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도 들어도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아무리 여러번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복음설교를 듣고 싶다.

복음을 사유화하지 않지만 개인화시켜주는,
구원의 즉각성과 점진성을 모두 보여주는,
짧고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 복음의 핵심과, 장대한 스케일로만 설명이 가능한 복음의 내러티브를 모두 담는,
처절한 죄의 본성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구원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의 개인적 측면과 공동체적 측면의 균형이 잡혀 있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복음 설교라면,
1만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텐데…

기도의 중독성

기도는 중독성이 있다.

무엇이 기도의 중독성을 만드는가?
건강한 기도는, 내 요구를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hopeless하고 helpless함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지속하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의존성과 친밀성이 길러지고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성은 내 hopeless하고 helpless한 상태를 더 깊이 드러낸다.

이것이 기도의 중독성의 mechanism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기도의 신비

나처럼 잘난척 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말 많이 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기도라는 주제를 만나면 늘 말이 딸린다.
기도의 그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내가 다 담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 기도의 신비가 더 깊게만 느껴진다.
나만의 공간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경험을 한다.

점심 먹는걸 까먹다~

어제는,
어찌어찌 하다보니 점심 먹는걸 깜빡 했다. -.-;

내가 점심먹는걸 깜빡할 정도로 배고픈것에 둔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침에 꽤 heavy한 meeting을 끝내고… 정말 정신없이 실험하고… 이것 저럭 처리할 일들을 하고… 사람 만나고… 또 다시 실험하고… 챙길거 몇개 챙기고…

그러다보니 4시 반쯤 되어서…
흠… 오늘은 왜 이렇게 배가 유난히 고플까…

그러다 문득 발견한,
내 가방에 삐져나와있는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허걱 내가 점심을 안먹었군 그래.

대개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잘 까여진 일정대로 매일 살기 때문에 당연히 점심먹는 것도 미리 짜여진 일정 속에서 소화하곤 하는데… 어제는 어째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내가 내 삶을 제대로 organize 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sign일까.

재물, 명예, 권력

내가 20대에
예수를 내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심하였을 즈음에,
나는 복음의 가치에 사로잡혀 거의 열병에 가까운 변화를 경험했었다.

그중 하나 생각했던 것이,
내 깊은 죄된 본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재물, 명예, 권력 세가지를 다 한꺼번에 가지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최대 2개까지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3가지중 2가지 까지는 함께 가져도 되지만, 세가지를 모두 함께 가지면 내가 반드시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내 생각은,
아마도 그 세가지중 한가지라도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대 1개까지만 괜찮다는 것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중 어느 하나도 가지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존경하던 신앙의 선배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고,
나 자신이 쉽게 경도되는 죄악된 모습을 봐서도 그렇고…
그것이 어떤 scale이던 간에, 권력, 명예, 부 세가지중 어느 두가지도 동시에 가지면 안되겠다는 것이 내 요즘 생각이다.

그것이 대단한 권력이나 명예나 부일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면 충분히 그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명한 설교자의 명예를 가진 목사님,
유명한 학자로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는 교수님,
자영업을 하면서 꽤 많은 돈을 모았고, 자신의 회사 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장로님,
자수성가로 어느정도 재산을 모았고, 가정에서 절대 권력자가 되어 있는 가장,
…

지금 나는,
어떤 권력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대단히 큰 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은 명예를 소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세가지 모두가 내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는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내가 가져야할, 내게 허용된,
혹은 내가 가지지 말아야 할, 내게 허용되지 않은,
그것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요즘 학생들의 눈으로 본, “복음, 민족, 땅끝”

지난 주말에는,
우리 지역의 조장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조장으로 섬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기도도 하는 참 좋은 모임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중에 참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80년대생들의 시각에서 본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에 대한 impression 이었다.

대체적으로,
너무 고리타분하고, 고루하고, 폭이 좁고, 나와 관련이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이번에 처음 조장으로 섬기는 코스타 집회에서 이런 주제였을까…
그런 하소연도 나왔다.

나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한, 유익한 대화였다.

Pray to be spent

어제 설교중에 나온 말.
정말 마음 깊이 공감하는 말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 재능, 경험, 재산, 시간, 열정, 체력, 선호, 기회, 환경 -을 다 집어넣고 사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내가 ‘reserve’에 남겨두고 사는 삶이 아니라…

아아…
정말 내가 살고싶은,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런 삶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와 같다”

내가 나름대로 여러 생각 속에서 정리한 것이다.

analogy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 나이가 30이 지나, 40이되도록 댄스가수를 하는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고,

– 대개 나이가 들면서 댄스 가수를 그만두는 것은, 체력이 달리거나, 시대의 빠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 그 수명이 매우 짧아서 반짝 하는 순간에 온 힘을 다해서 (무리가 된다 싶게) 그렇게 뛰어야 그 경험으로 나중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직접 댄스가수가 되는 것 보다는 댄스가수를 키우는 프로듀서나 기획사 사장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 바닥’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언젠가 이 블로그에 이 내용을 쓴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져보니 없었다.)

Singleness

현대에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신’으로서의 삶이 대안적 삶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야하는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Stanley Hauerwas가 그랬다고하던데… (어디에서 그랬는지는 잘 못찾았다. -.-;)
기독교가, 독신의 삶을 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인정한 최초의 세계관이었다고.

나야 물론…
독신이 아닌 삶을 감사하며 누리며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건강한 독신으로서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 나그네된 삶의 대안적 형태가 됨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소 뜬금 없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겠으나, 최근 몇개월 동안 몇개의 연결된 묵상중 일부이다. ^^)

QT로 양이 차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QT는 지난 20여년간 내 신앙생활을 지탱해온 중요한 축이었는데…

요즘은 그 QT가…
뭐랄까… 양에 차지 않는 느낌이다.

그리고 QT를 하면서 자꾸면 역사적 context등을 따지는 습관들이 나와서,
나 스스로를 당혹하게 만든다.

나의 이런 ‘증상’과 관련해서…
다음의 기사가 매우 눈에 띄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