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살아가다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나보다  어른이거나, 나를 감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나보다 미숙한 사람이다.
혹은, 분명히 나보다 현저하게 미숙한데 계속해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과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점점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때로 ‘어른’의 위치에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돌보는 사람들이 나에데하여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점검해보게 된다.

더 어렸을 때에는…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이젠 그런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내가 성숙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동역을 하거나, 사역을 하거나, 그냥 함께 생활을 하거나…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누가 되었건 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미숙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때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을 해서 내어 놓을 때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숙함을 깊이 감안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함께 비이성적/감정적이 되는 오류를 많은 경우 피할 수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해서 내어 놓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내 미숙함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스스로 인정하고,

미숙함이 또 다른 미숙함을 낳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또한 내가 스스로 빠지기 쉬운 착각은,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경우,

내 비뚤어진 성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내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여 멈추지 말아야할 성화에의 노력을 그치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하고,

나의 작은 인격에의 열매를 크게 과장해서 보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내가 이땅에 사는 한,

나의 이러한 미숙함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미숙함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할수도 있겠지만,

날마다 조금씩, 내 안에서 이 모든 미숙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넉넉함이 성령 안에서 키워지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의 많은 미숙함들을,

내 삶으로 감당하여 지고 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정말,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위해서 요즘 참 많이 노력중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끼고, 줄이고, 절제하고…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들으려 하는데…

얼마나 내가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참 많이 경험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즈음 정말 하나님께 적게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데…

내가 말을 적게하면, 하나님께서 적게 말씀 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껏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은,

결국…

내 생각(말) 이었던 것은 아닐까.

말씀이 무겁다…

요즈음은,

말씀이 매우 무겁다.

이전엔,

말씀을 묵상하면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달콤함을 즐기면서 후루룩 먹는 재미를 즐기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즈음엔,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한약 보름치를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씀의 작은 passage에 담긴 뜻의 실존적 의미를 내 삶에서 찾아내는 작업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만큼,

말씀이 내게 무겁다.

내 삶의 기준과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가볍고 볼품 없었음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나라 백성 다움을 내 삶에 갖추는 것에 관한한,

난 참 slow learner 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정말 내 삶을 다 쏟아내어서…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 다움을 온전히 이루며 살고싶은 목마름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커지기만 한다.

너무…너무… 목이 마르다.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내면적 성전, 외면적 성전

오늘 성경공부 중에서 내면적 (보이지 않는) 성전과 외면적 (보이는) 성전의 비교가 계속 제 마음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요.

요즈음은 자꾸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외형적 성전’, ‘율법’ 등등을 주셨을까.
그 수많은 종교적 규례를, 따라야할 법칙들, 하나님의 뜻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과 예식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깨고자 그리도 노력하셨건만 결국 그것을 깨시지 못하시고 그 많은 종교적 규례들에 의해 오히려 accuse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아니..
도대체 왜 그리 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종교적 규례들을 그리도 두셨을까.

요즈음 자꾸 드는 생각은요,
교육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천년의 시간을 두고서 끊임없이 성전, 제사, 율법 등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는 거지요.
가령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면서, 내 수입과 재산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계속 상기하고 그렇게 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가 복음의 생명성을 죽이는 주범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 지나친 반형식론적 입장을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예배로 마음으로 드리는게 중요하지, 주일 예배라는 형식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십일조도 내 소유의 전체가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십일조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기도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커다란 교.만. 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요즈음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형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예배가 제 살을 지배하는 사람도 아니고,
십일조라는 형식을 무시할만큼 제 재물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도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더 엄하게, 많은 rule들에 의해 control하지만
그 아이가 장성해 감에 따라 밤 귀가 시간도 점점 늦추어 주고,
때로는 부모의 credit card를 쓰게 허락해주기도 하고,
일정 나이가 지나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도 허락하는 것 처럼…

어쩌면 제 신앙의 성숙(?)에 따라 때로는 불필요해보이는 형식을 제게 일부러 덧씌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도 그것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을 했었습니다.

