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기다리는 토요일

(작년 부할절을 지내면서 내 스스로에게 내가 했던 설교. 나 혼자 이야기했고, 나 혼자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일요일 새벽에 하셨다.
금요일은 절망의 날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과 함께 꾸던 꿈도 사라졌고, 삶을 걸었던 열정도 꺼졌다.
치열한 노력도 그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 진이 빠지는 슬픔의 토요일이 왔다.
토요일에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정말 진이 빠져 있었을 거다. 슬픔과 탈진과 두려움과 실망등이 섞여 있었겠지.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바꾸었다.
아직 절망의 통곡으로 인한 탈진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완전히 뒤집을 뉴스가 나온것이다.
제자들은 그 새로운 엄청난 소식을 어떻게 handle 해야할지도 잘 몰랐을 거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걸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토요일을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꿈들이 꺾이는 절망을 경험하고,
우리의 노력이 한계에 다다라서 이제는 침체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저 자기연민과 의욕없음에 사로잡혀 축 늘어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의 일요일이 온다.
부활의 일요일은 그 침체의 절망과 의욕없음이 멋쩍어지는 날이다.
예전에 꾸었던 꿈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으로 그 꿈을 차원이 다르게 이루신다는 것을 보는 날이다.

아직 우리는 토요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일요일이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토요일을 살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맞는 부활절은 늘 부조리하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래의 기쁨을 드높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것이 믿음이다.
이 어정쩡한 토요일에, 영광의 부활의 일요일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아직 토요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요일을 아는 사람들이다.

아직은 토요일이다. 그러나 일요일이 온다. 아니 일요일이 왔다.
부활이다.

예수님의 친구

여태까지는 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보다는 예수님께서 조롱당하셨다는 것을 더 많이 주목해서 쓰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이렇게까지 조롱해야만했을까.
여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예수님을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위에 대드는 반란의 두목 정도로,
유대종교지도자 입장에서는 종교질서를 흔드는 이단의 괴수로,
일반 지나가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때 정치적 해방이라는 소망을 준듯 했으나 그것을 실망시킨 사기꾼정도로…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외로우셨다. 아무도 그가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보여주고있는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가장 치욕스럽게,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외롭게…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고 계신다. 나의 치욕, 나의 고통, 나의 외로움을 대신해서.

내가 예수님을 그저 superhero로 생각했을때는, 그렇게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게 내가 가서 친구가 되어들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을 깨닫고나니, 나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바로 나 같이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을 위해 그 모든 고통과 외로움을 견디신 거였다!

예수님은 외로우셨지만,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예수님은, 정말 작정하고 십자가로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것 같다.
사람들이 아니 너 왜 이래?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시는데도 아주 작정하고 아무말 없이 십자가를 향해서 가고 계신다.
빌라도도 이상하게 여겼다고 쓰고 있지만 정말 독자들이 보기에도 이건 정말 이상하다. 

바라바가 강도라고 여기에는 쓰여 있지만 아마도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다.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쟁취하려는 집단. 어떻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의병같은 것이라고 볼수도 있고, 어떻게 말하면 하마스같은 집단이라고 볼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그냥 테러리스트라고 볼수도 있는…

마가복음 앞부분에서, 특히 성전청결 본문 전후로 예수님께서 아주 clear하게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그런 폭력적 방법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의 희생이 정말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믿음으로 뚜벅 뚜벅 그냥 그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고 계신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때문에 풀림을 받은 사람이 열심당원이라는 거다. 폭력으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강력한 message를, 폭력을 주장하는 사람 대신에 죽으심으로서 오히려 더 강력하게 던지시는 거다!

세상의 방식으로 승리하겠다고 바둥바둥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가장 경멸하는 방식으로 죽으심으로써, 그 사람들을 자유케하시는 거다.

정말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stumbling block인거다.
아니, 그런 바보같은 방법이 어디있어?
예수님은 자신이 가장 반대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대신해서, the WAY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시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타적인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자신의 만족과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폭력과 완력으로 자신의 뜻은 관철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비폭력적인 모습으로 죽으심으로써 그들을 살리시고 계시는 거다.

정말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셨다면,
그리고 내가 정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십자가의 가치를 조금 흉내라도 내보아야하는게 아닐까.

