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스승, 영적 친구

얼마전부터 Martyn Lloyd-Jones에 다시 꽃혀서 그분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책을 읽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Spiritual Depression (영적침체)를 최근에 amazon kindle version으로 사서 천천히 곱씹으며 읽고 있는데,
완전 감탄을 하면서 읽고 있는 중이다.

처음엔 옛날식 영국 영어가 웬지 발동이 걸리질 않아 읽는 속도가 더뎠는데,
며칠 하다보니 조금 해볼만 하다.

20대에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읽으니 하나도 읽었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얼마나 엉터리로 읽었으면… -.-;

아,
내가 고민하면서 외로워하고 있는 것들을 이분은 이미 이렇게 풀어놓으셨구나… 하는게 꽤 많다!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의 사람이므로,
그분의 생각이 더 이상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도 당연히 있다.
가끔 블로그에서 외롭다고 써서 사람들로부터 쿠사리도 먹고 했는데…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영적 스승, 영적 친구를 다시 찾은듯한 느낌이다.

요 며칠 그래서,
훨씬 덜 외롭다!

Talk to yourself, instead of Listening to yourself

너의 마음속 음성을 들어라.
네가 누구인지를 찾아라.
너를 발견해라.
네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들은 현대에 대단히 많이 듣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이것들에 어느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틴 로이드-존스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영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스스로를 다루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음성에 귀기울여 그 음성을 따를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에게 ‘설교’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높이는 간사함

훌륭한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겠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을 높이는 동기가, 대단히 이기적이고 간사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속해있는 단체의 선배를 많이 존경하고 높인다.
그러면, 결국 그 단체에 속해있는 내가 높아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런 예는 사실 많이 볼 수 있다.
자신이 일하는 업종에 오래 종사했던 사람들을, 그저 그 사람이 오래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존경’ 한다거나 ‘훌륭’하다고 평가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남발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자신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노력을,
‘헌신’, ‘숭고한 뜻’ 등과 같은 말로 포장하여 높이는 경우도 있다.

어핏보면, 그냥 아부하는 것이려니…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기도 하겠지만,
사실 그 동기를 파고 보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향을,
기독교 내에서도 수 없이 발견한다.

성직자들끼리 서로를 많이 높여서 평가하는 것,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떤 사람을 필요 이상 높이는 것,
자신이 속한 단체의 선배의 훌륭함을 일종의 ‘신화’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 등등이다.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사람에게 돌려지는 ‘영광’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현대 기독교에서… 최소한 한국 기독교에서… 그것을 잃어버린 듯 하다.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

김교신 같은 분을 생각해보면,
참 나름대로 그 시대 속에서 많이 고민하고, 행동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의 시각에서보면 그 사상이 당연히 그 시대에의해 제한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그 생각의 깊이가 대단하다.

어찌 김교신 뿐이겠나,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뒤져보면 그 시대와 씨름하며 고민했던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이 그 시대에 깊게 뿌리 내려 있지만, 그 시대에만 제한되지 않는 통찰도 있었다.

통찰은 기교와는 다르다.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각이다. 그리고 통찰은 영감을 수반한다.

현대 기독교의 가벼움을 보면서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가벼움 자체도 있지만,
가벼움 너머의 것을 바라보며 목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볍지 않은 것이 주어졌을때 그것을 가벼움으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비논리로,
때로는 환원주의로,
때로는 패권주의적 반발로,
때로는 그저 무지의 소산으로…

나름대로 가벼워지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을 하지만,
그렇게 가벼워지지 않으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도 않고,
내 스스로 가벼워지지 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

그리운 빌리 그래함

빌리 그래함이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전 세계 기독교에, 아니 전 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이셨다.
더더군다나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분이시다.

그분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경건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는지 하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나도 많이 들었고,
그분에게서 영향을 받은 많은 분들의 이야기도 역시 많이 들었다.

빌리 그래함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내게 가장 가슴 찡~ 하게 남는 그분의 사역은, 1973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전도집회이다. 총 120만명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고, 그 집회를 통해 결신자가 3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때의 비디오 클립을 보면서 나도 뭉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빌리 그래함과 그분의 legacy에 점차 실망하는 일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이 변했던 것일까, 세상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변한 것일까.

(정치적) 보수주의, 백인 중심적 사고방식, 사회 문제에 대한 편향된 인식등이 조금씩 드러날때…
한때 내 신앙의 영웅이었던 빌리 그래함에 대한 실망은 조금씩 더 커졌었다.

