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FH forever?

나는 집에서 일하는게 별로 일에 크게 지장이 없다.
실제로 physically 일을 하는 것은 주로 다른 나라나 다른 회사에서 벌어지고, 내가 하는 일은 계획을 세우고, 데이타를 잘 모아서 분석하고, 일이 잘 되는지 확인하는 등의 일이기 때문이다.
software engineer들은 실제로 집에서 일을하는게 거의 차이가 없다고도 한다.

실제로 Google과 Facebook은 사실상 연말까지 다수의 직원들이 집에서 일하는 것을 지속할 모양이고, Twitter는 직원이 원하면 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집에서 일하는 것을 허용하는 모양이다.

집에서 일을 해보면 더 높은 효율로 일하게되는 면이 많다.
출퇴근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고, 모든 사람이 online으로 회의를 하는 것을 당연하기 여기기 때문에 따로 회의실을 잡고 그 회의실까지 왔다갔다 하고 하는 등에 쓰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럴수는 없겠으나, 이번 COVID-19이 끝나고 나서도 많은 경우 그냥 집에서 일하는 것이 꽤 일상화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는 ‘그래도 가서 만나야지’, ‘그래도 얼굴 맞대고 이야기해야지’, ‘그래도 사무실에 가야지’등등의 일종의 ‘관성’때문에 출퇴근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 관성이 그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로서는 나도, 상황이 허락한다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 회사에 가고, 나머지는 그냥 집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아참, 밥먹으러 회사는 가야하나…)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정말 이렇게 될지 모르지만) 세상이 참 많이 바뀔 것 같다.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면 사람들이 직장에서 먼 곳에 사는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서 다른 도시, 심지어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어도 그 회사에서 일을 하는것이 가능하게 된다.

소위 집값이 비싼 동네의 집값이 많이 떨어질테고,
회사들이 미국같이, 실리콘 밸리같이 살기 비싼 곳에서 사람을 뽑을 필요가 없게된다. 그러면 월급을 덜 줘도 되는 지역에서 사람을 더 많이 뽑게 될테고.

물론 모든 직원이 100% 집에서만 일하게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한 쪽에서는 가능하면 그걸 많이 활용할테고,
그건 우리가 사는 일상의 경제상황도 많이 바꾸게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독교의 발흥 (10)

마지막 10장은 매우 짧다.
‘미덕’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냥 쉽게 얘기하자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들/미덕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거다.

여기서 구분해야할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내는 subculture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핵심적 가치 자체가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흔히 기독교가 매력적이어야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세상에게 매력적임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기독교의 subculture를 매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데… (seeker-friendly church같은…)


이 책을 다 읽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고, 어떤 부분은 살짝 좀 어렵게 느끼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다닥 넘기며 읽을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책이었다.

2020년도 이제 5월 중순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어쩌면 이 책이 내게 2020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참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분들에게 강추한다.

에스겔 33장

1.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그때 당시에는 그냥 ‘가벼운’ 깨달음이나 감동으로 남았는데, 그 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씀이 마음 속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 자신을 지배하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2.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적어도 나로 인해 하나님을 조금 더 잘보게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건 내가 20대부터 해왔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도움을 주어, 어떤 사람이 나를 추월해 모든 면에서 나를 넘어서는, 나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숙해가는 것을 보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 내겐 늘 있었다.

3.
몇년전부터 나는, 20대로부터 해왔던 그런 생각들에 심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많이 낙심하고 있었다.
나는 노력해도 안되는 거구나…
이제 내 한계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상황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내가 뭔가 헌신하는 일은… 그냥 내 꿈인거구나…
그리고 나름대로 마음도 많이 닫혔고, 에너지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4.
지난 4월 13일에는 에스겔 33장 상반부가 말씀 묵상 본문이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파수꾼으로써 해야할 경고를 이야기하라는 말씀이었다.
에스겔이 이야기를 했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그것은 그 사람들의 책임이지만,
에스겔이 이야기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에스겔의 책임이라는 말씀.
그때 나는… 그래, 그래도 내가 해야할 일은 결과와 관계없이 해야하는 거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셨다고 여겨지는 것 앞에서는 결과와 관계없이 성실해야하는 거구나…

5.
그때는 나름대로 그래 참 옳은 말씀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이 지나면서 내 마음 속에서 계속 그 말씀이 남아 나를 부지런히 흔들고 있다.
그 말씀의 깨달음이 매일매일 눈덩이가 불어나듯 커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6.
그렇다고 내가 지금 뭘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뭘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뭘 한들 될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 계속 커지고 있어 뭔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는 것을 그냥 저버리는 게으름으로부터는 내가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참 신비롭게 작동한다.

