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7)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존엄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치제계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억압과 폭력등에도 저항할 수 있는 내재적인 힘이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기독교가 그렇게 저항해야하는 대상, 불화해야하는 대상과 불화했을때 기독교는 기독교만의 힘을 가져왔다.

가령,
어떤 사회에서 어떤 특정 지역출신이 부당하게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부당하게 차별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몇세대가 지나면서 그 부당하게 차별받던 사람들이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고 내부적으로 더 단결해서 권력(정치권력, 경제권력, 혹은 문화권력 등)을 쟁취해냈다고 하자.
그러면 기독교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그 권력이 다른 약자를 억압하는 것에대해 다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떤 특정 그룹과 연계되는 종교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권력과 불화하는 종교라는 말이다.
그 권력이 설사 바로 얼마전까지 기독교가 보호하고자 했던 약자그룹이었더라도 말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그룹도 절대 선이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절대 선이 되신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6)

나 같은 비전문가가 내가 어떤 신학자를 좋아한다는둥… 그런 얘기를 하는게 좀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Stanley Hauerwas를 좋아한다.

이분은 때로 전달하고자하는 어떤 내용을 아주 강렬하면서도 명확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하시곤 하는데,
매우 자주 이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를 아주 신랄한 톤으로 비판하시곤 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비판한다고?
이게 다소 충격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이분은 자기 주변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추종하는 친구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주,
“나는 신정주의자(theocrat)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 한다.

신정주의(theocracy)라면 신의 뜻에 따라 통치한다는 명목하에 말도안되는 일들을 자행하는 매우 미개한 체제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지만,
Stanley Hauerwas는 자신이 신정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긴장한다고… ㅎㅎ

그렇게 의도적으로 충격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어떤 심오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Stanley Hauerwas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나도 그분이 이야기한방식 대로라면 역시 신정주의자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5)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기독교가 세상의 어떤 가치들을 선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매우 자주,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우리에게 두지 않는 우상의 거부의 행동일 수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독교는 그 시대의 권력을 잡고있는 어떤 가치나 사조, 체제나 경향들과 싸우게 되기 쉽다.
그것들이 그 시대의 우상이 되어 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우상을 거부하는 기독교,
기독교 다운 기독교의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는….

어항 속의 물고기가 그 어항의 물을 거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나타낼수도 있다.

때로 무엇과 싸워야하는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것도 매우 어렵고,
설사 그 싸워야 하는 대상을 분별해 내었다 하더라도 그 대상과 어떻게 맞서는게 가능해? 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어쩌면 십계명의 제 1계명조차도 무시하는 엉터리 기독교가 되어버려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장애요인은…
게으름이다.

지금 이 정도면 됐지… 내가 배워왔던 기독교면 충분하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죽어있는 종교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많이 보는 기독교의 모습인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4)

기독교가 계속해서 거부할만한 것들은 분명히 있다.
폭력, 미움, 죄, 음란함, 탐욕 등등은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기독교가 거부하는 것들이아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런것들까지도,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령,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18세기 조선에서 지금과 같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큰 물의를 일으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 기준등을 적용해 보았을때 피해야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다.

이게…
수영복과 같이 비교적 쉬운예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령,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해야 하는가?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폭력이 사람들을 억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 공산주의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치적 선택 중에서 우파를 지지하는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삼아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감수해도 괜찮다는 폭력에 대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싸워야하는 우상이, 공산주의의 어그러진 이상주의와 그로인해 비롯된 폭력이라면, 제한적으로 정치적 우파를 지지할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21세기에는 어떤까?
지금도 공산주의가 현대세계가 싸우고 있는 주된 우상인가?

그런 완전 시대착오적 생각이다.
지금 현대 세계가 싸워야하는 우상은 오히려 이념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체제 안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탐욕, 쾌락추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성 등등이 싸워야하는 더 큰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정치적 우파가 기독교 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도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어떠한 우상도 타파하는 기독교가 그 기독교적 생명력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어떤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폭력이었다가 시대가 지나면서 그것이 자본주의의 폭력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3)

반면 기독교가 권력을 탐하거나,
그 권력의 일부가 되어버리거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권력 자체가 되어버릴때 기독교는 침체되었고,
오히려 세상에서 암적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주 단순히 이야기해서,
우상숭배를 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고, 권력과 친구가 되어버리는 것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을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세상의 강력한 권력이 점점 사람들에게 우상이 되어가고 있을때,
그것을 싸워야할 대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무지(ignorance)역시 기독교를 병들게하기도 하였다.

가령,
기독교가 공산주의의 폭력과 싸운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 반공 자체가 기독교와 일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채, 극렬한 반공주의를 이야기하는 극우의 사상과 결합한 것은,
내 생각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이런류의 무지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2)

언제 기독교가 정말 기독교 다웠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어쨌든 어떤 사회 속에서 그 사회가 숭배하는 ‘우상’ 혹은 ‘권력’과 맞설때 였다.

하나님 아닌 인간이 만든 것들을 숭배하는 종교적 사회적 권력에 맞서기도 했고,
기독교의 껍질을 쓴 종교권력에 맞서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실제 정치 권력에 억업받는 사람들과 함께 정치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일들을 하기도 했었다.