그런데,
그게 빌리 그래함 뿐일까.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젊은 시절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던 신앙의 선배들 중에서 더 이상 내가 존경할수 없게된 분들이 정말 많다. 아니 조금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이 지나도 그 존경심을 유지하게되는 분들이 거의 없다.
어떤 분들로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실망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내가 존경을 거두었고,
어떤 분들로부터는 아주 급작스럽거나 충격적인 사건등을 통해서 치를 떨며 존경을 거두기도 했다.

왜 그런걸까.
그분들이 변했던 것일까, 세상이 변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변한 것일까.
나는 그분들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아직도 내가 열심히 찾고 있지만…

한때 존경했던 그 빌리 그래함, 그때의 빌리 그래함이 그립다.

Google의 남자 화장실에는

Google office의 남자화장실에 가면 생리대가 비치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성적 지향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지만,
(동성혼의 허락 여부와 관계 없이)

Google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세련된 tolerance라기 보다는 그냥 political statement같이 느껴진다.

내 생각이 왜곡되어 있는 걸까?

환단고기 5000 AD

한두주에 한번씩은,
옛날 이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다시 소환헤서 포스팅해보려고 한다.
일종의 블로그 10주년 기념행사라고나 할까. ^^

다음의 글은 그 당시 어디에선가 긁어 온 글인데, 출처를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딱 이런식으로 읽는 것 같다… -.-;

=====

1. 미국인 학자 프릿츠 레이몬드에 의하면 20세기에 테헤란로라는 곳이 한국에 있었다고 한다. 아마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가르키는 것일 듯한데 이게 왜 한국에 있었단 말인가? 한국이 서아시아 유역까지 진출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2.당시 한국은 북한이란 나라와 분단되어있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한 서적에는 ‘김일성 장군 항일 무투사’, ‘김정일 국방위원장 대미 항쟁사’등의 책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북한은 당시 세계 GDP 1위, 2위 국가인 미국 일본을 개차반 내버리는 대단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국은 북한보다 국력이 월등했다고 한다.

3.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불렸던 미국의 전역에 수많은 한글 간판과 한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이 존재한다. 왜 초강대국이라 불렸던 미국은 동북아의 약소국 한국에게 이와같은 특전을 배풀었을까? 어쩌면,당시 미국과 한국은 우리가 아는 역사와 정반대의 관계였을수도 있다.

4. 21세기 초까지 한국에는 ‘주한미군’이라는 군인이 존재하였다 한다. 이 군인들은 미국인들로 한국을 지키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병사들이었다. 미국인들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 자기나라 군인을 한국을 지키기 위해 보냈을까?

5.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건물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남극같은 곳에서조차 ‘세종 과학 기지’라는 건물이 발견됨으로 인해 사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6. 당시 세계는 UN이라하는 초국가적인 기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놀랍게도 최근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이 국제기구의 최고통솔자는 반 기문이라는 한국인으로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다. 그 기관의 역대 사무총장의 이름을 살펴보면 리 트리그베(리(李)씨는 한국에 가장 많은 성씨중 하나), 우 탄트(우씨는 한국계 성씨중 하나)와 같은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많다. 왜 세계 초강대국인 나라들을 제치고 한국만이 이런 초국가적인 기관의 장을 배출했는지는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으로는 알길이 없다.

7. 지금도 세계 주요 도시 주요 유적에 가면, 한글로 된 낙서가 있다.(예 : 야이 씹할 쪽빠리년들아. 아 백마 따먹고 싶다. 김철수 애펠탑 왔다가다. 영수♡영희 등등) 이 낙서들은 대개 호방할 뿐더러 그 나라에 대한 욕들로 뒤덮혀 있지만 그나라 사람들은 함부로 지우거나 손대지 않는다. 왜 한국인들에게 이런 치욕을 받고도 그나라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않을까? 혹시 한국의 국력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8. 당시의 한국은 시골단위에서 최소행정단위로 리(理)라는 단어를 썼다한다. 놀랍게도 파리, 알제리, 양촌리등 세계 여러 지역에 이런 리 단위를 써는 도시들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적 도시라 불리던 파리도 한국의 일개 시골농촌단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파리가 시골이 되는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력을 짐작 할 수 있다.

