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ine Corpus

연초에 요한일서 말씀묵상을 했고,
또 올해 KOSTA 집회를 준비하면서 요한일서로 주제 묵상을 좀 하고 있는데다,
최근에는 QT 본문이 요한계시록이어서,
요한의 저작들(Johannine Corpus)를 금년에는 유난히 많이 접하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reflection들이 있다.

1. 최근 1-2년동안 깊이 관심을 가졌던 공관복음이 그리고 있는 복음과 정말 많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꽤 자명한 것일수도 있지만, 정말 새롭게… 아… 다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ground-up 이라기보다는 to-down의 느낌이랄까.
귀납적이라기 보다는 연역적인 느낌이고,
어떤 의미에서, scale이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는다. 
뭐랄까… 공관복음이나, 바울서신들이 어떤 case를 만들고 싶어한다면, 요한의 저작들은 선언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2. 내가 처음 복음을 접했을때 만났던 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요한이 그리고 있던 복음에 가깝다.
그리고, 정말 내 깊은 곳에서 더 공명하는 내용도 역시 요한의 복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스치기도 한다. 

3. 어쩌면… 정말 어쩌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더 공감되는 내용이,
공관복음적 접근, 바울 서신적 접근 보다는 요한의 저작에서 하는 접근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설익은 생각을 해본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현대에 정말 꼭 많이 읽혀져야하는 성경인 것 같다.
재림을 예비하기 위해서라던가, 거짓 재림 예언이 많아서라던가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현대의 어떤 모습으로 해석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억지주장 때문도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computer, 바코드, 비자카드가 666이라던가, 불병거가 현대의 탱크나 미사일이라던가 하는등의 억지 해석은 이제 좀 제발 잠잠해졌으면 좋겠다. -.-;)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고 있는 제국에 대항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더 많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야할 길이 먼 듯 하다. 

절망이 깊어질때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눈이 열려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무엇보다도
변화되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답답해하고 절망하는 깊이가 충분히 깊어져야함을 생각해본다.

성경을 보면,
정말 그 진리의 말씀에 반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역사 속에서 보면,
정말 그 생명의 빛 앞에서 완전히 자신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왜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런 일들이 그토록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이토록 변화가 더딘 것일까.

깊은 절망 속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소망을 불어일으키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아직 내게는….
충분히 망가진 세상과 나에 대한 절망과 아픔이 채워지지 못한 것이 아닐까. 

동생의 생일

지난 일요일은 내 여동생의 생일이었다.

원래는 지난 주말즈음에 한국에 출장을 갈 계획이어서,
이번에 한국에 가면 오랜만에 동생 생일 축하를 할 수 있겠다 싶었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그 출장이 7월로 연기되면서 동생 생일 축하를 가까이에서 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출장이 연기되면서 괜히 동생 생일도 연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어찌어찌 하다가 이메일 하나 틱~ 날리고 생일축하하고 말았다.
생일날, 동생 생각하며 동생을 위해 기도 한번 못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그게 못내 아쉽고 미안해서일까,
내 outlook calendar에는 여전히 ‘성연 생일’이라는 event가  “past due” 상태로 있다.
그걸 그냥 OK 단추 눌러서 닫아버리지 못하고 그게 뜰때 snooze 눌러 내 아쉬운 마음을 질질 끌고 있다.

동생도 뭐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내가 챙겨줘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만나면 뭐 살갑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 동생 생일이 뭐 대수라고…

아마 7월 초 시카고에서 얼굴 한번 보고,
구박 한번 하고,
그러고 나서야…
snooze를 해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Growing up into Christ, Staff Edition – 5. 사람들을 징검다리 삼아 주님을 닮으십시오.

KOSTA를 섬기다보면, 참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현재 KOSTA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과거에 KOSTA를 섬겼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설’과 같이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저 존경이나 감동의 수준이 아니라, 경외감마저 들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KOSTA를 쓰시고 계시다는 중요한 sign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며 몇가지를 추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이렇게 존경할만한 분들중 ‘스타일’이 맞는 사람들을 찾아 그 사람을 따라해보도록 노력해보십시오.
저는 간사 초창기에는 어떤 선배님들의 말투조차도 따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때로 trial-and-error가 필요한 과정입니다.
따라하다보면 웬지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분들을 찾아서 따라해볼수도 있겠지요.

