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종교 (4)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신 구원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달려갈 길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고 그걸 계속 뇌되이면서 그냥 그자리에 앉아있는 그림이 아니라,
목표를 행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그림이 성경에 그려져 있다.

그런데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로만 이해하면,
자칫 그렇게 끊임없이 목표를 행해가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내가 끊어야하는 내 안에 있는 죄의 문제와 싸워야하는데,
그냥 내가 약하다는 이유로 타협해버리거나 심지어는 후퇴하기까지 하는 거다.

아… 나는 너무 사랑이 없어, 나는 너무 사랑이 없어… 그렇게 반복해서 되뇌이면서,
막상 그 사랑없음과 어떻게 싸우는 모습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랑이 없으니까 그건 못하는 거야… 나는 그런 면에서 약한거야..
그러면서 주저앉아버리고, 그리고 결국은 뒤로 drift away해가는 것이다.

그냥 하면되는데, 그걸 안하고 자신이 약하다는 핑게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이 너무 많이 나타난다.

약자의 종교 (3)

기독교를 이렇게 약자의 종교로 이해하면, 그러나, 몇가지 문제들이 생긴다.

우선, 약함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칭송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기독교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승리, 권능, 영광등에 대한 찬사가 넘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고 그것을 추구하기도 한다.
다만, 그런 승리와 힘과 영광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주어지거나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늘 그 백성들을 ‘찬란한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약함으로인해 받았던 서러움을 ‘신원’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약함과 그로인해 겪는 어려움은 궁극적으로 극복해야할 상태라고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약함을 너무 쉽게 후다닥 해결하려고 달려드는 것에대해 기독교/성경에서는 반복해서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자칫 하나님 없는 평화를 추구하는 ‘우상’으로 귀결되거나 지나치게 단기적인 승리를 추구하는 승리주의와 같은 모습으로 왜곡되기 쉽다.

그러나 약함이 궁극적으로 머무를 지점은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성경에서는 매우 신비로우면서도 역설적인 방법을통해 그 약함이 결국은 극복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약자의 종교 (2)

기독교가 약자의 종교라는 근거는 성경에서 매우 다양하게 발견된다.

우선, 하나님께서 주로 소통하시는 사람들이 약자였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세계사의 파워의 관점으로 보면 상당히 찌질한(?) 민족이었다. 아주 좁디좁은 땅에서 강대국 사이에 끼어 빌빌대는 시간을 길~게 보내다가 강대국에 의해 멸망/지배 당하고 계속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뭔가를 해주시기를 기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도 약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피지배민족의 가난한 지역에서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성장하셨다.
그리고 약자의 모습으로 무력하게 처형당하셨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바울은 약한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약할때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통해서 그 사람을 만나주시는 일들을 흔히 여러 간증을 통해서 많이 듣는다.

나는 이것들이 모두 다 옳고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으로보면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인 것 같아 보인다.

약자의 종교 (1)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일까?
아마 5년전쯤에 내게 누가 이 질문을 했다면 나는 100%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내 대답이 훨씬 더 불분명할것 같다.

여전히 나는 기독교가 약자에 대한 최고의 compasison을 가진 종교라고 생각을 하지만,
기독교의 주체가 약자일까, 기독교가 그리는 이상적 인간형이 약자일까 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엇갈린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요즘은 기독교가 그리는 이상적 인간형은 대단히 ‘강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로만 이해했을때 생기는 모순들과 현실적인 문제들이 분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기독교가 약자의 종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논의의 의도 자체가 치우쳐져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독교의 더 큰 관심은 약자 vs. 강자의 구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번의 글을 통해서 요즘 내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려고 한다.

Switching modes?

회사에서 일을 할때는 완전 초 집중 상태로 무지막지한 압박감에 시달리며 죽어라고 일을 하곤 한다.
동시에 몇개의 일을 해야할때도 많고, 식사를 거르기고 하고, 때로는 식사시간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과 식사를 잡아서 먹으면서 일을 하기도 한다.

최고의 speed로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회사도, 팀도, 나도, 살아남지 못하는 환경이기도 하지만,
그런 환경속에서 계속 살다보니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그렇게 바뀌어버린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속에서 버벅거리고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거나 자기에게 맡긴 것을 제때 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정말 완전 민폐다.
대개의 경우 그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회사에서 나가게 (짤리게?) 된다.
그야말로 죽어라고 달리지 않으면 도태되는 구조다.

회사에서는 정말 그렇게 효율적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tolerance가 거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모두가 공멸하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온 세상이 그렇게만 돌아간다면, 정말 얼마나 빡빡한 세상일까?
약자에대한 배려도, 뒤떨어진 사람에대한 공감도 없이, 그저 능력과 결과만을 바탕으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회사에서 그렇게 최고의 효율을 내기위해 죽어라고 일하면서는, 정말 그 회사에서 버벅거리면서 잘 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을 갖는 일이 참 어렵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마음 가짐으로 하루 10시간씩을 보내다보면,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효율성, 성과를 중심으로 재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왜 이 사람은 이 정도의 일도 못해내는 걸까?
아니, 이 사람은 왜 이 정도의 생각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냥 ‘답답함’만이 가득 쌓여서 내 환경에 대한 불만을 잔뜩 가지고 살게된다.

한동안은,
내가 회사에서는 그렇게 일하더라도, 일단 회사 문밖을 나오면 뭔가 모드 전환을 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다.
회사에서와 같이 삶을 그렇게 빡빡하게 살지는 말아야 하겠다고.