9. 당시 한국의 군사는 남북한을 합쳐 200만에 달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군사를 가진 나라는 당시 인구 12억의 중국밖에 없다. 한국의 인구도 아마 그에 비슷하지 않았을까…

10. 당시 인구가 12억에 가까웠는데 한반도 하나가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까?

11. 한국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는 유물중의 하나가 ‘영문법’책이다. 일반사학계에서는 영어라는 언어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브리튼 지방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12. 당시 한국의 사진자료중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한’가인, 장동건, 원빈, 김’태희등의 사진등인데 이들 인물은 다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 당시 한국인은 엘프의 족속임이 틀림없다.

13. 당시 여의도에 대해 사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큰 강에 가운데에 나있는 섬이며, 커다란 대로에 빌딩숲에 둘러쌓여 있다.’ 하지만 지금의 여의도는 아늑한 녹지공원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기록은 여의도가 아닌 맨하탄과 비교해보면 놀랍도록 일치한다.

14. 당시 코카콜라와 시장을 양분했던 콜라 펩시의 로고를 보면 태극 문양과 거의 흡사하다. 한국계에서 나온 콜라임을 알 수 있고, 당시 미 제국주의를 상징하던 코카콜라와 대등한 경쟁은 한국의 국력을 짐작케 해준다. 기록을 찾아보면 당시 독일에서 코카콜라 판매금지처분이 나왔는데 이걸로 보아 당시 국제여론도 한국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 한국전쟁에 16개국이 참전했다고 한다. 만약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16. 당시 초등학교 3학년 이었던 이영아라는 사람의 일기에 보면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세계에서 젤루젤루크다’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우리가 부르는 백두산은 세계에서 제일 높지 않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네팔에 있는 에베레스트 산이다.

17. 당시 미국학자 앤드류 크롬손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외국으로 여행 나가기 위해서는 배나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라고 적혀있다. 한국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바다로 통하는 배나 빠른 속도의 비행기를 타야만 가능하단 소리다. 우리가 아는 당시의 한국 영토와는 매치가 안되는 진술이다.

18. 당시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한국을 ‘영원한 친구. 영원한 동반자’라 칭하며 한국에 온갖 특혜(무비자 입국, FTA등등)을 준다. 초강대국의 대통령도 한국을 두려워했던 모양이다.

19. 당시 나왔던 사료중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도서를 보면 한국이 일본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책은 한국이 핵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세계 초강국중 하나라고 기록해놓고 있다.

20. 21세기 초반 한국의 히트곡이었던 ‘연애혁명 21’은 일본의 노래 ‘러브 레볼루션21’과 소름끼칠 정도로 똑같은 음을 가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무한도전송’과 미국의 ‘바하마 마마’, ‘백만송이 장미’, ‘징기스칸’, ‘안재욱의 친구’ 등등등 비슷한 사례가 세계 전역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다. 한국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그들과 정신적인 유대감까지도 형성했었다.

21. 서울대 천체기상학과의 김백환 교수는 당시 한국은 기상예보와 실제 기상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것을 발견했다. 조그만한 한반도의 기상예보가 그렇게 많이 틀렸다는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22. 당시의 사료를 살펴보면, 서울 한 가운데 위치한 명동에 스타벅스라는 커피 전문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커피란 커피나무 열매를 끓여서 만든 것으로 커피나무는 한반도에서 한 그루도 나지 않는다.

23. 기상 관측 기록에 의하면 20세기에는 매년 태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의 일종으로, 온대-냉대 지역인 한반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기상 현상이다.

24. 1959년에는 태풍 사라호가 와서 경상도는 물바다가 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같은 해에 경기도에서는 강바닥이 드러나는 가뭄이 들었다. 좁은 한반도에서 이렇게 다른 현상이 일어날 수는 없다.

25. ‘서울대 공원’ 은 서울대학교에서 관리하던 공원을 말하는 것이다. 공원은 동네 노인들이 여가를 보내고 주민들이 조깅과 체조를 하며, 아이들이 뛰어놀던 익숙한 생활공간이다. 그런데 이 공원 안에는 하마, 코끼리, 홍학, 기린 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동물들은 결코 한반도에서 살 수 없는 것들이다.

26. 미국의 대도시인 로스앤젤레스에는 코리아 타운이 있다.

27. 서울은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강북, 강남이라는 말은 원래 양자강의 북쪽과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울의 강남은 부유하기로 유명했는데, 양자강 남쪽의 강남도 옛부터 풍요롭기로 이름나있었다.

