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1)

이번에도 아시아 출장을 다녀왔다.
사실은 이번에는 출장 기간 내내 몸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 좀 힘이 들었다.

Mers의 나라인 한국에 다녀왔으니,
그거 걸려 온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만 하지만,
열이 있기나, 기침을 하거나 하는 등의 증상은 사실 전혀 없고,
다만 그야말로 몸이 무겁고,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많이 지치고… 뭐 그런 증상이었다.

예전에는,
출장을 가면 현지시간으로 밤 12시 넘어서 까지 일하고,
새벽 3-4시면 시차 때문에 잠이 깨어서…. 그때부터 또 일하고…
아침 식사 전에 1시간 정도 뛰고, (이게 시차 적응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했었는데,
이전 그런게 잘 되질 않는다.

이번에 출장을 가면서는,
운동하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서 호텔 방에서 기도나 묵상도 하고… 그러겠다고 결심을 했으나,
몸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아 운동도 별로 못하고, 호텔에선 골골 잠을 자게되고 말았다.

사실, 출장 전에 한동안 좀 일이 많기도 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출장이었으므로 마음에 부담도 큰데다,
출장 초반에 몸을 혹사하다보니 탈이 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내게 허락해주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체력’이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서 잠을 별로 자지 않고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대학때 한참 열심히 공부할때는, 하루에 한두시간씩 자면서 일주일을 버틴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만큼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었다. ^^

그런데 이제는 “겉사람이 후패해 감을 느끼는” 피크가 지난 나이가 되고보니,
그게 더 이상 잘 되지 않는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야,
몸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어쩌면 난생 처음 경험하면서 사는 셈이다. ^^

이제는 체력 좋은 것으로 승부해야할 나이는 지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뭔가 좀 더 지혜롭거나, 인격이 훌륭하거나, 풍부한 경험을 통한 통찰이 있거나…
뭐 그래야 하는 나이인 것인데…

음….
그런 경지에 다다르기엔 멀었고,
몸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이에는 다다르게 되었으니…. -.-;

지혜에 대하여 (7)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혜는 결국 여러 단편적 지식들을 통합해 내는 틀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지혜를 갖추면, 지식 습득이 더 쉬워진다.

그런데, 단편적 지식의 통합은 결국,
그 모든 것을 엮어내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면 당연히 더 쉽다.

나는,
오랫동안 신실하게 신앙을 가져온,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노인에게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지적 능력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경험이나 배움의 기회의 차이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대학입학시험 커트라인을 정하듯이 지혜를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사람이 진리를 정말 깨달았다면,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가상의 상태와 비교해 보았을때,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진리에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것에 자신을 던져 사는 삶이 없이도,
진리에 대한 지식을 모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한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엔 히브리문학적 표현으로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거룩한 자를 아는 것) = (지혜의 근본 = 명철)
뭐 이런 도식인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것(Yada)는, 부부과 성관계를 하는 것과 같은 앎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호와를 아는 것이 결국 사람을 진리와, 지혜로 이끈다는 것이겠다.

나는,
지혜를 잃어버린 현대의 기독교가 안타깝다.

지혜에 대하여 (6) – 복음의 인격성이 가져다 주는 지혜

진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면, 진리가 ‘지식’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진리가 인격적이 되면, 진리가 ‘지혜’로 우리를 이끌게 되는 것 같다.

인격은, 다분히 다중적이다.
어떤이의 인격을 기술할때, 그것을 수학 공식이나, 도표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fact의 조합이 인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인격체와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관계가 깊으면 깊을 수록, 그 인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비인격적 진리는 그 대상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혹은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따라서 진리에 제대로 머물 수 없다.

진리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고 했을때,
그러므로 진심으로 지혜로워지려면,
그 진리이신 인격체와 관계를 맺을때만 가능하다.

어떤 종류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은 지식을 보지만, 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지혜를 보기 어려울때가 있다.
나는 그들이, 진리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기 보다, 비인격적 지식으로 대하는것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복음의 인격성을 간과했을때,
우리가 취득하는 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에 머무르고 만다.

