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8)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금 미국과 특히 영국에서 20대, 특히 그중에서도 남성의 기독교인 비율이 획기적으로 늘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치가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들을 찾아보면
영국 런던의 Saint Church 같은 곳은 ‘부흥(revival)’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뉴욕의 Church of the City New York도 비슷한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뉴욕의 교회다.

나는 Saint Church의 예배를 youtube로 꽤 자주 들어가는 편이다.
이 교회 예배는 그냥 미국의 일반적인 nondemoninational evangalical church의 예배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하는 내용은 그야말로 John Stott 식의 복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죄와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개인이 어떻게 용서 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은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담기지도 않는 것 같다.

Church of the City New York의 Jon Tyson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약간 마초다.
실제로 이분은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여기는 Penecotal 인데, 역시 하는 내용은 ‘전통적 복음’ (인간의 죄 – 하나님의 은혜 – 은혜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에 젊은 사람들이 모인다.

역시 또 Gen Z가 열광하는 John Mark Comer를 보더라도 이분도 하나님 나라 담론 별로 없다. Personal transformation이 핵심 이야기다.

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거대담론이 아니라 개인 신앙에 더 끌릴까?

나는 이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연속적인 이미임한 하나님나라의 거대 담론 보다는
도대체 what about me?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어 보이는 것 같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7)

나는 이런 적용을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에서 한국의 80년대부터 2010년대정도 까지,
미국도 2010년대정도까지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의미있는 담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함께 더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구했다. 그리고 그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런 사회 속에서 그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건강하면서도 꼭 필요한 기여를 하나님 나라 담론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 사회속에서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서 발전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발전이 대중의 기대와 바람과 동떨어져서 소수 엘리트에 의미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대중은 발전의 주체와 원동력이 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어 보인다.
가령 최근의 AI의 발전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 속에서 일반 대중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 거대담론을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의 생존에 집중하게 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20대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거대 담론은 정말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그것이 진리인가 하는 질문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날 수 있는가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렇게 반응하는 세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응하도록 몰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 그 세대를 바라보면 그 세대가 훨씬 잘 이해가 된다.
나 같은 세대보다 훨씬 더 힘들게 그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6)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강조하는 개념은 연속성이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연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하고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열매들이 앞으로 오게될 하나님 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문화, 정치, 경제 뿐 아니라 개인적 성품 같은 것까지도 연속적이라는 강조가 담겨 있다.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강조하는 개념은 불연속성이다.
앞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과 다르다는 강조가 크다.
퀀텀 점프를 해서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모든 왜곡이 사라지고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게 된다는 것.

이미 어느정도 인권, 경제, 문화등이 이루어지고 있고 발전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연속성이 더 중요할거다.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왜곡을 다루어 낼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할때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는 참 의미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지는 일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을 꿈꾸며 그렇게 연속적으로 더 개선해내가는 추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연속적 개선의 희망이 없다.
그저 세상이 뒤집어져서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 차라리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했던 것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뭔가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새로운 세상.

이건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개선과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속적인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더 의미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연속적인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5)

다시 내가 이 시리즈의 첫글에서 썼던 선교사 형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형은 내가 이야기했던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지나치게 선진국 친화적 담론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그 형의 그 관점에서 다시 내가 썼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들 역시 지나치게 배부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 형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나는 그 형의 말이 맞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반발했지만 이제는 그 형의 이야기를 훨씬 더 수긍하고 공감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어느정도 살만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령, 전쟁통에 극도의 가난에 극심한 혼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저 이 끔찍한 현실이 어떻게든 기적적으로 끝나거나 이 현실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어떤 곳 (내세,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으로 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극심한 고통이나 혼란 속에서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이 땅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담론은 폐기되거나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대중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그저 너무 현실과 동떨오진 자신과 상관 없는 이야기이고 오히려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의미있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왜 그렇게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우리 선배들에게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4)

80-9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그 근본토대가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내가 흥분하면서 받아들였던 하나님 나라는 과연 흠이 없는 생각일까. 나는 어떤의미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다다르게 되었던 생각의 긴장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이원론과 세속화에 대한 문제였다.

과연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무엇이 더 문제냐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원론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고,
반면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이제는 이원론 보다는 세속화가 더 큰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고민과 논의속에서 이원론 보다는 세속화가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세속화라기 보다는 자기중심성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이원론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였던 하나님 나라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는 말인가. 그때 내가 가졌던 일종의 혼란이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3)

하나님 나라와 함께 접했던 것이 적어도 내겐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그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전통에 맞추어서 풀어낸 한가지의 담론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게 하자는 일종의 운동이었고, 그것은 내게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때 열정적으로 접했던 것은 프란시스 쉐퍼였고, 나는 쉐퍼에 열광했다.
그 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아서 책읽기 모임을 하기도 했고,
그 내용으로 친구들과 토론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야기했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풀어내는 한가지의 방법이었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THE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탐닉했었다.

흥미롭게도/아니면 자연스럽게도,
그때 그렇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후 정치적 신학적 극우가 되어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내가 접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 혹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신학적 논리적 구조가 가지는 본질적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그 논리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결국 다다르게 되는 것은 신학적 근본주의 / 정치적 극우가 되어버린 다는 것이다.

90년대 한국에서는 그런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는 담론들이 많이 형성되었고, 나는 그런 기독교 셰계관 운동에 대한 비판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지적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심정적으로 많이 지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