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 Week 묵상 – 고통

어제, 

한국에서 수학여행을 가던 아이들이 탔던 배가 침몰한 뉴스를 들었다.


어찌나 가슴이 막막해지고 힘들던지…

아… 정말 몇번씩이나 탄식이 나왔다.

이건 아닌데…

정말 이런건 아닌데…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 건데…

아끼는 친구들의 힘든 모습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뉴스를 들으며…

그리고 또… 내가 그런 힘든 상황을 지나기도 하면서…

예수께서 그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 소망을 주시기 위해 자신이 그 고통을 짊어지셨음을 생각해본다.

침몰하는 배 속에서 두려워했을 아이들의 두려움 만큼이나 예수의 두려움이 컸을까?

그 아이들을 잃어버린 부모만큼이나 예수께서는 아파하셨을까?

깊은 삶의 절망의 골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운 마음을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두고 가지셨을까?

오늘은…

도무지…

‘고통’이라는 지점으로부터 조금도 생각이 더 움직여지질 않는다.

Holy Week 묵상 – penal substitution

소위 penal substitution이라는 개념을 마치 ‘옛날 식의 atonement theory’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만드는 key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희생으로,

내 죄값을 치루고,

내가 회복되었다는 말씀.

그래서 이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내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

‘역사적 예수’연구를 들여다보면,

사실 penal substitution에 관한 이야기들이 별로 나오질 않는다.

그리고,

1세기 유대교 배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로 오셨고,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fulfill 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보면,

예수는 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지만, 초역사적 인물이시기도 하시다.

성경은 시간 속에 침투해 온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전히 ‘내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내가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해서 사랑하는 대상이다.

내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고,

내가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영원히 따를 내 주 (Lord) 이시다. 

Holy Week 묵상 – 개인적 복음

금년 초 였던가,

일본에 출장을 가 있었는데,

신깐센을 타고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내 머리 속에는 이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이 아니라 ‘나’ 말이야.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등등은 논리적으로 잘 파악이 되는데,

갑자기…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희미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괴로웠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사랑하시긴 하지만, ‘나’라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뭐 ‘나’라는 개인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께 크게 손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

말하자면,

내가 모래성을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하자. 

그 모래성을 참 좋아하고, 어쩌다 그것이 망가지면 안타까워할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안의 모래 한알 한알에 어떤 애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뭐 비슷한 논리였다. 


뭐 여러가지 논리적 전개를 통해,

나름대로 성경 여기 저기를 뒤적이며,

그리고 내 개인적인 ‘체험’을 되새기며 그 의심이 많이 가셔지긴 했었는데…

그때 얻은 교훈은 이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디 정말 중요하다.

성경을 사유화(privatize)해서 읽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성경읽는 방법이다.

그리고, 흔히 사유화해서 읽어내는 성경 본문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잘 못 해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주간에…

그런 사유화의 오류의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 깊이 마음에 담아보고 싶다.

예수께서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나’에게 머물렀음을 마음에 더 담아보고 싶다.

결국 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정말 중요한 사람이 아니던가!

Holy Week 묵상 – 복음, 역사성

복음이 그저 시간을 초월한 개념이 아니라, 시간 속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복음의 nature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경전이나 이야기들의 실제 역사적 사실 여부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면,

그분의 십자가 처형,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그 모든 근거와 근본을 잃어버리게된다.

기독교가 이렇게 인간의 역사 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종교로 만든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news이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advice이다.

만일, 마치 예수에 대한 뉴스가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은,

‘내면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Holy week을 맞으면서,

복음이 역사속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것과,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뉴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나의 독서법 (1)

사실 한달에 한권 책 읽을까 말까 한 수준이므로,
내가 무슨 독서법 어쩌구를 논할만한 수준이 절대 못된다.
게다가 요즘은 그나마도 시간이 없어 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 내가 어떻게 독서를 하고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기에 한번 정리해서 써보기로 하였다.
뭐 대단한 자랑거리가 아니므로, 아마 이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
혹시 좀 도움을 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대학생때,
한학기에 6과목 정도를 들었고, 일년에 12과목을 정규학기에 들었다.
평균적으로 한달에 한권정도 text book을 보는 셈이었다.