둘째, 그러나 그 존경하는 사람들의 ‘한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 사람의 성격이 약점이 될 수도 있고, 논리의 헛점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의 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두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 사람을 절대화하지 않게되고요, 두번째는 그 사람을 뛰어넘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세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무엇이 혹은 누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만들고 있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결국은 ‘무엇’은 복음이고, ‘누구’는 하나님이시겠지요.
그렇지만 너무 그렇게 쉬운 대답을 뽑아내기 전에, 좀더 깊이 관찰하고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우리는,
사람을 따르거나 닮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징검다리 삼아, 주님을 닮고 따르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KOSTA를 섬겼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숙시키셨던 것 이상으로,
아니, 적어도 KOSTA를 섬기면서 제가 성숙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지금 KOSTA를 섬기고 있는 우리 간사님들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성숙의 기쁨을 누리시면 참 좋겠습니다!

원래는, 총 8-9번 정도로 나누어 쓸 분량을 준비했습니다만,
글이 길어지면서 자꾸만 ‘늙은이 잔소리’와 같이 되는 것 같아,
일단 여기까지로 줄이려고 합니다.

간사님들을 알 수 있게 된건,
제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blessing 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Growing up into Christ, Staff Edition – 4. 삶 속에서 군살을 빼십시오.

새해 결심으로 ‘운동’을 일기장에 적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하루 20분 운동을 위해서는 총체적인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QT는 어떻습니까?
하루 20분 QT를 제대로 하려면 이것 역시 lifestyle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KOSTA를 섬기는데에도 그런 lifestyle의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 완전히 제 삶의 패턴이 바뀌어야만 했습니다.

자투리 시간까지도 알뜰하게 쓰고,
쓸데없이 web surfing 하는 시간이나,
시간을 많이 들이는 취미활동도 접어야 할수도 있습니다.

내가 꽤 essential 하다고 생각했던 내 삶의 요소를 단순화 시키는 일이 아마도 필요할 것입니다.

취미활동, 여가활동 등이 물론 죄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KOSTA를 섬기는 데에는 때로 그런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 조차도 포기해야 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요?

이런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치면,
삶이 매우 건강해 집니다.
삶 속에서 ‘군살’이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관리를 하는데 있어서 참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이런 과정을 많이 반복하면, 정말 ‘시간관리의 달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과정은 물론 고통스럽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정말 많이 바빠서 힘이 들때,
이를 악물고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견디어 보십시오.

정말 시간이 없어 힘이 들때는,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 정말 이렇게까지 저를 몰아가시깁니까. 네, 이거 한번 하는데까지 버텨보겠습니다”
푸념조로 기도하며 견디었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똥배가 나온 마라톤 선수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당연히 없지요.
왜냐하면, 마라톤 선수는 훈련을 철저하게 할 뿐 아니라,
식사, 기호식품, 취미활동등 삶의 많은 부분…. 그야말로 lifestyle을 바꿉니다. 
그렇게 해야만 최적의 기록을 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훈련을 받고 나면,
그런 사람에게 동네 한바퀴 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겠지요.

혹독한 시간관리 훈련, lifestyle 최적화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말과도 경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제게는,
KOSTA가 그러한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Growing up into Christ, Staff Edition – 3. 단순함을 통해 겸손함을 배우십시오.

KOSTA를 섬기다보면 도대체 이런 단순 노동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그저 소모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뽀대’가 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내가 맡은 일은 뭔가 지나치게 dry 하거나,
육체적으로 힘들기만 하거나,
여러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뭔가 ‘변방’ 혹은 ‘한지’에 내어 던져져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내 IQ의 절반정도만 되더라도, 지금 하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지만,
이처럼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일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있습니다.
늘 자신을 드러내고자하는 우리의 이기적인 죄성과 싸우는 힘을 길러줍니다.

저를 아는 분들은,
제가 “겸손함” 이라는 성품으로 특징지워지지 않는 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저는 특별히 겸손하지 못한 것이 제 아주 큰 약점 가운데 하나 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 이런 허드렛일들을 맡았을 때, 느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렇지만,
꾸준히 그 일들을 반복해가는 과정 속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는 법,
일을 통해 내 업적을 쌓는 것 보다 수혜자의 유익을 구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법등을 훈련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이런 훈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막장 노동’을 통해서,
겸손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나를 드러내고자하는 치졸하고도 더러운 내 죄성과 치열하게 싸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맺어진 열매들은,
분명히 여러분의 일상 생활에서,
다른 사역의 현장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Growing up into Christ, Staff Edition – 2.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주목하십시오.

일을 하다보면,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려는 노력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중요한 자세이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내 능력이 다해가는 것을 경험하거나,
시간, 체력, 사람, 돈 등이 부족하거나,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이 느낄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도움을 구하게 될 것 같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오히려 그런 부족함이 절실하게 느껴질 수록,
panic 상태에 빠져 그 부족함을 채우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깊은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난 26년간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시간, 우리의 체력, 우리의 힘, 우리의 재물, 우리의 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은 결국 헛된 것일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KOSTA를 이토록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의해 이끌려 왔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방향으로 완벽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KOSTA를 모두 한꺼번에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하지만,
우리의 최선으로 인해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조금만 눈을 열어,
우리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일하시는 것을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십시오.

