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08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헌신은 옛날 얘기?

한 달 남짓 전에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에 사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필자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학생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 속에서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러한 현실에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저녁의 대화 이후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제 그러한 세대는 지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흔들 깃발도 잃어버린 그런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 세대를 움직일 그 무엇은 개인적, 서정적 신앙 이외에 대안이 없는가.

미래의 꿈은 정규직? 

얼마 전 본 한국의 어느 TV 드라마에서 본,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어떤 고등학생과 그 학생에게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부모의 대화가 생각난다. 학생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대학을 가서 네 꿈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느닷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째 취업 준비생으로 있는, 옆에 있던 삼촌에게 미래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취업 준비생 삼촌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꿈은 ‘정규직’이라고 답했다. 그 고등학생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대학졸업 후 장래 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대화를 더 극적으로 그리고자 과장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캠퍼스와 지역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꿈도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좋은 배우자 만나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 하는 것.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은 그 꿈이 ‘정규직’인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일,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약간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하느냐, 그것을 얻고자 하는 뒤에 숨어 있는 동인(motivation)과 세계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 잃어버릴 수 없는 꿈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가 정말 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럼 이제는 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을 서정적,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했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선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그 핵심가치를 위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헌신, 희생하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붙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들의 삶 전체를 꿰뚫어 통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여전히 볼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포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꿈이자 희망이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같은 핵심 가치가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

첫째,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통합하여 살아갈 가치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길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심하게 비뚤어져 있는가 하는 내용을 보며 함께 애통해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거짓되고 어그러진 가치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된 궁극적 삶의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마름이 우리 안에 생길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되는 삶의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아직 그 가치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궁극적 삶의 길을 내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으나 삶 속에서 통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새롭게 정리하고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유일한 삶의 바른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변화가 있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유일한 삶의 바른길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들에 많은 이들이 함께 헌신하기 원한다. 세상이 그토록 목말라 보고 싶어 하는 올바른 삶의 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이제 우리에게 함께 부를 노래가, 함께 외칠 구호가, 함께 흔들 깃발이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한다

KOSTA/USA-2008 집회를 통해 큰 감동을 하고, 집회가 성황리에 마쳐지는 것은 분명히 이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부어주실 큰 은혜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KOSTA/USA-2008 집회 이후 하나님께서 미국 내 한인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그로 말미암아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선포되고 확장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흥분시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모험의 즐거움

코스타 집회가 불과 한달도 남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집회이다보니 챙겨야 할 일들도 많은데…
코스타를 섬기는 사람들의 조직 자체가 워낙 느슨하다보니 빵꾸가 엄청 많이 난다. ^^

마지막 순간에 정하거나 때워야 하는 일들도 많이 생기고.

처음 코스타 간사로 섬기기 시작했던 10년 전…
이런 일들이 생길때면 나는 panic 했었다.
처음 맡았던 일이 KOSTA VOICE 였는데…. 밤새 신문 기사를 써서 편집하고 복사를 맡겨서 새벽에 찾아오는 일이었다.

그때 내가 어쩌다 가끔 꾸었던 악몽은…
깜빡 잠이들었는데 내가 코스타 보이스 복사를 다 못한 것이었다.
아침에 1000여명의 사람들이 코스타 보이스를 찾는데 제대로 못해낸 꿈.
이런 꿈을 코스타 집회 기간뿐 아니고… 시도때도 없이… 꾸었었다.
그만큼 마음의 부담이 컸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일들을 챙겨야 하고…
훨씬 더 급한 일들을 챙겨야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마음이 훨씬 더 여유롭다.

도저히 잘 안풀릴 것 같은 일들이 어느순간 스스르 풀리는 일들을 너무 자주 경험했기 때문이다.
빵꾸가 나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일이 잘 안풀리면…
묘한 흥분이 마음에 생긴다.

요거봐라…. 흠… 한번 볼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파리는 날개를 떼면 귀를 먹는다?

어떤 사람이 파리 한마리를 놓고 실험을 했다.
파리를 잡아놓고 책상위에 놓은 다음 책상을 탁 하고 쳤더니 파리가 날아갔다.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책상치는 소리에 놀라 날아간다.”

그후 그 사람은 그 파리를 다시 잡아다가 이번에는 날개를 다 떼고 책상위에 놓았다.
다시 책상을 탁 쳤으나 파리는 그저 책상위에서 기어서 움직일 뿐이었다.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날개를 떼면 귀를 먹는다.”

미숙한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불완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과잉 일반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누구 얘기냐고? 당연히 내 얘기지… ^^

긍정적 모델과 부정적 모델

다른이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자세는 건강한 신앙인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렸다.

그런데,
그 다른이의 모습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따르게 되는 “긍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이의 모습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면서 피하게 되는 “부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부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쉽고, 주변에 매우 많고, 내게 오는 효과도 강력하다.
그러나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자칫 잘못하면 나는 성숙하지 못한채 비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긍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어렵고,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긍정적 모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까지도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그 긍정적 모델을 보면서 강한 motivation을 갖는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긍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스케일이 크고, 발전적이고, 부작용이 적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소위 신앙의 성숙이 깊어질수록 당연히 긍정적 모델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부정적 모델을 찾기가 쉬울 것 같은데..
때로 어떤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끊임없이 긍정적 모델들을 통해 자신의 성숙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그 궁극적 긍정적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겠지.