28. 90년대에 서울의 땅을 다 팔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전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서울이 오스트레일리아만큼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넓은 땅이 한반도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29.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데, 하와이에서 죽었다.

30. 상식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면 지지해 준 유권자들을 만나 감사를 표하고 계속 지지해 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당선되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이 대한민국의 일부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31. 2000년대를 즈음하였을 때 정치가 허경영은 바이칼 호수를 이용해서 미래 수자원을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허경영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 거물 정치인으로, 그의 말에 따르면 바이칼 호수는 대한민국 영토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32. 반도사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서울은 휴전선에서 자동차로 고작 1시간 거리에 있다. 한 나라의 수도가 국경에서 그렇게 가깝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33. 우리가 배운 역사 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일본, 미국과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전쟁사를 쓴 사서인 <<데프콘>> 과 <<남벌>> 에는 다같이 대한민국이 일본과 전쟁을 했음을 전하고 있으며, <<데프콘>> 에는 미국과도 전쟁을 벌여 승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서들에는 당시의 전쟁 기술과 무기에 대해 상세히 실려있으므로 조작이라 볼 수 없다.

34. 박창범 교수의 천문학 연구와 같은 방법을 통해, 대한민국의 천체 관측 기록은 한반도가 아닌 북태평양과 현 중국대륙에서 이루어졌음이 증명되었다.

35. 추석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는 11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 고속도로는 차들이 시속 100km 로 달리는 도로이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거리는 1100km 가 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서울과 부산을 생각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거리이다. 그런데 중국대륙의 북경에서 항주까지의 거리와는 소름끼칠 정도로 일치한다.

36. 유명한 지식인 심형래는 공룡과 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싸움의 기록 필름인 <<티라노의 발톱>> 에 따르면, 심형래와 싸운 공룡은 티라노사우루스이다. 그런데 티라노사우루스는 북아메리카에서만 발견되는 공룡이다.

37. 한국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중부 태평양의 동티모르, 히말라야 북쪽의 아프가니스탄, 중동의 이라크, 그 서쪽의 시리아, 아프리카 서쪽의 서부 사하라에 반란 진압과 치안 유지를 위한 군대를 보냈다. 이로 보아 이 나라들은 모두 한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속국이거나 그 영토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38. 한국은 외국인들 중 백인들은 한국인과 동등하게 대하거나 우대했지만 흑인이나 황인종은 차별했다. 이로 미루어 원래 한국이 백인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39. 과거 한국은 세계에서 선박을 가장 많이 건조하는 국가였다. 좁은 한반도에서는 그 많은 선박을 제조할 철이 생산되지 않으며, 배들을 움직일 석유도 나지 않을 뿐더러 그 많은 배에 탈 승무원도 조달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은 대량의 철광석 및 석유가 생산되며 인구가 많은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40. 20세기 한국에는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길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흔했다. 어떤 학문의 “정석”이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 한묵의 발상지가 바로 그곳임을 뜻한다. 즉 수학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41. 한국은 1년에 수백만대의 자동차를 제작했는데 이는 5천만도 안 되는 인구에게는 필요가 없을 뿐더러 좁은 한반도에서는 다 움직일 수도 없다. 따라서 훨씬 넓은 땅과 많은 인구를 가졌을 것이다.

42. 20세기 한국에서는 일본의 언어와 풍속이 민간 차원에서 상당히 성행했다. 이는 한국이 일본을 식민통치하면서 식민지의 문화를 일부 흡수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는 보다 과거에도 그 사례가 있는데, 몽골이 잠시 강성하여 본가인 고려를 억누르고 있을 때 상대적 강자인 몽고의 풍속은 잠시 고려에서 “몽고풍”이라 불리며 유행하고 상대적 약자인 고려의 풍속은 몽고에서 “고려양”이라 불리며 유행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풍속이 유행할 때 일본에서는 “한류”라 하여 한국 풍속이 유행했으니, 이는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배한 증거이다.

43. 한국어는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이들 모두를 식민통치하면서 모든 피지배 민족의 언어를 통할할 수 있는 진정한 공용어를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44. 프랑스를 지배하고 전유럽을 정복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는 실은 한국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나폴레옹이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다. 한국어로 된 그의 전기 “나파륜전”이 발견되어 존재하는바, 그는 분명 나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었다.

