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에 관하여

지난 금요일에는 헌신에 관하여 KCF 학생들과 말씀을 나누었다.
대략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0. 인간은 누구나 헌신의 대상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헌신의 대상을 제대로 찾을때야 존재가치를 찾게된다.

1. 헌신의 대상은 자신보다 큰 것이어야 한다.
자신보다 작은 것은 헌신의 가치가 없다.
보통 성공, 행복등에 헌신을 하는데, 성공이나 행복은 나 자신보다 큰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헌신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보통 그것이 나 자신보다 큰 것이냐를 판별할 수 있는 판별식은, 내가 그 가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이 논리적이냐 하는 것이다.
가령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죽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행복은 자신을 채워주는 요소이지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2. 헌신의 대상은 행동이 아닌 가치(value)여야한다.
심지어는 그 행동이 매우 고귀한 것이라하더라도.
가령 어린아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지만, 무슨 무슨 교재를 사용해서 어린아이들을 양육한다는 방법론에 헌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3. 복음을 사유화(privatize)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에 헌신한다고 했을때 흔히 사유화한 비뚤어진 복음에 헌신하는 경우가 많다. 거대담론(Meta Narrative, Grand Narrative)의 틀 안에서 개인화(personalized)된 복음을 가지고 상황을 보아야 한다. 사유화는 개인화와는 매우 다른 개념이다.
흔히 거대담론을 이해하지 못한채 헌신하려 하기 때문에 잘못된 헌신의 모습을 보이는 일들을 본다.

우리가 헌신할 궁극적 거대담론은, 결국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졸지 않고 들어준 우리 형제 자매들이 대견하다. ^^

열정에 이끌려?

가끔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보며,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지체들을 보며…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정말 정신없이 마음과 머리 속에 쏟아질때가 있다.
이럴땐, 10편짜리 설교 시리즈의 개요가 10여분 정도의 묵상동안 그야말로 쏟아지듯 정리가 된다. 성경 말씀, 예화, 내 경험, 성경해석 등이 너무 정신없이 떠올라 주체할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런 내용이 마음을 흥분시켜 잠을 못이루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이끌려 질때, 많은 경우에는 내가 그 ‘설교’들을 쏟아 놓는 일을 자제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소위 내 ‘열정’에 이끌려 만들어진 것들은 반드시 예기치 못한 큰 부작용을 만들기 때문이다.

내 message를 듣는 사람들에게 해가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엔,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경험한다.

열정적인 사역자,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도 좋지만,
성숙한 사역자, 성숙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고 싶다.

예수쟁이들이 늘 하는 이야기

지난 12월부터 몇주에 걸쳐서 Stanford의 KCF 모임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수쟁이들이 늘 하는 이야기” 라는 시리즈의 message를 나누어왔다.

구원, 사랑, 성육신, 하나님 나라, 은혜 등등의 주제를,
그리스도 중심적 시각에서,
그리고 또한 삶에 구체적인 적용이 가능한 접근으로…
다루어 보았다.

잘 들어준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도 고맙지만…
이번 기회에 나도 나름대로 참 기본의 내용을 여러번 곱씹어보는 유익이 있었다.

역시,
복음의 기초만큼 내면의 깊은 곳을 touch하는 다른 무엇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역시 남는 아쉬움은…
정말 전해졌으면 하는 그것을 전할 방법이 내게 없다는 안타까움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복음의 수준만 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표현해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좋은데….
그걸 말로 담아내고나니 이렇게도 초라해지는 것이다.

내가 금년에 들은 최고의 설교

지난 주말에는 보스턴에 가서, Grace Chapel의 예배에 참석했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한편 마음을 면도날로 찢어내는 것과 같은 아픔을,
한편 막힌 것을 뻥하게 뚫어내는 것과 같은 시원함을,
한편 답답하게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명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울었다. 마침 손수건을 가지고 가지 않아 마음껏 울수 없었지만… 정말 울었다.
생각 같아선 그 자리에 앉아 좀 더 울고 싶었다.

http://gc.reelworship.com/gc/audio/GC_111608.mp3

Grace Chapel은, 보스턴 근교의, 백인 중심의 town에 있는 교회이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들이 주로 다니고 있고,
‘목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New England에서 든든하게 건강한 복음주의의 명맥을 지켜내고 있는 교회이다.

그런 context 속에서… 이 설교를 들어보라.

그런 대중들 앞에서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서도,
나는 이 교회와 목사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미국내의 한국인들,
한국의 ‘주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인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내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다음 몇 문장들은 설교에서 따 온 것들이다.

Is the American church willing to just listen to Latin American brothers and sisters?
미국 교회들은, 남미의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를 그저 듣기만 할 의사는 없는 건가?

Stop acting as if the salvation is in the hands of Americans.
마치 구원이 미국인들의 손에 있는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을 그쳐라.

One of the biggest hindrances is the negative perception of the American Church
(세계선교에 있어서) 최대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미국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미지)이다.

Fellow believers around the world see the American Church as shallow, weak, and compromised.
전 세계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은, 미국 교회가 천박하고, 약하고, 타협한다고 본다.

The American Church is more American than Biblical.
미국 교회는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미국적이다.

We have confused the Kingdom of God with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owed individualism, materialism and pragmatism to poison the church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합중국과 혼돈해왔다. 그리고 개인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를 허용하여 교회가 독에 물들게 했다.

Do we have the courage to speak out to stand out in the face of an ever-more-corrupting culture?
우리에게는 용기가 있나? – 계속해서 더욱더 부패해가는 문화에 맞서서 소리치고 일어설 그런 용기가 있나

Do we have the discipline to cultivate a vibrant authentic spirituality?
우리는 살아있는 진정한 영성을 형성해 갈만한 훈련이 되어있나?

If we can’t capture the attention and  the imaginations of our neighbors across the street with our distinctive attractive life style, how will we ever win the respect our neighbors around the world?
만일 우리가 우리의 다르면서도 매력적인 삶의 방식으로 우리 이웃의 관심과 상상력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 세계 이웃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We are Christ-followers first, and then Americans second, and our brothers and sisters around the world want to know that.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 미국인들이다. 전 세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그것을 알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