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엔진?

사람들은, 따르고 싶은, 본받고 싶은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사상, 논리, 지식등을 많이 배우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어느정도 그 목표를 이루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엔진’과 같은 부분은,
그 사람의 지식이나 사상등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도가 아닐까 싶다.

어떤 사람의 기도를 닮지 않고 그를 닮으려는 시도는,
자동차를 모방해서 만들면서 같은 모양과 색깔의 껍데기를 갖추면서도 엔진에 신경쓰지 않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싶다.

기도를 통해 어떤 이가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demonstration인것 같다.

Johannine Corpus

연초에 요한일서 말씀묵상을 했고,
또 올해 KOSTA 집회를 준비하면서 요한일서로 주제 묵상을 좀 하고 있는데다,
최근에는 QT 본문이 요한계시록이어서,
요한의 저작들(Johannine Corpus)를 금년에는 유난히 많이 접하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reflection들이 있다.

1. 최근 1-2년동안 깊이 관심을 가졌던 공관복음이 그리고 있는 복음과 정말 많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꽤 자명한 것일수도 있지만, 정말 새롭게… 아… 다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ground-up 이라기보다는 to-down의 느낌이랄까.
귀납적이라기 보다는 연역적인 느낌이고,
어떤 의미에서, scale이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공관복음이나, 바울서신들이 어떤 case를 만들고 싶어한다면, 요한의 저작들은 선언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2. 내가 처음 복음을 접했을때 만났던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요한이 그리고 있던 복음에 가깝다.
그리고, 정말 내 깊은 곳에서 더 공명하는 내용도 역시 요한의 복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한다. 

3. 어쩌면… 정말 어쩌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더 공감되는 내용이,
공관복음적 접근, 바울 서신적 접근 보다는 요한의 저작에서 하는 접근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설익은 생각을 해본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현대에 정말 꼭 많이 읽혀져야하는 성경인 것 같다.
재림을 예비하기 위해서라던가, 거짓 재림 예언이 많아서라던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현대의 어떤 모습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억지주장 때문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computer, 바코드, 비자카드가 666이라던가, 불병거가 현대의 탱크나 미사일이라던가 하는등의 억지 해석은 이제 좀 제발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고 있는 제국에 대항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더 많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먼 듯 하다. 

절망이 깊어질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눈이 열려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엇보다도
변화되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답답해하고 절망하는 깊이가 충분히 깊어져야함을 생각해본다.

성경을 보면,
정말 그 진리의 말씀에 반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역사 속에서 보면,
정말 그 생명의 빛 앞에서 완전히 자신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왜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일들이 그토록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이토록 변화가 더딘 것일까.

깊은 절망 속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불어일으키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아직 내게는….
충분히 망가진 세상과 나에 대한 절망과 아픔이 채워지지 못한 것이 아닐까. 

동생의 생일

지난 일요일은 내 여동생의 생일이었다.

원래는 지난 주말즈음에 한국에 출장을 갈 계획이어서,
이번에 한국에 가면 오랜만에 동생 생일 축하를 할 수 있겠다 싶었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그 출장이 7월로 연기되면서 동생 생일 축하를 가까이에서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출장이 연기되면서 괜히 동생 생일도 연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가 이메일 하나 틱~ 날리고 생일축하하고 말았다.
생일날, 동생 생각하며 동생을 위해 기도 한번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게 못내 아쉽고 미안해서일까,
내 outlook calendar에는 여전히 ‘성연 생일’이라는 event가  “past due” 상태로 있다.
그걸 그냥 OK 단추 눌러서 닫아버리지 못하고 그게 뜰때 snooze 눌러 내 아쉬운 마음을 질질 끌고 있다.

동생도 뭐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내가 챙겨줘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만나면 뭐 살갑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동생 생일이 뭐 대수라고…

아마 7월 초 시카고에서 얼굴 한번 보고,
구박 한번 하고,
그러고 나서야…
snooze를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

신앙의 여러가지 개념들은,
이해된다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신앙이 논리의 과정으로 설명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논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과 (가볍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은혜, 사명, 인도하심, 성숙 등등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Glory)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perceive하지 않고는,
위의 내용들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막상 그리스도인들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란 참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영광에 대한 내 이해가 천박한 수준이기 때문이겠지만,
영광을 이해하지 않고도 신앙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의 수준,
하나님과 대면함이 없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인의 생각 등이 역시 그 이유가 되는 듯 하다.
 