지혜에 대하여 (5) – 리더들의 지혜 없음의 난감함

지혜란, 결국 integration이라고 생각한다.
integration이 잘 되어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나이가 40, 50… 심지어는 60, 70이 넘어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하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의 결정을 혼자서 하지 못한다거나,
충분히 handle할 수 있을만한 위기가 닥쳤을때 그것을 전혀 다루어낼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실 정말 많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적어도 내 관찰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integrate하려는 시도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받고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도 있다.
책도 많이 읽고, 책을 쓰기도 하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는 것을 통합하지 않아서 그 지식들이 job function을 할때는 유용할 수 있으나, 막상 자신의 인생을 운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리더들에게는 특히 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의 지도자가,
지혜가 부족한 것을 본적이 있는가.

정말 완전 난감해진다.

분명히 이 시점에서는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어서… (혹은 완전히 딴 소리를 하고 있어서…)
왜 그런지를 살펴보면 그 시점에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게 뭐 동네 조기축구회 같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큰 회사 조직에서도 이런게 발견된다. 완전 깜놀이다…

말하자면, 어떤 insight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리더의 지혜없음으로 인해, 그 조직원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야한다.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 profit, 사람관계, business transaction, 시장 forecast 등등에 대해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합’해 내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plan이 나와야한다.
그냥 여러가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라면,
복음의 본질, 세상, 사람, 성숙, 양육, 예배, 봉사, 선교, 훈련, communication 등등에 대한 단편적 지식 뿐 아니라, 그것들이 통합된 형태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수도 있고,
건강한 ‘vision’을 제시할수도 있다.
건강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심지어는 어떤 분야에 공부와 훈련과 경험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황에 맞닥드렸을때 거의 무기력에 가깝게 반응하는 것은 이런 통합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지 지혜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판별식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분야의 지식과, 다른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가령,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과 재정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회사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과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헤없는 리더들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지혜에 대하여 (4) – 경험이 지혜를 제한할때

나는 Plasma processing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불행이기도 하고, 한편 다행이기도 한데…

내가 박사를 받은 분야는,
말하자면 충분히 mature한 분야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론이 거의 다 완성이 되었고,
사실 나는 그 분야에서 마지막으로 이론적인 부분을 정리한 일단의 사람들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뭐..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분야에서 더 이상 ‘모르는 것’이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행은, 그렇기 때문에 이 분야가 엄청 새롭게 뜨는 그런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다행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plasma processing에 대해 아주 통합적인 체계를 잘 갖게 될 수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을 할 때에는… plasma는 어려워… 그런 그냥 trial-and-error로 때려잡을 수 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던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processing의 결과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던 process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이 사람들로부터, 매우 자주, 아주 유용한 경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또… 너무 자주… 이 사람들이 내가 경험바에 의하면 이런거야… 라고 우기면 대책이 없게 되기도 한다. -.-;

말하자면,
내가 파리 날개를 떼어보았는데, 귀를 먹더라는 것이다.

차라리 현장 경험이 없다면,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부실하게 integrate 한 것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경험이 올바로 integrate 되지 않을 때, 경험은 오히려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된다.

사실 이런 것은,
기독교 세팅에서 많이 발견된다.

배우자 기도 리스트 놓고 기도했더니 기도가 응답되더란다.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아들이 서울대 가더란다.
집을 팔아 교회 건축에 헌금했더니 사업이 컸단다.

뭐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QT sharing 모임같은데 가면 너무 흔하게 듣는다.
말하는 사람은 감격해서 눈물도 흘리고, 듣는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하는데…
막상 내용은 이상하고…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integration 없는 경험은 지혜를 제한한다.
종교적 세팅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혜에 대하여 (3) –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대개 현자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백발에 인자한 미소를 띈, 도인과 같은 모습이다. -.-;
혈기 왕성한 20대의 젋은이로부터 지혜를 구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 생각은, not necessarily 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한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책상 위에 있는 파리를 향해 소리를 치며 책상 옆을 탁 쳤다.
파리가 휙 날라갔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큰 소리를 잘 듣는다”

그 후에 파리를 잡아서, 날개를 떼어버렸다.
그리곤 책상에 놓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리가 날지 못했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날개를 떼면 귀를 먹는다”

파리 날개를 떼어서 소리를 지르는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통합해내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경험은 오히려 잘못된 생각을 build up 하는데 사용되고 만다.

올바른 통합(integr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은,
오히려 어떤 사람을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지혜에 대하여 (2) – 진리는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진리란, 세상이 움직여지는 universal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여러가지 지식을 담아낼 수 있는 일종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예를 들면,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 라는 ‘진리’를 알고 있다면,
우유는 오래두면 상하는데… 과연 계란은 오래두면 상할까? 라는 질문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다.