그래서 대학생때 결심했다.
전공서적 한권당 신앙서적 한권을 읽겠다고.
그래서 한달에 한권 책읽기를 시작했다.

늘 잘 지킨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로부터 한 15년 정도는 꽤 지켰다.
처음에는 가벼운 에세이 등부터 시작했지만, 점차 신학서적들도 읽었다.

조직신학, 성서 해석학, 교회사, OT/NT survey 등은 신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수준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꽤 열심히 공부했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미국의 잘 알려진 복음주의 신학교 M Div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를 혼자서 독학한 경우도 있었다.)

보스턴에 있을 때에는, 근처의 신학교 한학기 강의 tape 전체를 구해다가 들으며 공부를 한적도 있었다.소위 ‘인터넷 강의’가 많이 뜨고난 다음엔 거의 미친듯이 여기저기 강의들을 들었고, 그중에는 정규 신학교 강의를 도강(?) 하기도 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좀 공부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사실 많이 남는데… 아직 포기한건 아니다! ㅎㅎ 혹시 여유가 생기면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리고 소그룹에 대한 책, 경건생활에 대한 책, 그리고 고전들…
이럭 저럭 읽은 것들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던것 같기는 하다.

We were so close!

두 주 쯤 전에, 동네 산책을 하다가 비어있는 office space 옆을 지나갔다.

나는 아직도 그런 모습을 보면 예전에 ‘우리 회사’ 사람들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끼리 이런 office도 따로 마련하고 ‘우리 회사’를 제대로 해볼것이라는 꿈을 꾸었던 추억에 잠기게 된다.

어제 저녁에, 옛날 file들을 뒤젹어보니, 2012년 가을까지도 정말 열심히 실험도 하고, 여기 저기 다른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면서 회사를 살려보려고 노력을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후, 실제로 manufacturing을 하는 회사들을 겪어보고, 소위 ‘잘나가는’ 회사들을 겪어보니…그 당시 우리가 얼마나 ‘고지’에 가까이 갔었던가 하는 것을 더 피부로 느낀다.

그때 우리가,Dick Tracy watch를 flexible display로 만들어보겠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이제 슬슬 현실로 나타나고 있고,소위 Roll-to-Roll 이라는 방법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기술은 아직도 그 당시 우리 그룹의 수준 가까이 다가온 팀이 없다. (어쩌면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지금의 ‘우리 그룹’이 그나마 제일 근접한 수준이 아닐까.)

황순원의 소나기 맨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나, 피천득의 인연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느끼는 가슴 싸~ 한 느낌…

‘예전 우리 회사’를 생각할때나,예전에 우리가 꿈꿨던 것이 그러부터 2년도 더 지나서야 조금씩 현실화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때…그런 싸~ 한 느낌이 다가온다.

 

 

 

20대의 허황된 꿈, 40대의 자아성찰

스무살이 갓 지났을때, 추운 기숙사 책상에서 혼자 성경을 읽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니, 도대체… 정말 이런게 기독교란 말인가!

나는 엄청 충격에 빠졌었다.

그 복음을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큰 변화를 겪으며…

아, 이런 추세라면 내가 40살, 50살, 60살쯤 되어서는 정말 성숙하고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어 있겠구나.

그때쯤 되면 내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대의 꿈과 예상이 허황된 것이었을까.

그때,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40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형편없는 사람이다.

20대에, 

열정으로 불타는 자아가 너무 강하게 살아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바울의 고백이 언제나 내게도 이루어 질까… 하는 갈망으로 살면서도,

앞으로 20-30년 후에는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해 있겠지 하는 기대를 가져었는데…


지금 나를 보면…

참… 아직도 멀었다.

내 삶의 control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고,

사랑과 자존심의 갈래에서 늘 자존심을 선택하고,

고집이 날로 갈수록 강해져서 이제는 나를 갉아먹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고,

미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만 늘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간에 대한, 혹은 좀 더 좁게는, 나 자신에 대한 젊은 시절의 낙관론을 접고,

죄인 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죄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깊어지다보니,

비판의 날을 강하게 세우는 것도 그저 부끄럽게만 여겨지고,

예전같으면 몇년씩 미워했을 사람을 향해서도 그래…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여유는 생기게 된 것 같다.

