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Come, Oh Come, Emmanuel

이번 성탄에는,
이 노래를 유난히 많이 흥얼거렸다.

깨어진 세상속에 오신 평화의 왕…
Shalom을 마침내 이땅에 구현하시는…

모든이에게 그 Shalom이 가득한 성탄이 되길…

Oh, come, oh, come, Emmanuel,
And ransom captive Israel,
That mourns in lonely exile here
Until the Son of God appear.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our Wisdom from on high,
Who ordered all things mightily;
To us the path of knowledge show,
and teach us in her ways to go.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oh, come, our Lord of might,
Who to your tribes on Sinai’s height
In ancient times gave holy law,
In cloud and majesty and awe.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O Rod of Jesse’s stem,
From ev’ry foe deliver them
That trust your mighty pow’r to save;
Bring them in vict’ry through the grave.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O Key of David, come,
And open wide our heav’nly home;
Make safe the way that leads on high,
And close the path to misery.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our Dayspring from on high,
And cheer us by your drawing nigh,
Disperse the gloomy clouds of night,
And death’s dark shadows put to flight.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Oh, come, Desire of nations, bind
In one the hearts of all mankind;
Oh, bid our sad divisions cease,
And be yourself our King of Peace.
Rejoice! Rejoice! Emmanuel
Shall come to you, O Israel!

나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나?

지난주 우리 그룹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감동(?)을 받은 내 글에 답글을 적어주신 분의 comment에 encourage 되어서. work ethic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유학생’이던 시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성실하지 못했다.

때로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내가 일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지도교수를 만족시켜서 졸업하는’ 것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한주 한주 지도교수가 만족할만한 것들을 보여주어서 최소한의 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어쩌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 것 처럼…
나도 그렇게 하다가 결과가 그럭저럭 나와서 졸업을 했다고 볼수도 있는데…

정말 내가 했던 일을 얼마나 ‘내것’으로 생각하면서 했는지,
그것을 위해서 ‘책임’을 지는 모습으로 일을 했는지 하는 것을 돌아보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길지 않지만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 일했던 나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일은 ‘회사일’ 이었고 나는 내가 해야하는 할당량만을 채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내 ‘동료 유학생들’, ‘동료 직장인들,’ ‘동료 대학원생들’이 주로 그랬다.

왜 그랬을까.

물론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가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 (물론 우리 회사에서 있는 모든 이들이 내가 존경할만한 방식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얹혀서 일종의 ‘free-ride’를 하는 사람도 많다.)이 철저하게 훈련받은 work ethic을 내가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
회사를 위해서, 상사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것이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창의력을 동원해서 그 일에 애착을 가지고 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한국에서 일하는 문화가 어떤 일을 그 사람의 일로 여기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다)

때로는 자신이 궁금한 것을 열심히 찾아서 공부하는 inquisitiveness와,
그러나 함께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잠깐 내려놓고 공동의 작업에 매달리는 balance를 찾는 것이라든지..

자신을 망가뜨리도록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balance 라든지,

일 이외에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성실하고도 꼼꼼하게 하는 balance…

이런 것들은 내가 이전에 갖지 못하던 것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work ethic을 길러 내는 것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닌 듯 하다.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culture, 사람들이 가지는 가치관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겠지.

유난을 떠는 부모

내 아내는, 내게 ‘유난을 떠는 아빠’라고 늘 놀린다.
딸아이라면 정신을 못차린다고 한다.

정말 내가 유난을 떠는 아빠일까.

내가 꽤 나이가 들어서 였는데,
내가 나의 부모님이 아닌 다른 부모님을 보면서 거의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함께 식사를 하다가 어머니가 자기 딸이 맛있게 먹고 있는 음식을 맛을 보자며 가져가서 먹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뭐 그게 그리 별일이냐 싶겠지만,
내게 그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나의 부모님이 내가 먹는 음식을 ‘맛있어 보인다 조금 먹어보자’며 드신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유난을 떠는 부모’에게서 ‘유난을 떠난 아들’이 나온 것이다.

지나치게 자녀를 과보호하는 것은 물론 좋지 않겠으나,
자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이제는,
내가 내 아이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줄 차례인데…

한시간에 150불

US Army와 관련된 project를 하면서,
나같은 engineer 한사람이 한시간 일한 것에 대한 charge를 시간당 $150 정도 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각종 overhead를 포함한 것이므로 실제로 내게 돌아오는 돈은 그것의 절반도 훨씬 안되는 액수이다. ^^)

한시간에 150불이라…
일년에 30만불이 넘는 액수이다!

