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09 주제

KOSTA/USA-2009의 주제는…

“예수 안에서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Shalom in Jesus, Courage against the World”

요한복음 16:33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표준 새번역)

기대가 크다.

다음은, KOSTA/USA의 공동대표들과 KOSTA 국제 이사들께 보낸 공문에 사용한,
KOSTA/USA-2009의 간략한 배경및 취지 설명이다.

현재 한인 디아스포라 학생들은 (그리고 조국의 청년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심한 세속화의 경향에 휩쓸려 가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은, 더 이상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 미래를 위하여 어떤 가치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추구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
매달려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깊이있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안락한 삶만을 추구하거나 안락한 삶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겠으나 시대가 지극히 경쟁적이 되고, 물질주의화
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에 편승하지 않을 경우 그 시대로부터 낙오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경향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외칠 구호도, 흔들 깃발도 함께 부를 노래도 잃어버린 채 그 시대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상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삶의 모습 자체를 포기하거나 타협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두려움에 기인한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잃어버린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그 어느때보다 더
필요한 이 시대의 상황에서 복음에 사로잡힌 한인 디아스포라 청년 학생들이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일들을 해야한다. 피조 세계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선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힘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shalom)로부터만 주어질수 있다. 그리고 그 참된 평화를 가질때에 우리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
이제는 용기를 내어 그리스도의 평화로 세상에 당당히 맞설때이다.

묵상기도에 빠지다

2-3년 전 부터, 묵상기도를 해오고 있다.

이전에 부르짖어 기도하던 것보다는…
조용히 앉아서 소리를 내지 않고,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이다.

때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 마음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 등등을 그저…
묵상을 통해 주님께 내어놓고…
주님의 임재 속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일을 하곤 한다.

요즘은,
그 기도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하루 15분 정도만이라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 같이…
그렇게 그 기도를 하고 싶어진다.

한때,
‘기도 무용론자’ 수준이었던 내가…
부르짖어 주님께 간구하는 것을 배우고,
방언도 하게 되고,
눈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배우고,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배우고 있다.

나 같이 더디 배우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주님과의 교제를 눈높이에 맞추어 교육시키시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참 애 많이 쓰신다…. ^^

‘능력있는’ 리더가 하는 두가지 실수

개인적으로 ‘능력이 있는’ 리더가 할 수 있는 두가지 종류의 실수가 있다.

첫번째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다른 이들의 능력을 불신하기 때문에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경우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이나 과대평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겸손하지 못한 리더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듯 하다.

두번째는, 자신의 능력을 일반화하여,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때로 ‘능력있는’ 사람들이 하는 어떤 일들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모델로 삼을수 없는 독특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능력있는 리더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섬기고 있는 follower들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돌보지 않는 독선과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듯 하다.

두가지의 balance를 갖춘 리더를 보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어떤 것이 더 나쁜 리더일까?
두가지 모두 나쁜 리더의 모습들이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번째 유형인 것 같다.
더 뿌리깊은 교만과 더 뿌리깊은 사랑없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나는…
너무 자주… 두번째 리더의 모습을 보인다.

쉼…

이제는 돌아가야 할때
그 먼 옛날
아련했던 그 어디쯤에선가
길을 잃었던 우리
이제는 돌아가야
할때
그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도 가고 찬란한 새벽
새로운
하늘 열리는 지금

이제는 돌아가야 할때
끝없이 부르는
그리운 목소리
잃었던 동산을 찾아
이제는 돌아가야할때

영원한 노래와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쉼이 있는 곳으로.

by 하덕규
===

내 사랑하는 아내, 내 사랑하는 딸과 함께…
이런 ‘쉼’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사하다.

not just physically, but also spiritually.

운동의 생명력은 자발성

운동의 생명력은 자발성에 있다.
그런데, 그 운동의 생명력인 자발성이… 무질서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면서도
자발성 자체가 죽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balance가 결국 운동의 생명력의 key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운동의 주체가 두려움에 빠져 있으면, 무질서를 두려워하여 자발성을 억누르게 되고,
운동의 주체가 환상에 빠져 있으면, 무기력함을 답답해 하여 무질서를 야기시키게 되는 듯 하다.