그러나 요즘 더 많이 하는 생각은,
회사에서 그렇게 빡빡하게 하는 것 자체에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회사일을 확 slow down해서 일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compassion, tolerance를 가지고 일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회사문을 나오면서 모드 전환을 하지 않고, 회사 안밖에서 늘 겸손하면서도 너그러운 자세를 유지하는 것.

여러가지로… 은혜에 대한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삶의 리듬을 찾기

지난 7월경부터 한달에 한번꼴로 유럽에 다녀왔다.
한번에 가면 짧게는 한주, 길게는 두주조금 안되게 다녀왔다.

가만히 계산을 해보니,
내가 내 전체 시간의 거의 25%를 유럽에서 보낸거다!

그리고, 가서 시차때문에 헤매고, 다녀와서 시차때문에 헤매는 걸 다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내 시간의 거의 40~50%는 시차적응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출장을 가면 대개 새벽에 호텔에서 나가서, 저녁 8~9시에나 돌아오고, 그때부터 다시 california office와 각종 conference call들을 하게 되기 때문에,
거의 극한의 경험을 하게된다.

최근 계속 삶이 이렇다보니 삶의 리듬이 많이 깨져있다.

아침에 말씀묵상하는 것이나 정기적으로 짧게 기도하는 것,
따로 경건서적을 읽는 것등도 완전 엉망이 되었다.

이게 참 신기한게…
이것들이 깨지니, 전반적인 내 영적 컨디션 자체가 영 별로다.
소위 ‘옛사람의 성품’이 자꾸만 나오고 있다. -.-;

내 영혼을 관리하는 일에 잠깐만 소홀하면 이렇게 금방 영혼의 밭에 잡초가 자라고 쭉정이가 생긴다.

나는 유난히 품질이 나쁜 영혼을 관리하면서 사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번에 독일에 오면서는 파리 공항에서 layover를 했다.
시간이 좀 충분하면 시간을 내어서 파리 시내에 나갔다 왔으면 좋았겠지만 layover 시간이 애매하게 4시간이어서, 시내로 나갔다 올만한 시간이 되질 않았다.

시내까지 나가는데 1시간, 다시 돌아오는데 1시간, 공항 나가는데 30분, 공항에 2시간 전에 도착해야 하니까, 4.5시간이 있으면 아무것도 구경하지 않고 나갔다 올 시간이 되는거다.

그러니 그냥 공항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파리 하면 뭔가 예쁘고 화려할 것 같은데,
공항은 정말 꽝이였다. ^^
별로 할것도 없고, 공항에서 뭔가 멋진 음식을 먹을 것도 없고, 예쁘지도 않고.

나는 프랑스에 가본적이 없지만,
당연히 파리 공항만 보고 프랑스가 그런거야 라고 판단하면 안될일이다.

일을 하면서도,
이 분야에 10년, 20년씩 일을 했다는 사람이 detail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완전 황당하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결심을 하는게 늘 건강한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럴땐 그런 결심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회사일도 그렇고 기독교 미니스트리도 그렇고) 내게 축적된 경험이 되도록 일해야하겠다는 결심.
그래서 조금 더 열심해 해야겠다는 결심.

기도의 효용성

어제 출근길에 Tim Keller가 기도에대하여 개인적인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다.
Tim Keller가 O Hallesby의 “기도”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한 것.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재앙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도 없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이 얻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영혼은 기도 없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때 그것을 겸손히 받아들이며 감사할만한 바탕을 가지지 못했다.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오 할레스비의 기도는 내가 대학교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30년쯤 전에 읽은 것인데…
아… 이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오 할레스비의 기도 책 내용 자체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일부터 또 시작되는 독일 출장을 앞두고,
내 킨들에 O Hallesby의 Prayer를 담았다. 비행기안에서 열심히 읽어야겠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기

요즘 한달에 한번, 더 짧게는 3주에 한번 꼴로 유럽에 가고 있다.
대개는 집에서 Lyft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그러면 대개 Lyft driver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된다.

Lyft driver: 어디가니?
나: 프랑크푸르트 간다.
Lyft driver: 놀러가니, 아니면 일하러 가니?
나: 일하러 간다.
Lyft driver: 좋겠다.
나: ……

보통 3명의 한명꼴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예전에는 속으로 ‘네가 이렇게 출장가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내가 지금 얼마나 부담되는줄 아니?’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난달부터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어쨌든 어떤 사람들은 나 처럼 이렇게 하는걸 부러워하는게 사실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멀리 출장가보고 싶어하지 않는가.
혹시 나는 감사해야하는 건데 그냥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툴툴거리고 있는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출장만 그런건 아닐거다.
내가 당연하게 누리는, 그래서 마음 속으로부터 어떤 감사가 사라져버린 것들 중에서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텐데.

이번 주말엔 또 비행기를 탄다.
의지적으로 감사할 계획이다.

문득 살짝 등골이 오싹

요즘 주말엔 거의 완전 쓰러져서 쉬는 수준으로 보내고 있다.
주중에 워낙 시달리고 있기도 하고, 거의 내내 끊임없이 시차적응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런데 주말에 문득,
달란트 비유가 생각이 났다. (왜 그랬을까?)

그러면서 든 생각.
나는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던져서 그렇게 살고 있나?

문득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러면서 등골이 오싹!

내 삶의 우선 순위와 방향을 다시 좀 잘 점검해봐야 할것 같다.
다녀오는 thanksgiving에는 그렇게 좀 많이 생각해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