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묵상 (3)

성탄의 의미가 정말 깊게 마음에 담기려면,
우선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대한 깊은 애곡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분이 다시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는 걸까 하는 간절한 고대.

마카비 혁명도 실패로 돌아가고, 로마의 통치가 계속 되고 있고, 그 와중에 헤롯이라는 미치광이가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상황.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 헌신이 소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열심당원들은 폭력에 의한 해방을 꿈꾸는 와중에,
그저 이제는 그런 고상한 꿈 다 버리고 현실에 타협해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승승장구 하는 세상.
그래서 사회적 정의도, 개인적 소망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도 모두 엉켜버린 실타래와같이 되어버린 상황.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 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상황을 잘 곱씹어 보면,
이렇게 가슴이 턱 막히는 막막함이 전반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의 어려움, 잃어버림에 대한 자각을 통해,
1세기 유대지방의 상황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보아야 성탄의 의미가 잘 새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탄 묵상 (2)

그래서 나는 모닥불이 평화롭게 타고 있고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화기애애하게 사람들이 둘러앉아있는 성탄의 모습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늘씬한 몸매를 가진 젊은 여자가 빨간색 미니스커트에 싼타 모자를 쓰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멋진 춤을 추는 모습이 너무나도 shallow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성탄은 그저 잠깐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날이라며 의례적으로 시간을 내어 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하는 행동에 무엇인가 빠져있다고 느낀다.

성탄의 핵심 메시지는,
심하게 망가져 있는 세상,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애곡함, 그 와중에 너무나도 찌질한 모습으로 오신 평화의 왕, 그런 말도 안되는 그림이 희망이 된다는 아이러니…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성탄에 듣기 참 좋아하는 성탄음악이 O Come O Come Immanuel이다.

나는 성탄에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는 tone은 이곡에서 나타난 tone이 되어야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기뻐하는게 뭔가 어색해보이는데, 그냥 보기엔 그렇게 기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기쁜 사건이 되는 역설이랄까.

성탄 묵상 (1)

나는 성탄시즌에 묵상하기 좋은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것에대한 간절함” 혹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성탄은, 기본적으로 구원자가 이 땅에 온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 성경에 나와있는 그 사건에 대한 기술들은 꽤나 음침하다.

예수님께서는 십대 여자아이가 자기 의사와 관련없이 임신하게되어 태어나게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십대 여자아이는 예전에 꿈꾸었을지도 모를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더 이상 꿈꾸어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즌에 헤롯이라는 미치광이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몰살당한다.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사건 때문에 한 마을 전역에서 통곡소리가 나게 되었다.

말구유라는 구질구질한 환경에서 태어나신 ‘평화의 왕’을 제대로 영접한 것은 목동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사회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왕을 영접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렇게 찌질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성탄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청나게 어그러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너무 망가져 있어서…
그냥 화려한, 혹은 멜랑콜리한, 혹은 고결한 방식의 soft-landing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거다.

어쩌면 가장 세상권력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그래서 가장 soft-landing에 가까운 방식으로 오셨음에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시즌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분이 고치러오신 그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하는 것이 더 드러나는 방식으로 성경은 성육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나부코 – 포로들의 합창

지난 두어주동안 하루에도 아마도 열번씩은 이 음악을 듣고 있다.

이 곡은, 히브리 포로/노예들이 바빌론에 끌려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성탄이 가까워오면서,
이런곡이 성탄의 의미를 마음에 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약자의 종교 (10)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일은,
그 삶의 목적성을 찾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 목적성은 그 자신을 뛰어넘는 큰 목표가 설정될때 제대로 드러난다.
적어도 기독교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일들이 일어나는데 큰 장애가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가진 ‘약함’이다.
그런데 그 약함은 약함을 긍정함으로써 비로서 극복해나가는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때로 그 여정은 매우 길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여정이 향하는 방향은 약함에 머무름이 아니라는 것이 이번 내 글의 주장이다.

그리고 약함에 머무르는 것은 삶에서 목표를 찾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어렵다.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독교는 ‘약함’을 열등한 것으로 낮추어버리지 않는 매우 드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 약함을 너머서 궁극적 영광에 이르는 큰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는 아니다.
그게 내 주장이다. ^^

약자의 종교 (9)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약자됨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강함과 약함의 개념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진정한 의미의 강함을 갖게되는 새로운, 그리고 역설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약함이다.
약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이다. – 십자가가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사람의 약함과 강함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골고루 주어진다는 것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혁명적 선언이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역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약함은 하나님에게 다가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약함은 약함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서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인 영광스러움이 다가가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이 한시적으로 그 사람의 약함에 그저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더 제대로 대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과정이다.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약자의 종교 (8)

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therapeutic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 복음안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받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역시 그랬고)

그렇지만 그런 therapeutic한 성격의 기독교는 그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과 도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정말 너무 많이 상처를 받고 약해져 있어서 많은 돌봄과 치유가 필요할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안고 있는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이외의 다른 것을 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모두 그 단계에 묶어놓고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이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장이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목적이다.
therapy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약자의 종교 (7)

나는 MBTI나 애니어그램등의 성격분석방법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 유용성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그런 tool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유익을 얻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tool들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그런 방법들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약점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한다.

가령…
나는 애니어그램 9번이기 때문에 내가 게으른건 어쩔 수 없어.
나는 EJFP이기 때문에 내가 쇼핑을 할때 충동구매를 하는건 당연한거야..
와 같은 방식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그런 약점들이 있다.
그리고 강점들도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강점들을 잘 활용하고 약점들과 계속 싸워가며, 그것들을 극복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에는 분명히 그런 약점들과 싸우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

약자의 종교 (6)

신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risk taking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기독교 신앙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발을 들여놓는 것.
불확실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는 것.
나자신이 가지는 불안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로 극복하는 것.
내가 편하게여기는 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길을 가는 것.

이렇게 risk taking을 하는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를 갖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딛고 일어서서 강함의 위치로 옮겨가는 행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자신의 약한 모습에 머룰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기독교적이지도 한다.

약자의 종교 (5)

나는 결국 각자가 자신을 책임져야한다는 원론적 우파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사회,문화,시대,상황,제도의 탓이라고 이야기하는 주장에도 동의할수는 없다.

기독교를 약자의 종교로 이해하는 어떤 사람들은,
상황이 힘든걸 어떻게 하느냐, 시대가 어려운데 어떻게 하느냐,
심지어는 나는 기질이 그런걸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는 단기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두려움등에 짓눌려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몇년이 지나도 조금도 그분의 성품을 닮은 일에 그 사람에게 진보가 없다면 그 안에 정말 생명이 있는냐는 질문을 해보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네가 예수를 믿었으니 세상을 바꾸어라라는 차원에서 힘을내라고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네가 예수를 믿었으니 네 자신이 바뀌어야한다는 차원에서 힘을 내라고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그점에서는 어떤 진보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약함이 괜찮다는 약함에 대한 긍정만으로는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