과연 나를 포함해서,
내가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일까.
한시간에 적어도 150불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한 30분 커피 마시면서 잡담을 하면,
순식간에 70불이 넘는 돈을 날리는 것인데…
그런 시간 낭비는 없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적어도 내가 회사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그 이상의 가치를 창출하면서 일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creative 하고, knowledgeable 하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충실하게 할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 자체를 확장시키면서 함께 일하는 team에 dynamics하게 기여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평소에 느긋하게 5시면 퇴근하던 사람들도,
필요하다면 2-3시가 되도록 일하는 것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휴가를 취소하고 밤 늦게까지 실험실에서 실험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미 HP Labs에서 일한지 30년이 넘은 MIT 출신의 engineer 한분은 여전히 내가 쓰고 있는 장비가 고장나면 당장 연장통을 자기가 가서 뒤진다. (그리고 그런것이 정말 재미있단다!)

다음주부터 두주동안 회사의 실험실이 shut-down을 한다. cost saving을 위해서 지난 몇년간 계속 그래오고 있는데…

그 두주 동안 일을 못하기 때문에,
일의 진전이 늦어지지 않게 한다면서…
지난 한주는 정말 모두가 평소보다 더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함께 일했다.

이런 이들이라면,
한시간에 150불이 전혀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다.

다만….
난…
내가 일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

회사일을 하면서…

Business deal을 위한 meeting을 할 때,
특히 한국의 culture에서는 소위 ‘기선제압’을 하는 것이 중요한 듯 하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많이 보긴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자신의 경력이 얼마나 좋은가,
업적이 어떤가 등등을 이야기해서 기선을 제압하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다짜고짜 상대의 아이디어를 깔아 뭉게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거나…

하다못해
교묘하게 대화 상대보다 상석에 앉는다던지,
아주 바쁜척 하면서 지금 임하는 business meeting이 자신에게는 덜 중요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던가 하는 방법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기선을 제압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럴때,
어떻게 반응을 하면 좋을까?

적어도 내가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하는 일을 통해서 나와 내 회사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이 함께 유익을 얻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회사 관련된 협상이나 meeting을 할때에도…
그런 우리의 spirit을 나눌 수는 없을까?

그렇게 미리부터 우리 기선제압하려 할 필요 없다고…
우리는 당신을 take advantage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당신과 함께 잘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C 형제 이야기

지난 2009년 KOSTA/USA의 주제는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였다.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깨달음이 있었던 주제였다.

나는 비록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주제를 몇개월간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내가 이해하는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한껏 깊고 넓게하는 경험을 하였다.

특히 2009년의 주제문은 참 호소력있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배경을 친절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를 실제적인 삶의 영역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C 형제는,
지난 2009년 주제문 초안을 잡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몇 사람중 한 사람이다.
지난 Chicago conference의 conference design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C 형제가,
최근 닥쳐온 경제위기의 여파로 실직했다.

H visa status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조만간 미국에서 job을 잡지 못하면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을 해야할 지경에 쳐해있다.
귀국을 한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꽤 들었기 때문에 쉽게 아무렇게나 job을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고 한다.
여러가지로 직장을 얻기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정말 이상하리만치 길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이상하게 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깊이 개입하고 계신 것일텐데… 한편 기대가 되지만 역시 주된 마음은 답답함이다.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이 주제를 정했을때, 이 주제문을 써내려가던 순간에…
우리는 이렇게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쳐한 이들에게 소망의 근거를 이야기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던 이가 바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그렇기에,
C 형제의 어려움은 단지 그 형제만의 어려움이 아닌 듯 하다.

하나님께서…
KOSTA/USA를 섬기는 이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외치고 기도하고 주장했던 그것이 정말 너희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C 형제가 매우 벅차고 힘들게…
그러나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싸우고 있는 이 싸움을 보며…
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C 형제의 삶과 기도와 땀과 눈물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앞으로의 삶에 큰 기대를 건다.

고난을 활용(?)하기

어그러진, 비뚤어진 창조 질서 내에 있는 사람들은…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피조세계가 처해있는 framework 자체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 고난의 영향아래 있게될 수 밖에 없다.

고난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고난을 활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다.

몇가지 생각해보면…

1. 고난을 통해 비뚤어지지 않은 창조질서에 대한 목마름을 더 깊이 인식한다.
2. 고난의 근원이 이미 복음 안에서 해결되었음을 감사한다.
3. 고난을 겪는 형제-자매들의 아픔에 동참한다.
4. 아직 고난의 의미와 깊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겪는 고난의 내용을 다른이에게 이야기해준다.

최근,
개인적인 고난을 겪고 있는…
그러나 그 고난을 개인적으로만 볼 수 없는 그런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랑하는 형제를 생각하며,
그 형제의 영광스러운 싸움에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Did Christianity Cause the Crash?

The Atlantic 잡지의 이번달 기사중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http://www.theatlantic.com/doc/200912/rosin-prosperity-gospel

몇가지 이유로 이들의 분석에 동의하기 좀 어렵긴 하지만… (prosperity gospel이 그렇게 영향력이 크지도 않고… 이들이 majority도 아니라는 차원에서)

이 글을 읽으며
내가 그리스도인임이 부끄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