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회복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야기하는데서 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대한 편애가 대단하신 것처럼 나온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요즘 내가 성경을 읽는 방식은 이렇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의 공의가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당시 역사속에서 말도 안되는 약자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그 존재자체가 정말 서러운거다. 어디에 하소연할데도 없고 계속 강대국에게 당하기만 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여기도 붙었다 저기도 붙었다고 해보고, 꿈틀 저항도 해보는데, 주변 강대국의 부침에 따라서 휙~ 쓸려버리는 고통을 계속 겪는 거다.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는 폭력적인 강자에의해 패해를 입는 약자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이다.
약자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거다.

기독교의 발흥 (3)

이 책에서 또 한가지 흥미로운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다수가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흔히 내가 배워온바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사도행전의 시대 (AD 1세기)를 거치면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단절/분리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실제로 초기 기독교 개종의 다수는 유대교에서 이루어졌고, 2세기가 지나서까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사실 New Perspective 입장의 신학자들과 3rd wave historical Jesus 그룹에서 주장하는대로, 신약성경을, 특히 복음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읽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 책에서는 God fearer도 초기 기독교 개종자에 꽤 큰 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그룹도 역시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이해해야만 제대로 파악하는것이 가능할 것이다.

참 흥미로운 포인트였다.

하나님의 심판

계속해서 에스겔을 보면서 곱씹어본 것.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게 구약에 많이 나온다.
너 까불면 죽어. 그러니까 고분고분 말 잘 들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까부는사람 손들고 서있게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는,
궁극적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

심판이 있다는 것은, 힘있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나쁜 소식이겠으나,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들에게는 고대할만한 것이었겠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 까불면 죽어 라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버전으로 풀자면,
지금 그렇게 너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원칙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이 불평등하고 불완전한 체제가 궁극적 잣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속에서 네 판단이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으로 판단되는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판단자이시다.
억울함을 신원해주시는 선한 판단자이시다….

이쯤 되는게 아닐까.

때로는, 교회 내에서도, 기독교인들과 이야기할때도,
궁극적 판단 잣대를 자신으로 삼고 사는 것에 대한 비판을 하기가 참 어려울때가 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어서.

그런 ‘소위’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는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참 지치게 하고, 많이 고대하게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스겔서같은 데에서는 그 속에서도 이야기하라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고 계시니…

상록수

내가 대학생일때에는, 상록수가 금지곡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데모가였다.
대학생들이 술마시면 함께 떼창으로 부르는 노래이기도 했다.
끝내 이기리라고 이야기했던 대상은 당연히 독재정권이었다.

그 후 97년 금융위기때 이 노래가 박세리가 등장한 공익광고에 쓰였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이 없지만… 미국에 있었을 때여서) 그때는 대통령이 김대중이었다.

그후 2002년 노무현 대선광고중 하나는 노무현이 기타를 치면서 상록수를 부르는 것이었다.

20016-17 촛불집회때에도 이 노래가 많이 불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노래에 참여한 가수들중 다수는 보수정권때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노래, 참 잘 만들었다. 이 정도면 정치적 입장이나 그런걸 떠나 다들 보면서 감동받을만하다.

내가 이 youtube clip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몇가지
– 한편 참 감동적이다! (약간의 국뽕과 함께)
– 아, 이제 한국의 수구보수는 정말 marginalize되었고, 한국의 liberal들이 진짜 제대로 헤게모니를 잡은 거구나…. 보수쪽에서 시대착오적으로 탄압했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런 contents를 보면
– 영어로 번역되어서 나온 youtube clip은 내가 아는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도 한번 보여주고 어떻게 느끼는지 한번 물어봐야 겠다.

기독교의 발흥 (3)

이 책에서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을 여러가지 data를 바탕으로 confirm해주는 것도 있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 생각을 확~ 뒤집어놓는 논지도 발견된다.

그중 하나는 초기 기독교의 계급기반이 ‘하층민’이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고급 수준의 사고력이 필요했을 수 있고,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라는 거다.
그것을 support하기 위해서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들을 예로 들어서 개종이 이루어지는 과정들을 분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 책에서도 초기 기독교가 하층민을 배제했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하층민을 주된 target으로 하는 종교였다면 이렇게 발흥할 수 없었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논리들을 펴고 있다.

이건 내겐 참 흥미로는 관점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왠지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층민일 것이라는 상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는 하층민에게대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놓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층민에의해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는 거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대로, 기독교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아니었다.

이건 정말 내가 몇년동안 꾸준하게 다시 곱씹어야할만한 큰 숙제를 내게 던져 주었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행동해왔던 큰 줄기 가운데 하나를 수정해야할만큼 클지도 모르겠다.

416

세월호는 생각할때마다 정말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과 찌릿~한 아픔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하고,
결국 그러다가는 심한 쌍욕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된다.

하나님 이런 ㅆㅂㄴ들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주십시오.
하나님 이 ㄱㅅㄲ들은 끝까지 그 인생이 불안하도록 해주십시오.
하나님 저런 놈들에게 절대로 평안을 허락하지 말아주십시오

에이…. ㅆㅂ…

나는 욕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평생 욕을 하는걸 본 사람은 아마 다 해서 5명도 안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오늘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한 가장 심한 욕을 하면서 저주의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래야만 내가 좀 살 수 있을 것 같다.

