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iprocity

내가 어떤 일을 할때,
상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는 것.

혹은 내가 어떤 일을 하지 않을때,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

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황금률이 과연 그런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상호주의(reciprocity)는,
상대의 반응에 대한 기대가 중요한 key인 반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

예수님의 황금률은,
나의 행동이 중요한 key인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하면 내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런의미에서,
황금률이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key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My Favorite Movie

한때,
무진장 영화음악들을 좋아해서 그걸 ‘테이프’에 녹음해서 ‘워크맨’에 넣고 늘어질때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FM radio에서 ‘영화음악’만을 들려주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었고, 그걸 듣고 있다가 좋은 음악이 나오면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그론 했었다.

몇년전,
민우가 일본 만화를 보고 싶다고 해서, Japan town에 민우를 데리고 갔었다.
민우가 한참 ‘나루토’ 만화책을 고르고 있는 중에 나는 혼자서 그 책방을 돌아다니다가 ‘Howl’s Moving Castle’이라는 영화를 ‘그림책’으로 만든 것을 보았다. 그냥 무심코 넘기는데 완전 재미있어 보였다! ㅎㅎ

그후,
그 Netflix를 통해서 그 만화영화를 실제로 보고는, 난 완전 빠졌다.
Netflix에서 그때 한시적으로 그 만화를 streaming으로 풀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마 10번 이상 봤을 거다.

특히 거기에서 나오는 음악이 참 좋았다.
그래서 그 음악만을 따로 youtube에서 수십번을 더 들었다.
나는 결국 그 영화를 download 받았다! 내가 직접 돈을 지불하고 영화를 download 받은건 이게 여태까지도 유일하다.

그 후에,
그걸 내 ipad에 넣어놓고, 출장을 갈때마다 그걸 참 많이 보았다.
여태껏 그 영화를 수십번은 봤을 거다.

최근 며칠,
일이 많은데다 피곤해서 회사에서 커피를 많이 마시다보니 밤에 침대에 누워 잠이 잘 오질 않을 때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Howl’s moving castle을 보다가 Sophie가 Howl 하고 하늘을 걸어다니는 장면쯤 되면 스스륵 잠이 들어버린다.
아마 그때 나오는 그 음악이 내 마음을 많이 편한하게 해주는 모양이다

분석적 성경공부, 통합적 성경공부

돌아오는 주일부터,
교회에서 6주짜리 ‘성경공부’ 반을 하나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복음서를 공부하는 방법을 함께 배워보자는 것인데,
현재 생각으로는 내가 약간 강의를 하고, 함께 본문을 보면서 관찰-해석-적용을 하는 workshop을 하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공부한 본문을 가지고 내가 설교를 한번 하는 방식으로 해볼까 생각중이다.

나는,
분석적/귀납법적 성경연구가 주는 유익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깊이있게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훈련을 잘 받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귀납법적 성경연구가 누구에게나 다 work하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사람은 그걸 아무리 강조하고 훈련을 시켜도 그게 ‘자기 것’으로 자리잡기 전에 포기해버리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이 글을 읽는 방식이 ‘분석적’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실 글을 읽는 방식 뿐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분석적이지 않다.
분석적인 사고를 제대로 하려면,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training을 받아야 하는데,
사실 주변에서 보는 ‘공학박사’들도 놀랍게 그렇게 분석적인 사고를 하는 훈련이 잘 되어있지 않는 것을 많이 보곤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향상 분석적 사고가 그냥 많이 어려운 듯 하다.

대신 그런 사람들은 통합적 사고를 잘 하는 강점이 있는데, 분석적이지 못한 통합적 사고는 자칫 엉뚱한 성경해석과 적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사실 내가 들을 수 있는 한국 설교의 80% 이상은 이런 잘못을 범한다.)

그런 이들에게,
통합적인 사고 자체를 아예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성경해석/적용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사실 지난 몇년간 여러가지 생각과 고민을 해왔었다.