Shock the culture beyond your culture shock! (황지성)

처음에 이 글을 읽었을때는,
뭐 그냥… 그럭 저럭 훌륭한 글이다 …싶었는데,
미국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에 박힌다.
이전에 eKOSTA http://www.ekosta.org 에 실렸던 글 (아마 거의 7년쯤 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

‘문화충격'(culture shock)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대개
인간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환경에 처해질 때에 겪게 되는 상황을 설명할 때 쓰는 말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는
해외유학생들의 경우일 것입니다. 모두가 공감하는 바이지만 미국유학의 처음 몇달 동안 우리가 겪은 일 중에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경험하게 된 코메디같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의 K 유학생부인의 예처럼 간혹 가다가는 정말 심각한 문화충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K 유학생부인의 가정이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한국에서 늘 하시던 것처럼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집에 두고 몇시간의 외출을 했다가 이웃집의 신고로 여기저기 불려 가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불쾌한 경험들이 있는가 하면 매우
신선하고 유쾌한 경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는 한 12월의 밤에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몇달 안된 P 형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장거리운전을 하면서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며칠동안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피곤한 것도 무릅쓰고
하이웨이를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워낙 ‘동물의 천국’이라 그런지 그날 밤도 하이웨이에는 ‘사슴조심’ 표지판이
간간이 눈에 띄였는데, 조금 가다가 갑자기 하이웨이로 뛰어든 사슴과 충돌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자동차는 부서졌지만 이
P 형제는 많은 상처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지나서 그 사고현장에 지나가던 한대의 차가 멈춰 섰습니다. 한 중년의 미국인이
차에서 내려서는 혼자 당황해 하고있는 P 형제를 위해 모든 사고수습의 뒷처리 등을 매우 늦은 밤까지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가까운
모텔에 자기 돈으로 방까지 잡아주고 쉬도록 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다음에 사례할 길을 묻는 P형제에게 남긴 한 마디의 말은,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만일 다음에 당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이 받으신 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적인 삶에 환멸을 느낀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던 P 형제의 부정적인 시각을 충격적으로 바꾸어 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타문화를 경험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는 첫번째
과제는 그 문화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들이 해외로 나가 공부하게 될 학생들을 위해
타문화권에서 겪을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안내하는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육이라는 것이 제가 아는 한은 대부분, 기존문화와 환경에 대하여 한 인간이 ‘수동적인’ 입장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의
문화적 유형에 길들여진 한 사람이 문화적 환경을 바꾸면서 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제반 문제들과 그 해결책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교육과정은 그 불변하는 거대한 문화권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나의 적응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실 이 단계는 타문화에의 경험에 대한 첫번째 단계에 불과합니다. 일단 적응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입장들으로서 다음 두가지의 길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그 문화에 ‘동화’되는 것인데 이는 기존의 문화를 새로운 문화로
완전히 대치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려는 ‘경향’입니다. 또 다른 길은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단계에서 그 문화가 가진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 문화에 대한 변혁을 시도하려는 의지와 경향을 갖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culture shock’의 어순을 바꾼,
‘shock culture’의 입장으로 이 phrase를 달리 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Shock the culture!”
(당신이 처한 그 문화에 충격을 가하라!)

미국에 와서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충고는 대개 비슷합니다. 미국의 문화에서
살아남고 또 성공하기 위해서는 좀 ‘aggressive’하고 좀 ‘offensive’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생’이나 ‘고통을
감수’하는 일 따위를 미덕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듣지를 못합니다. 한번씩 희생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낮추기
시작하면 미국이라는 사회는 이런 사람을 자꾸만 불리한 쪽으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미국사회가 전반적으로 이런 경향이 있다고
수긍하고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미국식 처세라는 문화적 양상에 대한 ‘적응’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처세하기로 작정하는 것은 ‘동화’입니다. 반면에 그 경쟁적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이 문화가 유도하는 적자생존적인 경쟁의 처세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더 고상하고 큰 가치를 위해서 그러한
처세술을 반드시 따르지 않기로 작정하는 것은 이 문화에 충격을 가하는 일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일본의 한 지하철 역 안에서 일어났던 한국인 유학생의 죽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플랫폼으로 질주해 오는 열차에 치여 몸이
산산조각이 나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있은 후에 많은 일본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했습니다. 반한(反韓) 감정으로 인해 평소에
항상 ‘조센징’들에 대해 불공정보도만 하던 일본의 악명높은 한 일간지조차도 훌륭한 ‘조센징’의 살신성인을 칭찬하고 나서서 언론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한 사람의 섬기는 선행이 그 문화에 충격을 가한 좋은 예입니다. 워싱턴 디씨(Washington, D.C.)
시내의 빈민가에 가면 불과 몇년전에 유학생신분으로 한국에서 오신 C 형제의 헌신으로 세워진 “평화의 집”이란 곳이 있습니다.
흑인 노숙자(homeless)들의 삶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부담을 갖게 된 그는 그들과 더불어 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도 많았습니다. 몇년이 지난 후 그의 사랑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진정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살벌했던 노숙자들의 빈민가에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벌여오던 미국인교회들은
충격적인 시각으로 이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깊은 인종적 갈등의 상처가 있는 지역문화에 충격을 가한 셈입니다.