블로그를 못 쓴 이유가

어제 초저녁에 조금 자고,
저녁먹고 한 두어시간 비몽사몽 하다가 결국은 출구조사를 보고야 말았다. (그때가 이곳 시간 2am)

그러고나서 개표상황을 보다보니 5시 가까이 되었고, 개표방송을 들으며 비몽사몽하다가 결국 아침 6시 알람에 잠이 깨었다.

나는 정말 아주 간절하게 응원했다. 기도했다.
그러느라 블로그를 못 썼다.

나는 어느 한쪽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느 한쪽이 정말 불의의 편에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간절했다.

사실 나름대로 며칠전부터 각 정당이 몇석씩 얻을까 계산해가며 나름대로 노트에 정리도 했었는데, 내 바람보다는 살짝 조금 덜 미쳤고, 내 예상보다는 살짝 조금 더 좋게 나왔다.
내 바람은 지역구 165-81-1 내 예상은 지역구 155-95-1

이거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어쩌고 할만큼 강한 확신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정말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옳은 뜻을 희생하는 사람들에대한 심판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오늘 하루 피곤해서 죽어나겠다. -.-;

기독교의 발흥 (2)

기독교의 발흥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 있다. 하루에 한장정도 읽고 있었는데 지난 고난주간에는 책 읽는 시간등을 줄이고 좀 자숙(?)하는 바람에 진도가 좀 덜 나갔다.

1장에서는 기독교인이 증가하는 형태가 exponential curve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역사 자료등을 바탕으로 그 가설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들을 해 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가 어느순간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 같아 보이는 이유는, 어느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기 보다는, 기독교가 증가하는 방식이 exponential curve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건 요즘 COVID-19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친숙한 개념일 것 같다.
기독교의 증가세가 10년당 40%정도 증가했다고 가정했을때 대충 역사자료들과 일치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그 증가세가 매우 낮은 것 같다가, 어느이상 되면 똑같은 증가율(10년당 40%)를 가지고도 폭발적인 증가인 것 같이 보이게된다는 것이다.

이건 대단히 흥미로운 argument였다!
혹시 기독교인들이 ‘부흥’이라고 부르는 현상들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한국기독교의 성장 그래프를 이런 방식으로 그려보면 어떻게 나올까?

하여간 여러가지 흥미로는 생각을 갖게 했다.

It was supposed to be great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지금 날씨가 기가 막힙니다.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꽃이 사방에 펴 있고, 아침저녁으로는 적당히 선선합니다.
지금 Shelter-in-place 중에도 저는 매일 밖에서 30분~1시간 정도는 걷거나 뛰는데요, 나갈때마다 정말 아름다움에 경탄을 합니다.

2020년 4월은 이렇게 아름다운 시즌입니다…. 아니 아름다운 시즌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COVID-19 때문에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을 접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뿐 아니라 지역에서 들려오는 확진자 소식, 사망자 소식.
여기 미국에서는 화장실 휴지를 하나 사려면 쇼를 해야합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가서 한주에 한끼정도 비싸지 않은 외식하는 것도 이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에만 있다보니 우울해져서 힘들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경제적 약자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앞으로 펼쳐질 경제적 불확실성때문에 지금 꽤 괜찮은 사람들도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2020년 4월은, 이러지 않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시즌이었어야 합니다. It’s supposed to be great in April in California.

그런데 한편,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이 이러면 안됩니다.
N번방 사건 같은 걸로 피해를 보는 아이들이 있어선 안되는 겁니다.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 억울하게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서 평생 장애인이 되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회사에서 거짓말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괜한 모함으로 궁지에 몰리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한 정치인은 외면받고, 자기이익을 챙기며 공익을 외면하는 정치인이 주목받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COVID-19같이 정말 이런 황당한 바이러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기도 하고, 정의가 불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 같기도 하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일들은 그칠줄 모르는 것 같고, COVID-19은 전 세계에 위세를 떨치며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그러면 안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이래야하는건데… 하는 그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깨어짐과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갈 길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지금 당장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 같은 못된 것들이, 마침내 심판에 처해지고 하나님의 선한 통치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는 약속입니다.

April in California is supposed to be great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It will be great, the greatness already has begun이라고 하시는 선언입니다.

만일,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세상이 해석해낼 수 없는 이런 상황 속에서 세상이 갖지 못하는 다른 소망을 갖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과 침체에 빠져있을때 그 사람들을 향해 과감하게 우리를 던져 소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의 Lord가 되신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세상이 던져주는 소망, 그리고 그것이 멈추어버린 상황에서 갖는 절망을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습니다.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 어제 오후에 내 스스로에게 뭔가 부활의 이야기를 더 해주고 싶어서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한 설교문 요약본. 아마 이걸 full로 풀면 거의 한시간짜리는 되지 않을까.

부활은 진짜 믿기 어려운 사건

오늘아침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이 사람들 진짜 잘 못 믿는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다니. 이건 정말 그렇게 쉽게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갖는 significance를 생각할때 믿을만하지 못한게 당연하다.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너무 쉽게 믿는 것은 그 significance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했다는 것도 정말 믿을만한것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도 역시 정말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

죽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 죽음을 조롱할 수 있다는 말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세상을 그분의 선한 통치아래로 가지고 오신다는 선언.

이제는 그렇게도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었던 죄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와지게 되었다는 말씀.

세상과 죄의 노예가 아닌 하나님 자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는 말씀.

이게 이렇게도 엄청난 선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정도의 쇼킹한 사건은 되어야 격이 들어맞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새로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