글쎄요…
정말 어떤 의미에선… 이젠 ‘짬밥’도 늘어서…
제가 배운대로 혹은 성경대로 설교가 되지 않으면 설교 자체에 귀를 닫아버리고…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 시간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뒤엎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말 빌립보서의 말씀 글자 그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것을 뼈속 깊이 새기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네요.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오래 참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온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여러가지로 보아…
적어도 제겐 아직은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외면적 성전’이 때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4년 1월,
http://www.gatebiblestudy.org 보드에 쓴 글

성전미문의 거지

오늘 QT 본문은 사도행전 3장 전반부.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는 이야기.

그런데,
정말 graduate student 로서의 내가 성전 미문의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지도교수며, 우리 분야의 다른 사람등) 나를 바라보며 지나갈 때,
어떻게든 그 사람들의 attention을 끌어보려고 애쓰는…
좋은 논문을 쓴다, 학회에서 좋은 발표를 한다, 결과를 잘 낸다…. 하는 등의 framework에 가두어져서…

성전 미문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던 앉은뱅이 거지,
논문도 쓰고 학회 발표도 하면서 이 분야의 잘 나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내 결과를 좀 봐주세요’ 하고 애걸하는 권오승.

성전 미문 거지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좀 더 받아 볼까 하는 것,
대학원생으로서의 내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명예/돈을 더 받아볼까 하는 것.

그렇지만,
성전 미문의 거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었듯이,
내게도 정말 필요한 것은 ‘논문 몇편, 사람들의 관심사, 좋은 결과’ 등등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 미문의 거지 신세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건데, 그래서 거지가 할 수 있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일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겨우 사람들의 관심이나 더 끌어보겠다고 버둥버둥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씀 묵상을 하고….
지도교수를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오늘 엄청 깨졌다. ^^ 그러니 금방 엄청 비참해 지더군.

정말 나는 아직 먼 것같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

Sometimes it’s slow going, but there is knowing
that someday perfect I will be.~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Jesus is changing me.
Oh Yes He’s chaning me

2003년 9월

몇가지 묵상

1993. 11.
몇가지 묵상들…
권 오 승

– 모세는 살인을 범한 살인범이었다. 그때문에 그는 도망할수 밖에 없었다. 분명 젊은 날에 범한 잘못은 상당기간 그를 자책감에 빠지게 하였을 수도 있고, 스스로에 대해 실망을 하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모세가 그때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양을 치다가 시내산에 이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시내산에 이르지 않았던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내가 범한 크고 작은 실수들… 분명 하나님은 그런 구질구질한 것들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야곱의 장인 라반은 아주 악독한 사람이었다. 야곱을 속여 자기의 두 딸을 다 떠넘기고 야곱의 사랑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아마 야곱도 그러한 라반을 좋아했을것 같지는 않다. 아니, 무척 싫어하고 증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을
위해서’ 성실히 일했다. 그는 라반의 양들을 철저하게 위험으로부터 지켜내었고, 자신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일로 양을 잃었다
할지라도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서 잃어버린 양을 보충했다. 그러한 야곱의 덕택으로 라반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직장 상사는 내게 라반과 같이 악독하지도 않다. 또 나와 함께 일했던 학교 실험실 선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나는 야곱처럼
열심히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저 내 욕심만 채우고 아슬아슬하게 내 책임만 다 했을 뿐이다. 아니, 더 많은 때에는
그것도 못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실수하여 힘을 잃고 피곤하여 지칠 때
자신에게 실망하여 기운을 잃고 말 때
반복되는 잘못에 고개가 떨궈질 때
더이상 기도마저 드릴 자신이 없을 때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연약한 존재로
지으셔서 나를 낙망케 하시나요

내가 네안에 착한 일을 시작했노라 또한 내가 이루리라
너의 영혼, 낙망치말고 나를 바라라
내가 아름답게 하리라…

이제 가을이 되었다. 이 가을에 한번 더 들어보고 묵상해보고싶은 찬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