적용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밥 벌어 먹고 살기 (7)

한참 전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출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와 관련해서 생각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다.
(혹시 독자들 중에서 출처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유럽(스칸디나비안 국가들), 독일 등의 국가들은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루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위스등의 일부 남유럽 국가들과 영국/스코틀랜드 쪽은 캘빈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미국이 궁극적으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루터와 캘빈은 소위 ‘세계관’에서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흔히 ‘두 왕국 이론’으로 알려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왕국 이론은 세상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와 영적인 영역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가 다르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대단히 이분법적 생각이다.)
반면 캘빈은 제네바에서 사실상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이분법적 생각을 거부하고 일원론적 아이디어를 추구했었다.

예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했던 사람들에게 ‘이원론’은 ‘dirty word’이다. 배격해야할 prime enemy이다.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루터의 두왕궁론은 완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루터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은,
캘빈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인권의식이 발달했고 더 복지국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원론적 사상으로 다스려진 나라들이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할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게… 소위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할때,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낮은 차원에서의 노력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내일 조금 더 이어가보겠다.)

밥 벌어 먹고 살기 (6)

예전에는 그래도 변혁 모델이 조금 더 relavant하다고 생각되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그럼 무얼까?

우선 엘리트의 비율이 현저하게 줄었다.
앞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변혁 모델은 엘리트들에게 적용할때 제일 잘 맞는 모델이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 엘리트가 현저하게 줄었다.
신자유주의체제로 인해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져서 경제적 파워를 가진 집단이 극소수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따라오는 권력 역시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한국에서 예전에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면 그래도 엘리트이고 뭔가 한자리 할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그리 허무맹랑하지 않았는데… 요새 어디 그런가.
명문대 졸업해도 결국 금수저들 명령 받아 일하는 사람들되는게 제일 흔한 코스 아니던가.

그리고 또한 자본의 집중과 권력과 특권의 집중이 심해지면서 그들이 누리는 권력의 부패도 더 심해졌다고 본다. 견제받지 못하는 권력이 부패한다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더 ‘악해졌다’고 나는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다.
부와 권력의 집중이 사회를 더 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악하기 때문에 노력으로 그것을 개혁해 내는 것이 더 어렵게 되었고.

개혁의 주체인 엘리트가 줄어들어서 약화되었고,
개혁을 막는 저항은 더 강해졌으므로 당연히 개혁이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5)

어떤 모델이 얼마나 좋은 모델이냐 하는 것은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모델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을 그런 기준으로 한번 보자.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은,
엘리트, 금수저 등에는 잘 맞는다.
아니 이 사람들은 변혁모델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 능력이 없어서 맨날 구박받는 사람은 어떨까?
직장에서 짤린 사람은?
남들이 잘나가는 회사에 다닐때 나는 빌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변혁의 힘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 일에 충실한 능력 조차 없는데?

신앙을 생각할때,
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야하는 목표/성취를 설정해 놓으면 결국 이런 한계에 부딛힐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정’의 중요함이다.

가령, 우리는 구직을 할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직장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앙의 본질의 입장에서 보아서, 구직을 할때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직의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잘 풀릴때도 있고, 그래서 잘 안풀릴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구직의 열매가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그분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역시 그렇다.
때로는 죽어라고 힘들고, 때로는 열나는 일도 있고, 가끔은 의로운 일도 하고, 어떤때는 승진을 하기도 하고,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변혁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은 신뢰하고, 직장을 돈버는 소중한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변혁의 모델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모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4)

개혁주의/변혁주의적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세속주의/혼합주의에 오염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간 새내기 직장인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C&C man (Copy and Coffee man – 복사기 돌리고 커피 뽑아서 돌리는) 정도에 만족해야할때도 있다.

세상은 변혁시켜야하겠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사명은 이루어야 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승진(!) 이 목표가 된다.
그래야 뭔가를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변혁이 목표이기 때문에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해서 영향력을 키워야지.

그런데 이게…
2년, 3년, 5년, 10년, 그렇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뛰다보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역량은 고지를 점령하는데 집중되게 되고,
고지 점령의 원래 목적인 변혁의 꿈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것이 변혁주의자들이 걸어가는 매우 typical한 변절의 모습이다.

내가 80년대 대학을 다닐때
그렇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기독교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변혁을 위해 고지를 점령해야 했고,
그러면서 결국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절해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변혁의 모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대의 상황이나 어떤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절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3)

“세상을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고 이야기하는 개혁주의적 변혁주의 세계관은 이원론을 극복해내는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종교적이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 매우 가치있다는 주장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깃발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져다준 부작용 역시 대단히 많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반적인 삶의 가치와 의미, 좀 더 좁게는 직업활동의 가치와 의미가 ‘대단한 것’이라고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목사님이 강단에서,
“직업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 자체가 영광이 되게 하라” 고 설교하는 것은 쉬울지 몰라도,
실제로 생존경쟁의 현장인 세상과 맞닥뜨리면서 내가 작아지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공부 잘 해서, 대기업에 취직한 그리스도인 말단 직원이,
그 거대한 대기업의 체제 속에서 도대체 뭘 하면 그 대기업이 변한단 말인가!
세상은 변혁시키라는 구호에 취해있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에 접하면 금방, 이거 뭐야…. 과연 이렇게 사는게 의미가 있는 걸까. 악한 체제, 혹은 marginally 선한 체제 속에서 부품이 되어버리고 있는데… 내가 학생때 꾸웠던 원대한 꿈은 어떻게 되는거란 말인가! 나는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여 잘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면, 직장을 변혁시키지 못하는 좌절 속에서,
어떤 사람은 ‘뭔가 더 새로운 꿈을 찾아서’ 직장을 때려친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좆아서’ 목회자나 기독교 관련 직종을 잡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학생때 가졌던 꿈은 이게 아닌데’ 하며 그저 낙망해 있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그게 세상 사는 거 아닌가.
한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거 말이다.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겠다.
이런 식의 ego-centric한 생각을 연료로하여, 변혁적 세계관의 불을 붙여 놓으니 처음엔 당연히 잘 타기는 하는데… 그 불길이 오래가지도 못하고, 그나마 타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독가스가 나오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직장생활,
그렇게 대단한거 아니다.
그저 밥 벌어먹고 사는 거다.
그걸로 세상 못 바꾼다. 못 바꿔도 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좀 이런 얘기를 해줘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밥 벌어 먹고 살기 (2)

나는 교회에서 흔히 쓰는 ‘비전’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대부분 그 ‘비전’이라는 말이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덧입히고 싶을때 쓰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하나님 안에서 기독 정치가가 될 비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거의 100%는 그냥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잘나가는 정치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는 것이 정죄받을 일도 당연히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것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새성전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라고 목사가 이야기할때, 그것은 그냥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짓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슨 개뿔.

나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직업에서의 욕망을 이런식으로 포장하기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비전, 뭐 그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뭔가 의미있는 직장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심, 직업에서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바람 등등을…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라거나,
직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라거나,
직업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이런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일이 대단히 흔하다.

아니 그냥…
나는 직장에서 승진하고 싶다.
나는 월급을 더 받는 직장에 가고 싶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회사 다녀보고 싶다.
이렇게 좀 딱 까놓고 얘기를 못하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세상적’이라고 욕을 먹을까봐?
그런 바람을 갖는 것은 영적이지 못해서?

이렇게 꼬여버린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언어구조 때문에,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뜻이 구별 불가능하게 되어버리고,
혼합주의와 세속주의가 기독교 안에 더 강력하게 침투해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좀 쉽게 생각해보자.
직장은 그것을 통해 돈 벌어서 그걸로 먹고 살기 위해 다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