나도 역시…
내가 스스로 신앙이 성숙하다고 자만할때면 주변에 늘 부정적 모델에 휩싸여 살게 되고,
내가 스스로 겸손하여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긍정적 모델들이 성경 속에, 책 속에, 내 주변에 나타난다.

게으름과 조급함, 여유로움과 부지런함

스스로를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부지런하기 보다는 마음이 조급한 것이고,
스스로를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다고 평가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다기 보다는 게으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게으름과 조급함은 그 뿌리가 같고,
마음의 여유와 부지런함은 그 뿌리가 같은 것 같다.

문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게으르면서 조급한 쪽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마음의 참된 여유와 뜨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부지런함을 겸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Context와 Text

가끔 훌륭한 선배나 어른들의 걸어온 길들 듣게되면 여러가지로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분들의 어떤 특정한 생각들에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일들을 겪게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는 물론 내 생각의 틀이 부족해서 그분들의 사상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살아오신 context 속에서 그분들이 내린 결론이 더이상 새로운 context에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내가 매우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아직도 1980년대 1990년대의 context에서 세워진 그분들의 신앙의 논리로 2000년대의 context에 적용하려는 분들을 만난다.

이분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 그리고 새로운 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깊은 감동을 받지만, 때로는 이 어른들이 새롭게 도래한 context에 대한 이해없이 논리를 펴기시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이전 context에서 개발된 논리를 다시 수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세대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는 일들을 만난다.

내가 어른이 되어도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체중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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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데 올리기 좀 쑥스럽지만…
내 스스로에게 더 큰 motivation을 주기 위해서…
2년쯤 전에… 오랜만에 이리저리 건강 검진을 받았다.
큰 건강의 문제가 있덨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가지 좋지 않는 증세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overweight에, 콜레스테롤이 높고, 고지혈증에… 게다가 약간의 지방간 증상까지.

그게 2006년 가을이었다.

그때 이후로 점점 식사를 조절하고 운동을 하면서 체중조절을 하고 있다.
2007년 1월 부터는 거의 매일 체중을 재면서 체중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up & down이 있지만…
(체중 조절이 좀 된다 싶어서 운동을 안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체중이 늘면 다시 운동을 하고… 뭐 좀 그랬다.)

2006년 thanksgiving 직전에 쟀던 체중 192 파운드 (87Kg),
어제 잰 체중 159 파운드 (72Kg) .

금년 가을까지 150파운드 (68 Kg) 정도까지 줄이는 것이 목표이다.

운동을 하고 체중을 줄이면서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콜레스테롤도 정상치, 고지혈증 증세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서 훨씬 더 생기가 돈다.

나야… 미용을 위해 체중조절을 하는게 아니고 건강을 위한 것이니까…

하루에 대략 6-8마일 정도를 뛰고, 총 섭취하는 칼로리의 양을 2000-2500 이하로 절제하고 있다.
대략 한달 30일중 2/3 정도에 운동을 하고 있다.
기름진 식사를 되도록 하지 않고, 설탕 섭취를 줄였다. 현미밥을 먹고, 과일을 섭취를 좀 늘였고, 육식은 제한적으로 기름기 적은 것만 한다.

주말에 보스턴에 가지 않는 때에 시간이 남으면 10마일 넘게 뛸때도 있고…
두주 전에는 얼마나 뛸수 있나 테스트 해보기 위해서 한번 뛰어 봤는데…
15마일까지는 크게 어려움 없이 뛸수 있음을 확인했다. (트레드 밀에서 뛴거니까… 실제로 뛰면 이보다 못하겠지만.)

이렇게 써놓고 나니 좀 쑥스럽구만…

아참, 다음의 web site에서 얼마나 칼로리를 섭취해야하나 계산도 할수 있다. 꽤 유용함.
http://www.globalrph.com/dieting_calc.htm

Bashing 이명박

나는 지난 한국 대선에서 투표권도 없었지만 (영주권자는 투표권 없다… 대한민국 국민 자격도 없는 거지)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가운데 하나이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어서 생길 여러가지 consequence들이 안타깝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채 이명박씨를 지지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안타까웠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것은, 역사의 후퇴로 생각했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또한…
내가 이명박씨의 실패들을 보면서…
그것에 대한 harsh한 말을 쏟아놓는 인터넷의 말들을 보면서…
이명박씨를 찍은사람들을 보는 것 못지 않게 안타까움을 느낀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동안
비논리적, 비합리적 왜곡을 동원해서 정권 까대기에 앞장섰던 조중동의 행태와 크게 다르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이 팔리지 않게 되는 것이 한국 시민의식의 발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요즈음 오마이뉴스등이 글을 올리고 있는 것은 10년동안 조중동에게 당했던 것을 치졸하게 복수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노빠’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람이 쓴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이야… 이거 까는거 재미있네. 조중동이 지난 10년동안 이맛에 신문 만들었구나”

한국의 수구세력들을 증오에 가깝도록 싫어하는 나로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언제쯤 치졸한 비난이 아닌 건강한 비판이 담긴 생각들을 나누는 언론, 커뮤니티, 지식인들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