언제나, 모든 기독교가, 이 모든 권력들에 대해 항상 저항하고 불화했던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종파나 신학적 입장에 따라,
혹은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기독교가 어떤 권력과 그렇게 맞설때 기독교는 기독교 다웠다.

가령,
한국 사회에서도,
보수 기독교는 종교적 우상숭배라는 문화적/사회적 권력과 맞서 싸웠고,
진보 기독교는 정치적 경제적 폭력이라는 철퇴를 휘두르는 권력과 맞서 싸웠다.

그런 싸움들이 모두 다 건강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그 싸움들이 모두 정당했던 것도 아니다.
또, 그 싸움들이 모두 하나님이외에 나머지 것들을 상대화하는 기독교 근본으로부터 출발한것도 아니었다.

유대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로마 제국과 맞선 기독교,
중세 종교권력과 맞선 기독교,
인본주의 철학사조와 맞선 기독교,
굳어있고 죽어있는 신학 사조와 맞선 기독교,
히틀러와 맞선 기독교,
인종차별에 맞선 기독교,
가난과 싸운 기독교,
병과 싸운 기독교,
개인적 죄의 문제와 맞선 기독교,
3.1운동의 기독교,
공산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기독교,
독재정권에 맞선 기독교,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기독교

기독교는 참 매력적이다.

권력과 불화하는 기독교 (1)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는 상당히 고약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을 절대화 하고 전 우주의 나머지 모두를 다 상대화 해버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추종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으면, 당장 기독교는 그것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아니,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가 그것들을 견제, 정복,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버려야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기독교는 그렇게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우상이란 좋은 것을 절대화할때 나타난다.
가령, 가족은 좋은 것이지만 가족을 절대화하면 가족이 우상이 되어버린다.
사회정의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절대화하면 그것 역시 우상이 되어버린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아주 매료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제외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니,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 본질상,
권력에 저항하는 성질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든, 종교적 권력이든, 경제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말이다.

Goodbye Jim

우리 회사에 Jim(가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last name은 Wagner(역시 가명)이라는 독일식 이름이다.

그런데,
완전 한국사람처럼 생겼다!

2년전인가,
함께 project를 할 일이 있어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더 나눌 수 있었는데,
자신이 한국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엥? 그런데 너 성이 Wagner잖아?

자신이 미국의 부모에게 입양이되어서 그렇다고.

나는 Jim하고 그래도 꽤 가깝게 일하면서 지냈다.
이 친구 정말 똑똑하고 일 잘하고, 참 함께 일하는게 즐거웠다.

지난달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찾았다고. 자기의 한국 이름은 조성철(가명)이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렇게 완전 아시아사람으로 생겨서 Wagner라는 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갈등이 그래도 있었다고.
자신의 생부모를 찾으면서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우리 회사 오기전에 한국의 대기업에서도 일을 했었는데,
참 일하기 쉽지 않았단다.
한국어도 잘 못하기도 할 뿐더러, 완전 한국 사람으로 생겼는데 생각이나 문화가 그렇지 않으니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했고, 그것이 많이 힘들었다고.

여전히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런 고민이 계속 많은 것 같았다.

이 친구가 결국 우리 회사를 그만두고,
싱가폴의 작은 회사로 옮긴하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래도 아시아에서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고.
한국에서 사는건 아무래도 너무 난이도가 높고,
싱가폴은 그래도 영어를 쓰니까 자기가 가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마지막 인사를 아주 어눌한 한국말로 했다.
성철씨, 함께 일해서 참 좋았어요. 감사해요.

그랬더니 Jim은,
오승님은 눈치가 많고 항상 열심히 일하이는데 같이 일 하는 시간을 잘 됐어요.
라고 했다.

완전 이해했다!

그래도 내가 Jim에게…
자신을 힘들게 했던 한국 사람들과는 다른 한국사람이 되었길 바란다.
그리고 Jim이 싱가폴에서는 조금 더 자신의 identity를 잘 찾을 수 있기를 바라고.

성철씨, 수고 많았고, 함께 일해서 좋았어요.

원칙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내가 그분의 생각과 자세를 배우겠다고 생각했던 모든 분들은,
소위 그냥 ‘믿음이 좋은’ 분들이 아니었다.

결국 자신이 똑바로 서서, 그 믿음을 그 삶의 모습에서 펼쳐보려고 했던 분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그 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자신의 상황에 펼치며 적용할때, 자신이 지켜야하는 어떤 기준들을 세심하게 세우고, 그것을 끝까지 잘 지키며 살았던 분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분들이 가지고 있던 그 삶의 원칙들은,
universal한 것이라기 보다는 대단히 상황적인 것들도 많이 있었다.

가령,
고위 공직자가 되어서도 부서가 다 함께 회식을 하러 갈때 공금을 규모있게 사용하기위해서 제일 먼저 싼 음식을 시켰다는 어떤 분의 이야기는….
그 당시 내게도 참 감동이었고, 참 배우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그렇게 하면 꼰대, 갑질 그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모습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분이 살았던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정말 필요했고,
그분은 신앙을 그 분의 삶 속에서 그런식으로 적용하며 살았던 것이다.

결국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데에는,
universal한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universal한 원칙을 그 당시 상황에 맞게, 심지어는 그것이 universal한 것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적용하며 살아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