성경 연구 방법을 training할때,
마치 전자공학 입문 과목을 가르치는 것 같이, 그 이론적 structure를 잘 equip해주고 그것을 적용하라도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마치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같이, 함께 넓은 풀장에 가서, 약간의 instruction을 주고, 함께 물 속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방법을 ‘몸으로’ 익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유용할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물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분석적으로 성경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뛰어난 수영 강사가 되려면 몸의 근육등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필요한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모든이가 그런 훈련을 받을 필요는 없고, 어떤 이들은 그냥 물에 떠서 즐기는 것으로 충분할수도 있지는 않을까 싶다.

물론 6주 동안, 주일에 한시간씩 하는 것으로 성경을 보는 눈이 제대로 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분석적 성경읽기 방법이 가져다주는 ‘중압갑’에 눌리지 않으면서도 엉뚱한 성경해석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줄수는 있지 않을까 싶긴 하다.

뭐 적어도 내 바람은 그렇다. ^^

전문성 vs. 자질

새 회사에서 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서 일하고 있는 product가 4~5개 된다.
그중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많이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대외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워낙 많은 product를 만드는일을 아주 적은 사람의 사람들이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만들고 있는 product가 워낙 신기한(?) 것들이어서,
이것을 위해 개발되어있는 재료나 process 같은 것이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내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인데도,
내가 ‘전문가’가 되어서 문제를 급히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한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전혀 새로운 분야의 task들을 해 내는데 꽤 근사하게 일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A 회사에 있었던 1년의 기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직장에서는 모두 이런 식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전문가 코스프레를 해야만하는…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 대충 전문가가 되어버리는.

나는,
어떤 조직 등에서 사람을 뽑을때,
어떤 사람이 가진 specialty를 보고 뽑는 것 보다,
그 사람이 가진 ‘자질’을 보고 뽑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 자질에는,
분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훈련)
새로운 challenge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
creative하게 생각하고 접근하는 자세와 능력,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의지
등등이 포함된다고 본다.

이것은,
회사와 같은 이익조직 뿐 아니라,
non-profit organization에도 적용되고,
심지어는 교회의 리더십이나 기독운동의 일꾼들을 세우는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아, 물론 교회와 같은 경우에는 그 자질중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포함되겠지만)

오랜 동역자의 외로운 싸움

어제는 참 오랜만에 보는 한 동역자가 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다.
나름대로 미국에서 함께 30대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벌써 한국에 간것이 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보스턴에 있었고, 그 형제는 뉴헤이븐에 있었으니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막상 함께 만나는 곳은 늘 코스타였다. ^^

사역을 위해서 만났어도,
만나서는 밤을 새워가며 하나님 나라, 성경, 신앙,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내가 보스턴에서 많이 외롭다고 느끼고 있을때,
그렇게 함께 만나서 섬기며 토론하고 논쟁하고 배울 수 있었던 fellowship은,
내게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었다.

어제 교회에서 했던 것은 아주 전통적인 의미의 설교라기 보다는,
일종의 자신의 신앙 나눔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좋았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에서 너무 혼자서만 싸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하고 있는 일이 참 가치있다고 생각도 되고,
그걸 참 잘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되기도 하는데…

정말 허허벌판에서 혼자서 창 하나 들고 대군과 맞장뜨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누가 좀 함께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런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정말 말도 안되는 악의에 찬 공격들을 받아가며 힘들어할때 그것을 함께 견디도록 힘을 주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찌 그 동역자만 그렇겠나.

사실 젊은 시절에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기도하며 토론하며 섬겼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흩어져서 다들 외롭고 힘들게 버텨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섬기고 있는 것을 본다.

원래 예수 믿는 다는건 다 그렇게 외로워야 하는 걸까.

우리 우교수님의 건투를 빈다.

잘난 사람들?

새로운 회사에 와서 보니, 정말 잘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

회사에서 자주 보는 어떤 허름한 아저씨가 있어서 그냥 친절하게 인사하면서 지냈는데,
오늘 알고보니.. Stanford 공학박사에다가, UCSF에서 의학박사(MD)를 받았다.
그리곤 완전 유명한 회사들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가 여기 와 있다.

어떤 hardware engineer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인다 싶었는데 알고보니,
Stanford 심장외과 교수에다가 Stanford 의대 무슨 director 그런거 하다가 여기 왔단다.
이 사람은 MIT에서 전자공학 석사하고, Stanford 의대 나오고, Harvard 의대에서 전문의 하고, Harvard에서 뭐 석사 하나를 더 했다.