음식이 오래두면 상한다는 ‘진리’가 없으면,
음식재료마다 이건 오래두면 상할까 하는 여부를 경험을 통해서 조각조각 모아야한다.
그리고 가끔은… 어? 우유는 냉장고 밖에 놓으면 하루만에 상하는데, 김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네. 아마 김은 상하지 않는 음식인가보다… 뭐 이런 황당한 결론에 도달할수도 있다.

…

때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오래 살아온 어른들을 보면,
그분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참 지혜로운 모습을 보게된다.

그런 분들은,
자신이 믿고있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맞닥드렸을때, 참 지혜롭게 결정하고 행동한다.

나는,
그런 분들의 지혜는, 진리를 몸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at least partially)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세상은 어떤 곳이고,
죄가 어떤 것이고,
소망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냥 ‘온 몸’으로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부터 지혜가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이야기하고, 나도 기독교에서 그런 지혜를 많이 배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지식을 많이 이야기하긴 하는데, 지혜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어졌다.
프로그램을 통한 지식의 공급을 이야기하지만, event를 통한 경험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것을 통합해내는 지혜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가끔 깊은 신앙에서 나오는 진리를 가진 어른들에게서 보게되는 지혜의 광채를,
과연 내 세대나 내 다음 세대로부터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지혜에 대하여 (1)

지혜란 무엇일까.
Wikipedia에 따르면, 지혜는 지식, 경험, 이해, 상식, 통찰들을 사용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한다.
(Wisdom is the ability to think and act using knowledge, experience, understanding, common sense, and insight.)

나는 뭐 철학에 관하여, 문외한에 가까우므로, 지혜의 정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주변에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되는데 (특히 이곳 실리콘 밸리에서는)
그런 대비를 통해서 제한적으로나마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조금 더 배울 수 있게 되는 것 같긴 하다.

지식이 도구라면, 지혜는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 식재료라면, 지혜는 요리기술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지혜는 지식과 경험 등을 통합해 내는 (integration)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너무 자주…
지식을 지혜로 환원시키려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정말 지혜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요즘,
잠언을 묵상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지혜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참 많이 하고 있다.

이혼에 대해서 (4)

나는,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아름다운 가정을 promote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 = 좋은 가정 식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내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가 가정을 너무 우상화하여서, 하나님을 상대화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오히려,
가정자체를 하나님의 절대성 앞에서 충분히 상대화할때,
가정을 제 위치에 놓고 보는 perspective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좋은 가정 의 등식이 만들어 지는 것은,
기독교=풍족한 경제생활 이나, 기독교=직업적 성공 의 등식이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기독교=좋은 가정의 등식 때문에,
깨어진 가정의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곤 한다.

기독교 복음은,
깨어진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뉴스이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 바로잡아지게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뉴스이다.
그러나, 복음이 깨어짐의 해결이 immediately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때로 그 깨어짐의 해결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욱 자주, 오히려, 그 깨어진 모습 속에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한다.

….

나는 이 글의 처음에 내가 언급한 대로,
이혼을 교통사고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안전운전을 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교통사고 예방책을 잘 만들되,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주고,
교통사고 당한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책임을 묻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아, 물론 운전자 과실로 교통사고가 생기는 경우도 정말 많이 있다. 정말…)

언젠가,
하나님께서 언젠가 교통사고가 없는 system을 만드실테고,
교통사고의 아픔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으실테니.

이혼에 대해서 (3)

매우 관계가 좋지 않은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는 것에는 큰 유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어려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되는 것이다.

관계가 나아지기위해 노력하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당장 그것이 어려울수도 있다.
그럴 경우, 단기적인 관계의 개선에 목을 매는것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야말로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problem solver의 역할을 해주기 보다는
(물론 problem solver가 될때도 있지만…)
problem에 대하여 다른 perspective를 가지게 해준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좋은 부부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애매하게 교통사고를 겪게 되는 것과 같이,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때, 그 깨어진 죄의 모습 속에서, 그 문제의 해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 자신과 잘 맞지 않는 배우자와 평생을 살수도 있다.
그러면 서로 맞추어 가야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그러면, 그럴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