15년만에 만난 후배

어제는,
15년만에 만난 대학 후배가 우리집에 와서 묵었다.
저녁을 먹고 길게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넘치던 대학원 시절,
학부생 1학년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며 모아서 성경공부를 만들었을때…
나 같은 사람하고라도 성경공부 하겠다고 함께 했던 착한 후배였다. ^^

이제는 30대 후반의 아이 아빠가 된 후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편 그 긴 세월을 보내면서 20년전 그 후배가 대학교 신입생일때 보여주었던 모습이 아직도 있는 것이 감사했고,
다른 한편 그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그 후배의 삶에 개입하셔서 여러가지로 만들어가신 모습이 감사했다.

시카고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오늘 아침에는 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그냥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무식한 일정을 잡았단다. 헐…

그 후배의 마음이 감사했고,
그 후배에게 좋은 선배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Beyond my comfort zone

최근에,
어찌어찌하다보니…
두가지 정도의 일을 놓고 기도하게 되었다.

하나는,
다니고 있는 미국 교회 내에서 한국어 소그룹을 시작하는 일이다.
아직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나와 우리 가족이 어떤 role을 play 해야 할지 고민중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기도중이다.

다른 하나는,
몇달전부터 우리동네 친구 하나가 (최근에 엄마가 된 ㅋㅋ)
San Francisco 지역에 있는 Asian American들을 위해서 영어 성경공부를 인도해달라고 집요하게 압박하고 있다. ^^
영어로 ‘사실’을 전하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이 있지만,
영어로 ‘heart’를 전하는 것이 영 자신이 없어서…
그 친구의 강력한 압박에도 지지부진 선뜻 답을 못해주고 있다.

뭔가… 밀린 숙제들을 쌓아놓고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

경쟁이 아닌 성취를 추구

민우가 학교에서 상장을 잔뜩 받아왔다. ^^

민우의 학교에서는 과목별로 잘한 학생들에게 상장을 주는 것 같다.
그래서 민우는, 전체 과목중에서 절반정도의 과목에서 상장을 받아왔다.

그런데,
민우 말에 따르면 민우보다 상장을 많이 받은 아이가 1명 더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민우는 ‘반에서 2등’을 한 것이다.
(그래봤자, 스무명 남짓한 반에서 2등한 것이므로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자랑으로 삼을 것도 아니다. ^^)

민우에게 많이 수고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고나서,
혹시 민우보다 더 잘한 친구에 대해서 샘이 나지는 않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랬더니 민우는,
아니…왜 그런게 샘이나느냐는 표정으로 오히려 나를 쳐다본다. -.-;

민우가 아주 어릴때부터 나의 소망은,
민우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내 소망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보였다!

그.런.데…
내가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니, 경쟁심이 없이 과연 세상에서 survive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 “1등”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한번 이야기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우는, 내 ‘거룩한 소망’대로 잘 커가고 있는데…
나는 그만큼 잘 커가고 있지 못한 듯 하다. -.-;
 

바쁘게 살다가 문득 그리운 친구들

바쁘게 지내다가, 
매우 stressful한 환경 속에 있다가,
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함께 떠오르면서 그 사람들과 다시 그런 시간을 갖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데…

네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그때 그 즐거움을 다시 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세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나를 깊게 만들었던 그 대화의 시간으로 다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진다.

두번째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고생을 했던 /고통을 나누었던사람들이다.
함께  고통스러워했던 그 시간에 서로 힘이 되어주었던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성숙해갔던 순간들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러나…
가장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깊이 기도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함께 하는 기도는, 즐거움과 소망과 깊은 대화와 고통을 나누는 것을 모두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우리를 ‘영광’에 집중하게 한다. 

함께 기도했던,
그러나 지금 내 곁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 문득 그립다. 

어제 들은 말 가운데에서…

어제 실험하면서 들은 어떤 설교 중에서 내가 깊이 마음으로 공감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부부가 되어 살면서, 자신의 뜻을 꺾어 배우자에게 순종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설교에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뜻과 자존심과 생각을 꺾지 않으면, 좀 더 확대된 공동체 생활에서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내용도 따라왔다. 

어떤 부부는 좀 더 많이 다투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부부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부부 생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해야한다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였다.

TV 광고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지극히 피상적인 행복을 가정에서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 부터 벗어나,
부부 관계라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촉구의 내용이었다.
(이런 표현을 그 설교자께서 바로 쓰시지는 않았지만… 내 말로 좀 더 paraphrase 하자면… ^^)

나처럼…늘…
내 뜻을 꺾어 아내에게 순종하기 더딘 사람에게…
참으로 아픈 설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