때로는 하나님께서 놀랍게 일하시고 계신데,
우리가 그저 우리 앞의 일에만 정신을 빼앗겨,
더 큰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섬기면서 제대로 하게되면,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정말 성숙해지게 됩니다.
정말 손에 땀을 쥐도록 힘들어서 버티다가 하나님께서 왕창 그분의 일을 이루시는 것을 짜릿하게 경험하게 되면,
그것에 붙들려 사는 것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혹은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사역자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기대어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우리의 기대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묵사발시키시면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의 뜻과는 비교될 수 없읍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는 이 일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주저앉는 일이 혹시 생기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모자르게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능력만으로 마치 이 일이 되는 것 같이 착각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밤을 새워 열심히 섬기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하나님께서 해주시도록 올려드리십시오.
빈 구멍을 채우는데 많은 에너지를 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들이십시오.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Growing up into Christ, Staff Edition – 1. 성숙을 목말라 하십시오

얼마나 많은 우리 후배 간사님들이 이 글을 보는지는 모르지만,
금년 주제를 묵상하며,
지금쯤 여러가지로 땀을 흘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해보며,
우리 후배 간사님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음 몇번의 글을 통해서 좀 풀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KOSTA를 섬기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KOSTA를 섬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었고,
저 같이 형편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KOSTA를 통해서 받았던 선물 가운데 빼 놓을수 없는 것은,
KOSTA를 섬기는 일을 통해서, 제가 많이 성숙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KOSTA만이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산다면 누구든지 그런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지금의 제 모습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애게, 성숙한게 고작 그 모습이야” 라며 웃을 수도 있겠지만,
15년전 제 모습은 지금의 제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KOSTA를 섬기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루 하루 극기훈련을 하는 것과 같이 힘든 시기가 많았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듯 아파서 고통스러워 하기도 했고,
섬기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과 갈등도 많이 겪었습니다.
KOSTA 그만 섬기겠다고,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선배님들께 이야기했던 것이 적어도 3-4번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KOSTA를 섬기지 않았더라면 결코 성숙하지 못했을 성숙을 경험했습니다.

정말 고통스럽도록 힘든 그러나 기쁘고 보람있는 섬김의 기간들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제게 주셨던 성숙이라는 선물을,
저는 제 후배 간사님들 모두가 저보다 더 풍성히 누리셨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혹시 지금 겪고 있을 어려움 속에서,
섬김의 끈을 고집스럽게 붙드시도록 기도하고 응원합니다.

섬김의 과정에서,
혹시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땜빵하고 넘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섬기지 않으면 삶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열매를 간절히 목말라 하십시오. 

제가 우리 후배 간사님들을 아끼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제게 섬김의 과정을 통해서 혹독하게 훈련시키신 그 과정이 여러분에게도 역시 혹독하게 느껴지길 진심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악담이 아니라 blessing임은…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하나님 나라 백성만이 깨달을 수 있는 역설이겠지요. 

앞으로 몇번의 글에서,
어떤 성숙을 기대하고 추구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

신앙의 여러가지 개념들은,
이해된다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신앙이 논리의 과정으로 설명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논리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과 (가볍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사랑, 은혜, 사명, 인도하심, 성숙 등등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Glory)라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perceive하지 않고는,
위의 내용들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막상 그리스도인들과 ‘영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란 참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 영광에 대한 내 이해가 천박한 수준이기 때문이겠지만,
영광을 이해하지 않고도 신앙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의 수준,
하나님과 대면함이 없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믿는 현대 기독교인의 생각 등이 역시 그 이유가 되는 듯 하다.
 

15년만에 만난 후배

어제는,
15년만에 만난 대학 후배가 우리집에 와서 묵었다.
저녁을 먹고 길게 많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만 넘치던 대학원 시절,
학부생 1학년 기숙사 방문을 두드리며 모아서 성경공부를 만들었을때…
나 같은 사람하고라도 성경공부 하겠다고 함께 했던 착한 후배였다. ^^

이제는 30대 후반의 아이 아빠가 된 후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편 그 긴 세월을 보내면서 20년전 그 후배가 대학교 신입생일때 보여주었던 모습이 아직도 있는 것이 감사했고,
다른 한편 그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그 후배의 삶에 개입하셔서 여러가지로 만들어가신 모습이 감사했다.

시카고로부터 비행기를 타고 어제 저녁에 도착해서,
오늘 아침에는 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그냥 나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무식한 일정을 잡았단다. 헐…

그 후배의 마음이 감사했고,
그 후배에게 좋은 선배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