정말 내 삶의 방식과 세계관은 계속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면서,
나는 그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예수님. 끌려가기만 한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아, 마음이 한편 찢어지듯 아프고, 한편 많이 벅차고, 한편 울컥하고, 한편 미칠듯 답답하고…
이걸 어떻게 표현해낼 방법이 없는데…
뭔가 예전에 내가 참 많이 들었던 하덕규씨의 노래가 그래도 이걸 꽤 가깝게 표현하는 듯…
(여기 나오는 영상은 오히려 이 복잡한 마음가 감정을 제한하는 것 같지만, 이 노래는 내가 참 좋아한다.

배신자를 위한 희생

오늘 아침에는 마가복음 14:53-72.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모욕을 당하시고, 억울한 판결을 받으시는 장면.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

여기서 또, 성경은 집요하게 베드로, 제자의 대표인 베드로의 뻘짓을 그리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뻘짓을 하는 제자를 그리고 있을까.
이 마가복음을 읽었을 fist hand reader들이 보기엔 그 제자들이 따라야할 모범이었을텐데.

초대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아마 이것이 늘 사람들에게 해주는 주된 레파토리였을 것 같다.

그때 내가 우리 주님을 배신했었어. 그때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고, 그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그때 비겁하게 숨었어. 그렇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지. 부활하셨고, 승리하셨고.
나 같은 사람은 정말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스토리텔링은, 제자들 뿐 아니라 그 스토리를 들었던 초대교회 교인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읽고있는 우리들에게도… 우리가 바로 베드로이고, 우리가 바로 그렇게 배신했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연인인 나는, 예수님을 잘 따르는 사람이 아닌데,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하려하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사람인건데… 그걸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묵묵하게 그 배신을 다 몸으로 받으시며 치욕과 고난을 받으시는 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게 아니고, 그분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거다.

아, 현대기독교는… 얼마나 자기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나도, 얼마나 자기자랑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인걸 다 아시면서, 어쩌면 내가 뒤에서 배신하고 도망가는 소리를 한편 다 들으시면서 묵묵히 ‘내가 그다’라고 하시면서 그 치욕을 다 받으시는 거다.

정말 이 본문은, 베드로뿐 아니라, 나를 그 배신자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내가 배신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아야만 예수님의 고난이 제대로 보인다.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모습은 복음서에 정말 찌질의 극치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오늘 아침 묵상 본문에서도 아주 가관이다.
예수님에게 가증스러운 입맞춤을 하는 유다는 말할 것도 없고,
뜬금없이 폭력적으로 상황을 대처하는 베드로 (베드로라고 오늘 본문에 나와있지는 않지만)도 그렇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치는 제자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아주 형편없게 그려지고 있지만, 사실 복음서를 쭉 둘어보면 제자들이 참 별볼일 없는 사람들로 그려지고 있는건 매우 일관되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성경이 쓰여졌을 당시에, 이렇게 형편없이 그려지고있는 제자들은 그 교회의 존경받는 리더들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리더들을 끌어내려버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람들을 낮춘다.
그건 서로 겸손하게 대하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기 위한 윤리적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누구도 높여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낮아지는 것이다.

예수님이외에는 정말 아무도 높아질수 없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낮아지신 분이신데, 그것이 그분을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분으로 만들어놓았다.

기독교가 가지는 역설이다.

나를 높이고, 나를 자랑하는 것이 그저 천박한 말장난이되어버리고,
예수님 앞에서 나를 끝없이 낮추고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되는 것.

높아지려고하는 것이 로마시대의 문화였다고는 하나,
2020년 실리콘밸리만 했을까…

이곳에서 나는, 정말 예수님만을 높이며 살고 있는 걸까.

고난주간의 인간 예수님

예전에 어떤 신학자가, 현대교회가 부르는 ‘찬양’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신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거의 docetism과 같이 들린다고 지적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다.
Docetism은 ‘가현설’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성품을 가지셨다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처럼 보이셨을 뿐이지 인간은 아니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왕, 예수는 하나님, 위대하신 예수님, 전능하신 예수님… 을 강조하는 바람에,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balance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시다.

나 스스로도 벌써 고난주간 묵상을 해온지 30년정도 되었는데, 내가 그리는 고난주간의 예수님은 지나치에 docetic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고난주간을 보내셨던 예수님은 인간 예수님이시기도 했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한주를 보내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그렇게하니 겟세마네의 기도가 좀 새롭게 보이기도한다.

QT note

집에서 일하다보니, 출퇴근에 버리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래서 시간이 조금 더 남는다.^^
그래도 일하는 양은 그렇게 많이 줄어들지 않았고 어떤땐 아침 8시부터 오후까지 밥먹을 시간도 없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훨씬 더 managable하다.

