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력을 잃어버린 리더는,
자기살을 뜯어먹는 맹수와도 같다.
Category Archives: 긴 생각, 짧은 글
내가 알지 못하던 한국
나는,
내가 미국에 있기 때문에 한국 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어떤 면을 더 잘 보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교만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사실일까 하는 의문을 많이 갖게 된다.
나는, 한국을 정말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미국에 살고있는 한국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정체성과
내가 조국에 대하여, 조국 교회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내가 내 조국을 얼마나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의(?)가 몰려오고 있다.
저 한국 왔다가… 그냥… 많은 분들 못만나고 갑니다~ -.-;
제가 한국에 지금 있습니다.
그런데 회사 출장관계로 와 있어… 회사일로 짜여진 일들을 하다보니 한국에서 만나고 싶은 많은 분들을 만나지 못하고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께 연락조차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가 한국에 계신 제 동지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건 절대로 아닌데….
갑자기 글들이 뜬구름 잡는 것 같아졌다?
갑자기 내 블로그의 글들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로 채워졌다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그렇다.
내가 내 내면의 생각들을 깊이 정리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풀어낼 용기와 힘이 좀 달리는 느낌이다.
아마 다음주, 혹은 그 다음주 쯤 되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20대의 나, 40대의 나
20대에
내가 꿈꾸었던 나의 모습,
내가 꿈꾸었던 한국교회의 모습,
내가 꿈꾸었던 세상의 모습…
40대가되어 이제 바라보면서…
한편 20대의 꿈이 얼마나 shallow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보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20대의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게 되기도 한다.
건너온 다리를 의지적으로 끊기
때로는,
지난 세월을 생각하며,
내가 이미 내린 결정을 다시 곱씹으며…
만일 내가 그때 그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는 것이 좋을수도 있다.
말하자면,
내가 건너온 다리를 의지적으로 끊어버리고,
앞으로 갈 길을 성실하고도 부지런히 가는 것이다.
나도…
때때로 뒤를 돌아보며…
what if…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건강하지 못한 뒤돌아봄이 아닐까 싶다.
공돌이
내가 소외 ‘공돌이’의 길로 들어선 것이…
85년부터라고 할 수 있으니까 벌써 25년째.
공돌이로 살았던 시기가,
공돌이가 아닌 사람으로 살았던 시기보다 훨씬 더 길다.
대학때,
과연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를 찾지못해 몹시 괴로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일까 하는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던가.
어떤 해답이 없을 것 같은 막막함에… 어떤 순간 괴로움 속에 절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그저 그 의미를 찾을 것에 대한 기대를 버렸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 1-2년새,
그것이 급속히 나의 내면 속에서 정리되어가고 있다.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 오랜세월 공돌이로 살며 그 의미에 대한 clue를 이제야 조금 발견을 하다니.
최근 몇주간…
최근 한 두어달은,
거의 매주 성경공부 전체모임에서 message를 했어야 했다.
사도행전 못다한 이야기라는 시리즈로 했는데…
우리 형제들이 내 message를 녹음해서 주어서…
최근 쭉 한번 다시 들어보았다.
아아…
세상에…
완전히…
부끄럽다!
세상이 이런걸 무슨…
삶의 목표는,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데 있지 않다.
Life is not about maximum utilization of one’s talent,
Life is about loving God, loving people.
최근,
함께한 어느 성경공부 그룹에서, 학생들과 나눈 말이다.
삶의 목표는, 내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최근 몇년간 참 여러 방법으로 이 말을 곱씹고 있다.
피상성을 접하면서 느끼는 frustration
피상성(superficiality)는 우리 시대의 저주이다. – 리차드 포스터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 나를 포함하여 – 피상성이라는 깊은 질병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피상성은,
이제 학교를 갓 졸업한 엔지니어가 현장에서 10년동안 일해온 베테랑을 보고
“나도 저만큼 알고 있으므로 나도 저와 같은 레벨의 사람이야”
라고 착각하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한번도 성경공부를 인도해보지 않은 사람이 겨우 성경의 기초만을 알고난 후
“이제 나는 성경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누구든 만나면 그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내게 있어”
라고 착각하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한번도 리더로서 섬겨보지 않은 사람이
자기 주변의 리더에게 리더쉽에 대하여 훈계와 충고를 늘어놓은 모습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자신이 이해한 아주 좁은 영역의 진리로 진리 전체를 설명하려는 무모함에서 발견된다.
(혹은, 큰 진리를 자신이 이해한 좁은 설명으로 환원(reduce)하려는 무모함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자신의 짧은 사고의 전개가,
다른 이의 실존적 경험보다 무조건 우선한다는 교만함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내 눈의 들보를 보지못한 채, 다른이 눈의 티끌을 찾아내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피상성은,
내 자신에게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