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미문의 거지

사도행전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에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를 손을 붇들어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가 지난번에 성경공부시간에 보았던 것 처럼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이야기를 하니 성전 미문의 거지가 일어나 걷게 된 장면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성전을 늘 들고 나오다 보면,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장소에 앉아 있는 이 거지를 사람들은 보면서 이 사람을 향해서, ‘아 불쌍하다’ ‘참 안됐다’ 하는 반응으로부터 자기 자녀에게 허리를 구부려 귓숙말로, ‘너도 죄 지으면 저렇게 돼’ 라고 타이르는 반응, 혹은 그냥 피하는 반응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이 사람은 이미 꽤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장애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이 거지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어떤 피해야할 예로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걷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냥 걸었던 것이 아니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신기한 일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지는 알수 없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파라다임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사람이 죄의 문제가 해결 되어야 이런 일이 일어 나는 것일테고,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건데… 아니… 무슨 선지자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claim하는 사람들도 아닌 두사람의 어부가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 났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주목했겠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집중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아니 질색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그랬을까. 아니 그냥 일단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고 그런데 이런 내가 사실은 예수의 제자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 했더라면 어떤 의미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거 참 많이 우리가 생각하는 거지요. 나중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서 노벨상을 받는 자리에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얼마나 멋있겠느냐.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많이 듣고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아주 질겁을 합니다. 아이고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예수가 꽉 차 있었’던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과 말과 행동의 모든 목표가 예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삶을 따라서 사는 데에 집중 되어 있는데, 갑자기 자신이 높아지게 되니 도무지 어떻게 이것을 참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절절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내가 주목받다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에 심각한 장애가 있겠다는 생각에 아주 질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의 이름이 높여지고 우리가 주목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해 합니까? 퀄리 파잉 시험은 내가 잘 보려나, 결혼은 잘 할 수 있으려나, 다음주 시험은, 직장은, 논문 쓰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내게 attention을 주려 하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아주 desperately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해 아둥 바둥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삶 속에서 그것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롭겠습니까?
그 대신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 삶의 영역에서 나를 ‘높이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맞게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은 그저 그분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도록만 하면 됩니다. 괜히 내가 그 앞에서 치장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천박하게 가릴 뿐입니다.

저희 딸 민우는요, 때로 정말 멋진 그림을 그리고 나선 엄마 아빠에게 쪼르륵 그 그림을 들고 옵니다. 엄마 아빠가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면서 한번 안아주길 바라면서요. 글쎄요 그 칭찬이라는게… 잘했다고 말하면서 한번 꼭 안아주는 거지만 민우는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민우는 엄마 아빠를 몹시 사랑하거든요. 엄마 아빠의 주목을 받는 것이 그 무엇에도 우선하거든요.

언젠가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충만히 회복되는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꼭 안아주시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다른 누구의 인정보다 내 인정을 더 갈망하는 네 마음 내가 안다 하시는 거 모습을 정말 저는 매일 꿈꿉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을 베드로와 요한 되게 했고, 그들이 전한 예수님을 참으로 예수되게 했고,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참으로 우리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싸구려 거지 가치관에 의해 휩쓸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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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년전에….
어디에선가 짧게 나누었던 이야기인데…
학회에 와서 사람들의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학회에 와서 발표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 내용이 다시 생각났다…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몹시 괴로워하고,
그것이 주어지면 정신없이 그 가치에 몰두하곤 한다.

그런데,
바로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갖게되는 큰 약점이 있다.
그것은, 그 명분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미워한다는 것이다.

내가 매일 힘들게 싸우고 있는 싸움이고,
그 싸움을 싸워온지 20년이 가까워 오도록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싸움이다.

Used Car Salesman

내가 박사과정을 할 때,
내 지도교수는 늘 학회 발표는 used car salesman 처럼 하라고 이야기했었다.

스스로 motivate 되어서,
자신이 이야기하는 내용에 자신을 가지고,
장점을 부각시키고,
전달할 내용을 핵심을 잡아서 각인시키고…

나는 used car salesman과 같은 성향이 워낙 있는 지라,
지도교수의 그러한 ‘가르침’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어제 학회에서의 발표도…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잘한걸까.
글쎄…

최고를 추구하지 말아라?