꼭 이런 죽음이나 대단한 희생이 아니고서도 문화에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 주변을 주의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에서 정직과 성실을 보여주고, 직장이나 실험실의 미국인
혹은 타민족 동료들이 하기를 꺼려하는 3D (difficult, dangerous, dirty) job에 자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찾아보십시오. 오늘 찾아보십시오. 당신의 일상 속에 지금 처한 상황가운데에 찾아보십시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사건들을 잘 아시지요?
바벨론의 거대한 문명과 문화 앞에서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았기에 그 생명과 같은 진리의 믿음을 품고 바벨론의 우상숭배를 거절합니다.
그 역사적인 사건은 그들이 계속 그렇게 살았던 한 평범한 일상적인 삶의 날 중에서 그 어느 한 날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그 문화에 대단한 충격을 가한 날이었습니다. 그들이 가한 충격을 통해 그 거대한 우상의 제국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행했던 일들을 아시지요?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순결과 성실과 공의로 거대한 이집트문화에
대단한 충격을 가했습니다. 요셉이 그 문화에 가한 충격은 특별히 순결과 성실과 공의의 일상적인 삶의 집합으로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충격을 주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대학에서
외국유학생들에게 ‘culture shock’을 안내할 때에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reverse
culture shock’입니다. 해외유학을 마치고 모국으로 돌아오는 학생들이 다시 겪을 수 있는 ‘역문화충격’에 관한 대책입니다.
우리는 처음 주님을 만날 때에 복음의 충격으로 인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 살아야
하고, 이 세상 속에서 지금 우리들 크리스천 새내기들은 끊임없는 도전들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삶을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관이나 삶의 양식들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전에는 부담 없이 즐기던 것들에 대해 부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전에 사귀던
사람들이 우리를 이미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천 새내기인 우리들에게 주님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하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 후서 5장 17절-21절)

이제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 세상 속에서 할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신(ambassador)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과 화목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생명의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문화에 충격을 가할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주도한다고
하는 미국의 문화 앞에서 당당하게 어깨 좀 펴고 삽시다! 하나님이 이 사회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인 우리들에게 주신 고귀한 사신의
임무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 임무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 문화에 거룩한 충격을 가하는 일입니다.

필자 주: 글의 흐름상, 여기에 쓰인 ‘문화’나 ‘문명’의 개념들은 정확한
학문적 개념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諒知)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우에게 해주는 아빠의 이야기

요즘 매일 저녁,
민우가 잠자리에 들기전, 민우에게 ‘아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해준다.

아빠도 민우와 같은 경험들을 했다는 것과,
그 과정 속에서 아빠 안에서 자리잡게된 긍정적 부정적 열매들을 이야기해줌으로써…
민우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를 보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친구들과 편을 갈라 야구를 하는데, error를 해서 부끄러웠던 일,
그 후 친구들이 편을 갈라 사람을 뽑을 때면… 나를 잘 뽑지 않아 화가 났던 일,
그 당시 전학을 하면서 친구들을 보고 싶어 울었던 일,
선생님 몰래 전자오락실에 갔다가 혼났던 일,
주일학교에 가기 싫어서 억지로 투덜 거렸던 일 등등.

민우는,
매일 자기 전이면…
오늘도 ‘함께 이야기하자’며 내게 온다.
그럼 나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아빠도 민우와 그렇게 이야기하는게 참 좋아’ 한다.

민우에게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내게 ‘story’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민우에게 ‘가치’를 설명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을 경험한다.

민우와 같이 어린 아이에게도 그렇지만,
나 같은 성인에게도…
‘story’는 어쩌면 가장 강력한,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내게 story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그러한 ‘가치’로 살아낸 삶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해본다.

드디어!

드디어,
오늘 밤이면… 보스턴에서… 내 사랑하는 토끼 한마리가 비행기를 타고 온다.
내 아내도… 이제 나이가 30대 후반인데… 나는 아직도 내 아내를 토끼라고 부른다. ^^
(내 아내는, 어떻게 10년이 넘게 그렇게 똑같냐며 푸념을 하곤 한다.)

그래도,
40대 아저씨인 나를… 고릴라라고 부르는 내 아내보다는 내가 더 나은 거라고 자위하곤 한다. ㅋㅋ

무려 한달만의 해후이다!

결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족을 하나님보다 우선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결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을 가족보다 우선하지 않겠노라고….
그런 다짐들을 연초에 했었는데,

두가지 모두 얼마나 지켰는지… 자신이 없다.
특히 두번째의 경우엔 더.

일주일동안,
진짜 알차게 보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