Harvard 의대 꽤 유명한 스타 교수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고, (이 사람 이야기는 신문에도 났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Yale에서 MD 받고 Harvard에서 석사한것 말고 다른 박사는 더 없는 것 같다 ㅋㅋ

또, 어떤 사람은 나이도 어린데 꽤 똘똘하다 했더니 벌써 회사를 두개나 차려서 CEO를 했던 경험이 있고,
(물론 그거 잘 안되었으니 여기 와 있겠지만)

University of Washington의 tenured professor 였는데 그거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고,

Google VP 하다가 여기 와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아주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대학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찌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서 일해왔던 사람도 있고,

중국에서 2류쯤 되는 학교 학부만 졸업하고 여기 와서 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별로 유명하지 않는 대학원을 다니다가 학위를 마치지 못한채 여기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뭐 물론 다들 ‘잘난’ 사람들이겠으나, (그리고 실제로 얘기해보면 참 잘났구나… 그런 생각이 들게되지만)
그렇게 ‘잘난’ 것이 그냥 학벌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 참 보기 좋다.

아이비리그 박사학위가 두개 있는 사람하고 대학 중퇴한 사람이 맞장뜨는 직장이어서 참 좋다. ^^
그런 사람들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정상인’들이 물론 많이 있긴 하다. ㅎㅎ

비종교적 기독교 (10)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말 ‘정상적으로’ 깊게 성경을 반복해서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 원칙을 찾아가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노력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transform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행동강령을 시시콜콜히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의 말씀에는, 온 세상이 누구의 피조물이며, 그 창조자가 어떤 분이시고, 그 창조자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어떤것인가 하는 것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계속 하다보면 당연히 ‘일반은총’의 영역에 해당하는 많은 지혜가 쌓이게 된다.
그런데 이걸 추구하지 않고, 그냥 shallow하게 ‘명령’만을 찾으려하면, 풍성한 지혜를 쌓는데 이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주장하는 ‘비종교적’ 기독교는 바로 이런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전 인격으로 평생 배워나가고,
일반은총의 영역에 펼쳐진 많은 지혜와 지식들을 embrace하되,
기독교를 ‘명령’의 집합으로 이해하지 않고 ‘원칙’의 가이드라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며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데 더 가까이 가게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상 어줍잖은 생각을 여기서 마무리 지어본다.)

비종교적 기독교 (9)

가령 어떤 사람이 게임 중독이라고 하자.
그런데 내가 그 사람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종교적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접근한다.
그 사람이 게임을 그만해야하는 ‘성경적’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쓰여진 몇천년 전에는 컴퓨터 게임이 없었으므로,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서 매달리지 말라는 근거를 찾는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슷한 다른 예들을 막 뒤져서 어떻게든 성경에서 ‘명령’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아마 비종교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것이다.
자, 봐라. 지금 네가 그렇게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지금 너를 심각하게 파괴시키고 있잖니. 그러니까 그거 그만둬.

나는,
어거지로 성경에서 명령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보다는,
좀 자연스럽게, 비종교적인 접근으로 문제에 다가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면서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비종교적 기독교 (8)

종교적 기독교가 갖는 위험은, 좁게 가두어진 ‘원칙’이 절대성을 갖게된다는 것에 있다.

가령,
헨리 조지의 사상이 ‘성경적’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생각은 ‘비성경적’이 되어버리기 쉽다.

혹은,
종은 상전에게 충성을 다해야하는데,
감히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행위는 ‘비성경적’이 되어버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권위의 파워게임으로 이 모든 논의가 전락하게 되고,
먼저 어떤 ‘성경적’ 가치를 선점한 사람이 매우 비정상적인 권위와 힘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어떤 원칙을 그 당시 상황에서 써놓은 이야기들로 읽으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지금 적용해 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가능해진다.

그것을 위해서,
현대 학문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고,
전문가들의 의견에 경청을 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된다.

더 이상 종교지도자들이,
비정상적이면서 비합리적인 비뚤어진 권위를 갖지 않아도 되고,
정말 위대한 창조주의 뜻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가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풀어가는 ‘하나님 나라 동창생’들이 많아지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