요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최고를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좀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내 능력이 100만큼 있는데, 만일 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서 살아가야하는,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를 추구하여 그것을 얻으면 내 직업의 영역에서 나는 내 능력의 거의 대부분을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다른 이들의 성취를 갈취하고싶은 그릇된 옥망도 생기고, 내가 섬기고 사랑해야하는 사람들에 신경을 쓰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내 능력의 70만이 필요한 선택을 하면,
남는 30의 능력으로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섬길수도 있고,
필요하면 내 성취를 다른이들과 공유하여 다른이들에게 유익을 끼칠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지적인 능력, 정서적인 능력, 신체적인 능력, 체력 등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은,
자신의 능력에 조금 부친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처할 경우 능력 자체가 성장하게 되는 발전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목표를 낮게 잡는 것 역시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핑게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고 있는데… 글쎄… 얼마나 잘 정리가 된 생각인지는….

약자가 되는 것

약자가 되는 것은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기도 한다.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감내해야하기도 하고, 불안감과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약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미 너무 강자여서…
그저 강자로 사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어쩌다 내가 약자로서 노출되게 되거나…
내가 약자가 되어야 하는 것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는 듯 하다.

회사에서 사람들과의 사소한 대화 속에서 쉽게 자존심 상해 한다던가,
작은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불평한다던가…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저희의 것이다.

예수께서하신 이 선언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복이 있는 세상이 왔다는…
이제는 이전의 세계관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는…
엄청난 것임에도,

오히려 내가 강하기에 그 선언의 깊이를 인식하고 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Thanksgiving을 보내면서,
내게 감사가 사라진 메마름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불성실한 사람을 말씀 사역자로?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매우 게으르거나 성실하지 못하거나 부정직한 사람인데,
교회나 성경공부 모임 등에서는 많이 나서는 사람들을 가끔 접한다.

나도 물론 얼마나 내가 직장과 가정에서 성실한 사람인가 하는 반성을 스스로 지금도 많이 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때, 나는 정말 성경공부가 좋았다.
그래서 학교 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성경공부에 몰입한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빠지고 나니, 학교 생활을 다시 성실하게 하는 리듬을 되찾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그 이후 계속 허덕허덕 하다가…
그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야 비로소 겨우 회복을 할 수 있었다.

학교 생활이나 직장생활, 혹은 가정 생활에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씀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그 사람을 망치는 독인 것 같다.
한번 그렇게 빠지면 회복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내 모습을 자주 점검해 보곤 하는데,
늘 그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균형이 깨어진 사람들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나를 부끄럽게 한 우리 그룹 manager

지난 금요일 이었다.
아침에 우리 그룹 manager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제가 있는 장비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내가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것 저것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했고,
우리 그룹의 manager는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내게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나는 그냥 퍼져서…
내 자리에 앉아서 data 좀 정리하고…
12월 첫째주에 있을 학회 invited talk 준비하고… 그러고 있었다.
(솔직히 가끔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서 실험하고 하는 게 귀찮을 때가 있다. ^^)

그날… 저녁 7시쯤이 되었을때,
그 manager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자리로 왔다.
내가 이야기한대로 장비를 손봤더니 문제있던 장비가 안정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게 고맙다고…

어휴…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더 많고, 경험도 많고… 내가 하라고 지시하더라도 내가 뭐라도 할말이 없는 그런 입장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금요일 저녁 7시가 되도록 저렇게 땀을 흘려가며…
내가 한마디 틱~ 던진 말을 가지고 그렇게 장비와 씨름을 했던 것이다.

정말… 정말…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우리그룹 manager가 존경스러웠다.

경제침체와 관련된 짧은 생각

내가 개똥철학을 펴는 것일수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사회의 체제, 사상의 흐름의 폭력성이 극에 달했을때,
바로 그때 교회가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자주 그 빈자리를 다른 사상들이 채우려는 시도를 했고, 그 결과 기독교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 같다.

자유방임주의의 폭력성에 노동자들이 짓눌리던 시절,
서구 교회가 그것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주는데 실패한 자리를 공산주의가 차지했고…

좀 더 가까이에는…
한국의 소위 IMF 사태가 터졌던 90년대 후반,
한국 교회가 그 경제적 위기 속에서 외쳐야 했던 선포를 포기하자…
그 자리를 세속화와 물질주의가 차지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만일,
지금 이 경제침체/경제위기의 시기에…
교회가 특히 한국 교회가…
또다시… 기도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풀어주실 것이다,
기도해서 위기를 성공으로 극복해라…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라… 는 식의 천박한 이야기만을 한다면,
한국교회는 좀 더 주변으로 밀려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많이 암울하다.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누가복음 2:29-3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늘 가슴 속 한곳에 채워지지않는 갈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인 것 같다.
처음 신앙의 세계를 접했을때, 그동안 채우지 못했던 갈증을 채우는 생수와 같은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아직 채워지지 않는 그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이 있음이…
소망을 갖게 한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 무엇을,
다시 되새기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