기독교의 발흥 (9)

9장에서는 기독교가 처해있던 상황은, 여러 다른 이교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로마는 당시 일반적으로 종교에대해 관용적이었고 그 속에서 기독교도 처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관용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들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고, 기독교는 그 속에서 도드라지게 그 자리를 확보하게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기독교의 배타성이 오히려 득이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종교들은 그저 그 종교에 adhere하는 정도로 충분했지만 기독교는 기독교 이외에 다른 것을 버리라고 요구받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기독교의 탄탄한 조직이 만들어졌고 그 탄탄한 조직의 결속력이 기독교의 발흥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장 역시 지금 시대에 의미를 주는 바가 많다.

사실 지금은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어떤 한가지의 종교적 가치가 세상 속에서 지배적이지 못한 상황이다. 한가지 다른점은 로마시대는 기독교가 ‘도전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현대는 기독교도 그렇게 무너져가는 기존질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지는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는 원래의 기독교인가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무너지는 기존의 질서로서의 기독교와, 살아있는 생명을 갖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다른것이라면, 지금의 상황은 로마시대와 비슷한 상황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 속에서 true Christianity가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확실히 선을 긋고 그 타락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오히려 도전하는 방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true Christianity.에 유리한 구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말하자면, 확장, 포용 등의 접근을 하기보다는, 더 깊은 헌신, 세상 속에서의 대조(contrast)등을 강조하는 형식의 기독교가 더 드러나게 될 수 있다는 거다.

이것은 내가 늘 생각해왔던대로,
대조성이 강한 강소교회들이 지금 무너져가는 기독교 세팅에서 희망을 걸어볼 주체라는 것이다.

보통 교회에서나… 이런 얘기를 하면 대개는 사람들이 그렇게 공감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그냥 이해도 잘 못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긴, 여기 글에서 이렇게 쓴 것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뭐라는거야… 라고 생각하실수도 있겠다….

기독교의 발흥 (8)

8장은 그렇게 읽기 쉬운 장은 아니었다.
저자가 내게는 생소한 사회학적 개념과 여러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내가 그걸 다 따라가며 이해하는건 좀 벅찼다.

순교와 희생이 합리적 선택이었다는 이 장의 내용을 이해하려고 끙끙거리다가 문득 리차드 도킨스가 이야기한 ‘밈(meme)’의 개념을 가지고 이것을 이해하니까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기독교서적의 내용을 리차드 도킨스의 개념으로 이해하다니… ㅋㅋ)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고난과 순교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그들의 결정은,
그 가치에 충분히 헌신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그것 자체로 그들에게는 보상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지켜지고 드러나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자주 그런 헌신과 순교는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 ‘meme’은 전파되었다는 것.

순교가 기독교의 발흥에 도움이 되었다는 이 관점은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빡빡하게 여러 다른 연구결과들을 인용해가며 (비록 내가 다 이해는 못했더라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한 것은 여전히 내게 신선했다.

한가지 덧붙일것은, 초대교회에서 순교가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
여전히 배교자나 도망자가 다수였을 것이고 순교자는 대단히 소수였을 것.

참, 그리고 이 장에서는 예수님이 당대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순교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한다.

WFH

교회에서 한 사람이 보내준 짧은 글에서 inspire된 생각.

집에서 일을 한지 두달 가까이 되어가는데,
정말 이렇게 일을 해보니, 정말 일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확연히 더 갈린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여전히 진짜 잘한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더 바빠지기고 하고, 적극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만들어서 하기도 하고, 그래서 집에서 일을 하는게 전혀 성과에 지장이 없다.

반면,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 버벅거린다.
뭘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고, 그나마 일을 시켜도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많이 본다.
눈치 없이 뻘짓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도 점점 잃어버리는 것 같다.