45. 만주는 한국의 영토였다. 20세기 대한민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라고 전하는 박정희는 만주군이라는 군대의 장교였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군대에 복무했을리가 없다. 즉 만주군은 한국군 중 만주지방에 주둔한 군대였음이 분명하며, 이는 만주지방이 한국의 영토였음을 뜻한다.

46.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2차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에 투하된 양을 능가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2차대전은 6년간 치러졌지만 한국전쟁은 3년간 치러졌다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의 상대자였던 북한은 일본과 독일을 합한 것보다 두 배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한은 북한보다 두 배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영토도 두 배였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독일과 일본을 합친 것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절대 한반도가 될 수 없다.

47. 미국은 매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돈과 재화를 한국에 보내는 대신 그보다 적은 액수를 한국으로부터 받아갔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에 공물을 바치는 관계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한국에 가져다 바치는 돈과 재화의 액수보다 한국으로부터 받아가는 돈과 재화의 액수가 많았는데, 이는 일본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한국이 기꺼이 하사해준 것이다.

48. 한국은 매년 대량의 석유제품을 수출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석유가 나지 않는다.

49. 당시 한국에서는 아름답고 화려한 여자를 가리켜 된장녀라고 불렀다. 따라서 된장은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뜻의 형용사이다.

50. 한국에서는 핀란드에서만 나는 자일리톨이란 물질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자일리톨의 공급원인 핀란드가 한국의 영토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51. 20세기 한국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던 북한에게 수십만톤의 중유를 지원했다. 여기서 의문은 한국은 산유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기록에 의하면 주로 원자력 에너지를 이용한 것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쓸때도 없는 중유를 단지 북한에게 주기위해 수입했다는 것은 말이되지 않는다.

52. 기록에 따르면 위의 중유 지원을 즈음한 시기 엄청난 양의 양곡 또한 북한으로 지원되었다고 한다. 당시 전해지는 일부 뉴스 기록에 따르면 매년 몇만톤의 쌀을 북으로 보냈고 그 외에도 옥수수 또한 5만톤을 보냈다고 하는데 좁은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양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지원하면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굶어 죽어야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가? 좁은 한반도에서 쌀도 생산하고 옥수수도 생산하는데 정작 굶어 죽었다는 말은 없고 심지어 자동차와 선박까지 생산했다고 한다. 가능하겠는가?

53. 상업 활동을 살펴보면 한반도 도시의 중심가 곳곳에는 롯데백화점 등의 회사가 있었다. 헌데 이 롯데 상표명은 일본에도 있다.

54.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면 상당히 많은 당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강단사학에서 미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취급하는데 그 나라의 정당도 민주당과 공화당 뿐이었다. 헌데 대한민국은 자유당. 민정당. 민주당. 통일 민주당. 신한국당. 민정당. 국민당.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등등 수십개의 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불과 몇십년 사이에 나타나는 기록들인데 과연 한반도 같은 좁은 땅에서 이렇게 많은 정당이 있을 수 있을까? 우연하게도 아프리카 대륙정도에 존재하는 정당들의 수를 계산하면 한국의 정당숫자와 유사하게 나온다.

55. 20세기 한국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했다. 그 중 대표적으로 개신교. 불교. 천주교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 종파별로 기록한 신도수를 계산하면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숫자보다 훨씬 많은 인구수가 나온다. 심지어 이는 중소 종교나 무교자들은 기록에 넣지도 않은 숫자다. 양심을 믿을 수 있는 종교단체의 기록임을 감안할때 그 인구는 절대 한반도에서 부양하지 못한다.

56. 당시 대한민국은 육해공 포함 70만 가량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수백대 이상의 전투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좁은 한반도에서라면 과연 이정도의 병력이 필요했을까? 참고로 인구대비 적정 병력수는 0.3-0.35% 수준이다. 이는 강단사학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57. 88년 올림픽의 기록을 보면 역대 가장 많은 참가국들이 등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본다면 세계 각국이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좁은 한반도에서 그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58. 당시 대한민국에 떠도는 광고나 방송자료 등을 살펴보면 한국에 관련하여 세계지배, 초일류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59. 2007년경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후보들 중 가장 높은 지지를 받던 후보의 공약중에 부산과 서울을 이어주는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말을 볼 수 있다. 강단사학자들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한반도에 불과한데다 굳이 운하가 없어도 바다를 통해 갈 수 있을 뿐더러 시간조차 별로 걸리지 않는다. 운하가 필요한 것은 내륙지역이고 보통 중국과 같은 곳에서 만드는데 중국에서 오래된 운하의 경우 1,747km에 달한다. 한반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리가 나올 수 없다.