덕분에 한동안 잘 못했던 일을 하고 있다. – 그건 긴 버전의 QT note를 매일 쓰는 일이다.
이게 참 꿀맛이다!
20대 초반부터 40대중반까지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QT note를 썼었다. 그런데 40대 중반부터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고, 일이 바빠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게을러져서 QT note를 잘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걸 두주전부터 다시 시작하고 나니 생각을 잘 정리하기에 아주 좋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본문 묵상하고 하는 정도보다는 살짝 본문 공부수준으로 들어가게되는데, 내겐 이게 참 도움도 되고, 오히려 감동도 있다. (흔히 QT 강의하시는 분들은 QT는 성경공부 아니라고 강조를 많이 하시는데, 나는 QT시간에 본문을 조금 더 공부하는게 훨씬 더 도움이된다.)

특히 마가복음 13장 성전파괴 예언은 정말 어려운 본문인데, 이건 아예 작정하고 주석도 찾아보고, 인터넷에서 강의등도 찾아보니…아, 이걸 내가 이렇게 잘 모르고 있었구나 싶어서 민망할 정도였다.

앞으로 두어달 정도는 이렇게 work from home을 하게 될 것 같은데, 다시 QT note 쓰기를 부활시키겠다는 결심에 차 있다.

기독교의 발흥 (1)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듯이 최근 기독교의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를 읽고 있다.
오랜만에 읽는 번역서여서 살짝 초반에 좀 고생을 했지만, 일단 발동이 걸리니 그래도 좀 읽을만하다.

아직은 초반 몇장밖에 읽지 못했지만, 이거 정말 완전히 내 취향의 책이다!
영어책의 부제는 “How the Obscure, Marginal Jesus Movement Became the Dominant Religious Force in the Western World in a Few Centuries”인데 아주 적절하다.

이 책은 3세기 정도까지 기독교가 어떻게 그렇게 융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사회학적 가설도 세우고, 그 가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도 제시하고, 또 자신이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도 이야기하기도 한다.

거의 매 챕터마다, 아… 내가 생각했던것과 정말 다르구나… 그런데 읽어보니 정말 그렇구나… 싶은 내용들이 많이 넘쳐난다.

보나마나 꾸준히 속도를 내서 읽기 어려울테니, 그리고 읽다가 중간중간 더 공부도 해야할 것 같고 해서, 이거 다 읽으려면 2~3주는 걸리지 않을까 싶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확~ 하고 깨닫게되거나 더 알게되거나 생각할 거리가 던져진 것들을 좀 여기에 종종 써보려 한다.

No April Fool’s Joke

우리회사에서는 매년 꽤 재미있는 만우절 장난을 쳐왔다.
대외적으로도 그렇지만 회사내의 website에서도.

이 블로그에서도 4월 1일에는 만우절 장난을 치곤 했었다.

금년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회사에서도 만우절 event를 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만우절 장난을 칠 기분이 아니기도 하고.

재미있는 만우절 농담을하면서 서로 장난을 치는 것을 그리워함도, 이런 상황을 이겨내게하는 힘이되기도 하는 것 같다.

번역서 읽기

사실 다른 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어본지가 매우 오래 되었다.
최근에는 주로 영어로 된 책을 읽거나, 영어 오디오북을 사서 운전하면서 들었고, 한국 저자가 쓴 한국말로 된 책은 지난 1년동안 1~2권정도도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영어를 잘해서 그러는건 아니고, 영어책을 구하는게 훨씬 쉬워서 그렇다.
그리고 내가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잘 다룬 한국책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고.

지난 주말, 토요일 오후가 되었는데 어디 나가기도 어렵고, 비는 오고, 살짝 노곤하기도 하고.. 아내도 민우도 낮잠에 빠져있고…

작년 코스타에서 사놓고 읽지 않았던 한권을 뽑아 들어 읽기로 결심했다.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의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

그렇게 두꺼운 책은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닌 것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허걱… 이거 읽는게 장난이 아니다. 중간중간에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해놓은 단어들을 이해하는 것도 무지하게 힘들고, 문장도 탁탁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아, 이게 영어로는 어떻게 쓰인걸까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영어로 변역을 해가며 읽었다. 그러니 읽는 속도도 무지하게 느리고.

아, 난 영어도 잘 못하는데, 한국어도 잘 읽지 못하게 된 것같아 완전 씁쓸하다…-.-;

그래도 일단 집어 들은거, 그냥한번 노력을 더 해볼 생각이긴 하다.
특히 4장에 가면 역병, 개종, 네트워크 라는 제목인데…. 여기서 초대교인들이 epidemic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는 것을 살짝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