날이 갈수록,

언젠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 같이’ 우리 주님을 보게될 그 때,

그래서 지금의 어그러진 모습으로부터 훨씬 자유롭게 될 그 때에 대한 소망이 커지게 되는 것 같다.

사순절에 해볼만한 40대의 묵상이 아닐까 싶다.

성공과 실패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내가 속한 팀은 그렇게 크지 않다.

불과 10명 남짓 되는 팀인데, 한 사람의 엔지니어가 꽤 많은 부분을 맡아서 일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맡은 일은, 소위 ‘core technology’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내가 처음 이 팀에 join해서 이 일을 맡게 되었을때,

지금 이부분의 일이…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다. That keeps me up at night 뭐 이렇게 윗사람이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당연히, 내게 주어지는 부담감이 만빵이다.

사실 내가 잘 못하면, 우리 팀에서 하는 다른 모든일이 모두 꽝! 이 된다. 

지난 4개월 남짓 되는 기간 동안에, 내가 하는 일에 쏟아부은 돈이, 우리 팀 전체 예산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주어진 시간의 제약 안에서, 그리고 주어진 예산의 제약 안에서,

지금 이 일을 하려면 내가 그냥 열심히 해서만 되는 것이 아닌 상황이다.

소위 ‘luck’이 필요하다고나 할까.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지난 주,

내가 독일에 가 있는 동안, 산호세 office에서는, 내가 만든 part를 이용해서 최초로 device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우리 team 전체의 major milestone이라면서 환호했다.

예전 같으면,

혼자 우쭐해져서… 그래.. 내가 하니까 잘 된거네… 

뭐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특별히 뭘 잘했다기 보다는 정말 그냥 일이 어쩌다 잘 된거다. 

그런데,

만일 이 일이 잘 못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심하게 자책했을 것 같다. 아, 그때 이건 이렇게 잘 못 한거야… 이건 이제 문제였지…

별로 fair 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잘되면 남탓, 못되면 내탓이라는 말인데…

앞으로 정말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까지 가야할 길이 꽤 멀긴 하다.

정말 이 project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혹시 주어지게될 성공의 공을 내게 얼마나 돌려야 하는 걸까,

혹은 실패의 원인을 얼마나 나로부터 찾아야 할까.

많이 고민이 된다.

No place like home?!

출장을 떠나기 전,

정말 많이 바빴다.

음… physically 바쁘기도 했지만, 직장일 관련한 stress가 대단히 높은 상태였다.

차라리 비행기를 타고, 좀 쉬고 싶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에는 다른 일 하지 않고 좀 쉴 수 있으므로.

출장을 가서는, 생각보다 일이 바쁘지 않았다.

정말 내가 출장을 가서 이렇게 여유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중 하루는 오후 3시에 일이 끝나 ‘자유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 ‘자유시간’에는 나는 호텔에 들어가서 잤다. .-;

내가 가 있는 동안 날씨도 좋았고, 일도 비교적 잘 되었는데… 

그래서 원한다면 좀 ‘관광’을 해볼수도 있었을 텐데…

사실 그럴만큼 힘이 없었다.

그저 좀 누워서 자고 싶었다.

덕분에 한주 동안, 독일에서 잘 쉬었다.

하루에 8-9시간씩 자며 지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오는 비행편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에서 샌프란시스코오는 비행편이 취소되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 더 지내야 했고, 어제(주일) 오후 늦게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오니, 

아내와 민우와 하이디가 나를 반겨준다.

내가 없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테고,

민우는 감기에 걸렸다.

집에 와서 가족을 보니 좋다.

그러나…

이번에 실험해온 sample들을 evaluate하기 위해서, 앞으로 두주 정도는 또 완전히 바쁘게 지내게 될텐데…

Still, it;s great to be home.

이번주는 독일 출장중

제가 ‘공지’로 글을 올렸다고 생각했는데, 안올라갔었네요. 

이번주는 독일에 출장중이어서, 매일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Lufthansa가 파업중이어서 과연 제때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상적으로 집에 돌아가게 된다면, 월요일부터 다시 블로그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꾸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