물론, physically 실험실에 가야하는 일은 그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가에 관계없이 하는 일에 지장이 생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든, 어떤 형태로의 한계상황은, 그 이전에 드러나고 있지 않던 것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빨리빨리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KBO의 수준을 그렇게 높게 보지 않는다.
한국이 WBC에서도 여러번 우승했고, 늘 상위권에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KBO에 대한 평가는 짠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의 ESPN이 한국의 프로야구를 중계한다고 한다!
나는 한국 프로야구를 잘 알지못하고, ESPN을 시청하지 않기 때문에 뉴스에 이런 소식이 나와서 ESPN 웹사이트에 들어가보았다.

허어…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소개, 각 팀별 특징, 주의깊게 볼 선수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고,
중계 스케줄까지!

….

내 경험에 따르면, 나 같은 사람은 한국회사와 일하는 많은 장점이 있다.
한국회사는 대개 데이터를 믿을 수 있고, 그 속도가 무시하게 빠르다.
중국에서 자주 그렇게 빨리 하는 일이 있기만, 데이터를 믿을 수 있는지 여러번 확인을 해야한다.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속도가 두배이상 느리다. 데이터는 믿을 수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한국 회사에 있는 분들고 이야기하면 대개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가 잘하는게 겨우 빨리빨리냐고.

그런데, 나는 빨리빨리가 정말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나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을 하다보면,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것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데, 그 일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우열이 가려지는 일이 많다.

나는 한국이 이번에 COVID-19을 빨리빨리 잘 관리한 것이 그냥 부지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이 집단적으로 가지고있는 큰 competitive advantage라고 생각한다.

이걸 이렇게 빨리빨리 해내니, 미국에서 관심도 없던 KBO에 관심을 갖게되는 거다.

빠릿빠릿, 빨리빨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다른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빨리빨리한다는 것은 실력과 관심과 에너지가 모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결핍과 깨어짐

흔히 결핍을 깨어짐/타락의 결과로 보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관점인것 같다.
흔히 ‘천국’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의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 모두가 풍족하고 늘 환한 날씨에 맛있는 음식이 넘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핍은 인간의 불완전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타락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즉,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한,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결핍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질수밖에 없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the age to come’이 오더라도, 결핍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결핍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이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관점은, 결핍을 없애는 것을 사회의 목표로 삼는 세상의 어떤 접근과 기독교적 관점이 어쩌면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한다.

기독교의 발흥 (6,7)

6장과 7장은 그 당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6장은 읽으면 꽤 재미있는 데이터들이 제시되는데,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기독교는 주로 소아시아 지방의 도시들에서 빠르게 전파되었고, 그 전파되는 주된 경로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다. – 어찌보면 대단히 새로울 것이 없는 결론처럼 보이기도한다.

7장에서 그려진 그 당시 도시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그 당시 도시들은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다. 샌프란시스코의 다섯배 정도의 인구밀도였다.
심지어는 초고층빌딩이 가득한 지금의 맨하탄보다도 높았다.
하수 시설도 제대로 안되었고, 매우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악취가 진동했다.
건물들은 허술하게 지어져 무너지기 일수였고, 화재가 한번 나면 도시 전체가 다 타기전까지 진압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지진이라도 나면 도시 전체는 모두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목적으로 도시들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이런 ‘도시에서의 운동’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가장 치열한 삶의 자리로 기독교가 간 것이었다.

기독교의 발흥 (5)

5장에서는 기독교가 여성을 ‘인간’으로 제대로 대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존중되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이야기한다.

일단, 그 당시 로마는 여성을 사실상 남성의 소유물로 보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은 태어나면 길에 버리는등의 영아살해가 많았다. 그래서 실제로 남여 성비가 매우 불균형적이었다. – 남성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수로보면 여성이 더 많았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기독교 내에서도 여성들은 리더십의 위치까지 맡을 정도로 존중받았다.

잉여 기독교 여성과 잉여 이교도 남성 사이의 결혼이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초기 교회에 안정적인 2차 개종자 유입으로 이어졌다.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남성을 전도해서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로마는 심각한 저출산의 상황이었는데, 그것은 남성 우선의 사회문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당시 로마보다 훨씬 더 여성을 존중했기 때문에 저출산의 문제가 없었고, 기독교인들의 출산률은 더 높았다.

….

이 장에서는, 소위 ‘젠더 이슈’라는 사회현상을 기독교가 어떻게 다루었고, 그것이 사회에 대해 어떤 대안적 공동체로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젠더 이슈, 저출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이 당시 기독교는 그렇게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힘이 다 어디에 가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