60. 고대인들은 지금보다 훨씬 현명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강단사학이 민족의 역사를 한반도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다. 헌데 지금 우리들은 대한민국이 IT 강국임을 알 고 있다. 헌데 당시 전송 인프라였던 인터넷에 떠도는 한국어 자료를 보면 주로 환국과 같은 기록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일부 강단사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반도설은 일부 학교등에서 학설서 등으로만 나왔던 것을 본다면 당시 사람들은 이미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추정하는 바로는 당시에 큰 변란이 있었고 그 틈을 타서 한반도설의 주장자들이 득세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강단사학은 당시 한국의 IT 인프라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이러한 소프트웨어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내겐 말씀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저께였던가… 교회의 몇분들과 이메일을 나누면서,
최근에 묵상을 하고 있는 사도행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최근에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나는,
사도행전을 읽으며… where we are와 where we can be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저 많이 슬퍼하고 있다.

최근에 읽는 성경들이 내겐 계속 그렇긴 한데,
사도행전이 내겐 lamentation과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요즘은 무슨 성경을 읽어도 다 그렇다. 다 lamentation이다.)

그런데,
이게 lamentation같이 읽힌다고 하더라도 별로 공감을 얻지도 못하고,
나도 그게 어떤 건지 설명도 잘 못하겠고,
그냥 혼자서 마음 많이 아파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있다.
그래서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만 아파하는 거다.

이런 내게,
하나님께서 뭔가 좀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하게 다가와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이런 내게 침묵하신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왜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빡빡하게 하시는 걸까.
왜 남들처럼 그렇게 좀 친절하고 부드러운 하나님이 되어주시진 않는 걸까.
왜 내겐 하나님 믿는게 이렇게도 어려운걸까.

Valentine’s Day, Ash Wednesday

어제는 Valentine’s Day이자 Ash Wednesday 였다.

Valentine’s Day의 상업적 가벼움 속에서,
Ash Wednesday를 흘려버리는 가벼운 죄책감 속에서,

CVS에 진열되어 있는 빨간색 하트를 든 곰인형의 가벼움이,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역겨움과 싸워야 했다.
사랑과, 결혼과, 십자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들을 되새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Hardware engineer의 설움

실리콘 밸리는 정말 software engineer들이 지배하고 있다. ^^
잘 생각해보면 정말 지난 10여년간 세상을 급격히 바꾼 key technology는 주로 software다! (아마 apple의 iphone이 예외가 아닐까 싶은데, 그것도 software가 매우 중요하다.)

1.
어제는 건강검진겸 해서 의사를 찾았다.
Google 안에 있는 의사다.
간단하게 한 30분 이런 저런 이야기하고, 이번에 천식 때문에 다 써버린 천식 약도 새로 받고, 피도 뽑고…

나보고 회사일 때문에 stress가 많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훨씬 좋은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의사는 나보고 hardware engineer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만나는 hardware engineer들이 대체로 stress level이 더 높은것 같다고. 특히 product cycle이 있는 (가령 전화 같은) 개발 관련해서 일하고 있는 hardware engineer들은 더 그런것 같다고 그랬다.

2.
지난 주에 Google 식당에서, 옛날에 Apple에서 함께 일하던 옛 직장동료를 우연히 만났다.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 사람은 Google에 와서 Pixel phone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만났을 때가 저녁 7시쯤 이었는데, 샌드위치 두개를 싸가지고 가면서, 그날 밤에 conference call이 두개가 더 남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Apple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출장다니면서 고생하는건 똑같다고 했다.

3.
그런데 hardware engineer들의 평균 salary는 software engineer들보다 현저하게 낮다. 심지어는 비슷한 정도의 경력과 직급에서 두배이상 차이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아주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hardware engineer들이 일반적으로 stress level이 더 높은데 돈은 덜 번다고.

나는 그래도 내 job에 비교적 만족하는 편이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고,
게다가 hardware engineer 치고는 그래도 여러가지 상황이 좋은 편이긴 하다.
그래도 어젠가는 살짝 좀 설움 같은게 느껴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