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직장을 옮길까? (1)

최근 이 근처의 어떤 회사의 recruiter가 연락을 해왔다.
보통 그렇게 recruiter가 연락을 해 오면 대부분 무시하는데…
이번엔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Amzaon lab126의 리크루터다.
너 C 알지? 나 C 그룹에 사람을 뽑으려고 한다.
관심있니?

C는 내 첫 직장의 boss 였다.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이고, C도 나를 참 좋아한다.
함께 start-up을 하면서 완전히 쫄닥 망하기까지 끝까지 살려보려고 함께 애썼고…
그 후에 어디서든 만나면 언제나 즐겁고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다.
참 좋은 ‘친구’이다.
C가 동부에 있을때 나는 내가 있는 회사로 C를 불러오고 싶어서 노력을 하기도 했었고,
1년 반 쯤 전에는 C가 자기 그룹에 opening이 있다면서 내 관심을 떠보기도 했다.

그런데 C가 사람을 뽑는다고!

나는 완전히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 직장에 나는 그래도 꽤 만족하고 다니고 있는데도 말이다.

배경보다 큰 사람

자신의 학벌, 집안 등 배경을 자랑 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배경보다 작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배경을 통해서 자신을 실제보다 더 훌륭하게 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
큰 사람은, 자신이 배경을 더 훌륭하게 만든다.

세상의 성공의 기준은, 자신보다 큰 배경을 취득하는 것이지만…
건강한 성공의 기준은, 자신이 배경보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Silicon Valley에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질때

가끔은, Silicone Valley에 있다는 것은,
창기(prostitute)가 되는 것과 같다고 느껴질때가 있다.

더 멋진 옷과 화려한 화장을 하고 더 높은 값을 쳐주는 사람에게 몸을 파는 것이나…
더 많은 교육과 경력을 쌓아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사에 모든 것을 던져 헌신하는 것이나…

이런 TED talk은 정말 내가 그런 창기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여러가지로 생각하게 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10) – 마지막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많이 울어야 한다.
그저 맹숭맹숭하게 살아갈 수 없다.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같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결코 깊어질 수 없다.
좋은게 좋은거지… 식의 신앙은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이된다.

침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들은 냉소적이 되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
외향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패배가 아님을 인식하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쩌면 침체의 시기가 길어질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오래 버텨야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하박국의 기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9)

침체의 시기에 충분히 깊어지지 않으면 부흥의 시기가 활짝 꽃피기 어렵다.
침체의 시기에 다듬어진 깊은 신학과 성찰은 부흥의 시기를 발현시킬 뿐 아니라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침체의 시기에 너무 쉽고 빠르게 부흥의 시기로 넘어가기위해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침체의 시기에 해야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런 침체의 시기에 아주 훌륭한 insight를 주는 성경은 예레미야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 침체의 시기를 침체의 시기로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선지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침체의 시기에 충분히 망가지지 않으면 다시 세워질 희망이 없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글들은 70년이 지난 후에 다니엘이 읽게되고, 그 다니엘의 삶과 기도와 경험은 어쩌면 예수님 시대를 여는 아주 중요한 key가 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8)

부흥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건강하고 거룩한 가치에 동의하도록 하는 ‘대중화’가 중요한 반면,
침체의 시기에는 헌신된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전문화’가 중요해진다.

이것은 바로 전에 언급한 깊어짐과 연관이 있다.

침체의 시기에는 세상의 영향력이 강력해지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명목적이거나 marginal한 신앙을 갖게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침체의 시기를 뚫고나갈 힘이 없다.
한편으로는 그 침체의 시기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세상에 속하지는 못하면서 그저 groaning하는 모습에 남아있기 쉽다.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도, 뜨거운 헌신도 없기 때문에 조금 더 힘을 내라, 함께 더 해보자는 식으로 독려해도 움직여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독이되어버리고 만다.

헌신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침체의 시기에 모두 힘있는 자기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침체의 시기에 닥쳐오는 강력한 세상의 영향력은 정말 견뎌내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성령의 강력하게 일하심이 없는데 그 모든 무게를 개인이 각자의 ‘개인기’로 버티고 뚫고 나가라고 주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심한 폭풍우 속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은 전투의 현장으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많이 돌보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정말 뜨거운 헌신을 잃지 않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부흥의 시기를 지나며 ‘기준’을 형성해온 어떤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침체시기의 부담을 어깨에 지도록 요청해야 할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속에서 말도 안되는 그 무게를 지도록 요청해야할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그렇게 함께 하지 못하고 내상과 외상을 입어 쓰러져 있는 주변사람들에게 왜 너희는 나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그저 이건 내가 해야할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감당해야한다.

그것은 텅빈 교회안에서 설교를 해야하는 목회자가 될수도 있고,
학생들이 함께하지 않는 캠퍼스의 사역자들이나,
하나님 나라를 믿고 그 가치에 헌신하는 직장인이 될수도 있다.

내가 다른 누구에게 role model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 “message”가 될 수 있을까.
내 성공과 성취, 승리와 기쁨 뿐 아니라,
내 실패와 좌절, 패배와 슬픔 까지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내 삶의 모든 contents가 다른이들에게 “message”가 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내가 말로, 내 얄팍한 passion으로, 섬긴다고 돌아다닌다는 것이 그저 공허한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정과 직장과 내 개인의 삶이 모두 건강하게 integrate되어 있지 않으면,
더 이상 내 말이 진실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는다.

내 얄팍한 열정이 오히려 다른이들을 파괴하는 무기가 됨을 깨닫는다.
내 신앙의 피상성을 나도 참을 수가 없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7)

양적 팽창의 부흥의 시기에는 공동체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있을때에는 그분의 그 은혜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급되도록 해야한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seeker friendly한 모습을 갖추고, 율법주의를 경계하며, 더 깊은 레벨의 헌신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은혜의 강가로 나오라고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헌신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보내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깊이를 추구해야하는 침체의 시기에는 공동체의 문턱을 너무 쉽게 낮추는 일을 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깊이를 추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자체가 큰 ‘헌신’이 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의 순수함과 헌신을 지켜내는 방법이 될 것이다.
침체의 시기에는 공동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힘에 비해,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려는 힘이 매우 강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 있도록’ 노력하는 것 보다는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 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 안에는 세상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들어오는 사람들(지도자들을 포함해서)이 많이 있게 될 것이므로,
그 세상의 것과 싸우는 일들을 꾸준히 해야한다.

그렇게 싸우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순수함을 지켜내면서 깊어질 수 있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6)

이것이 아주 일반적으로 맞아들어가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대충 생각하기에
– 부흥의 시기에는 대단한 양적 팽창이 이루어지고
– 침체의 시기에는 그 양적 팽창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다음 양적 팽창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축적된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 많은 사회현상이나 자연현상이 그렇다.
경기호황과 침체의 사이클이나, 엘니뇨와 라니냐의 사이클도 그렇다.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각하고 부르짖은 대로 침체의 시기에는 정말 제대로 망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많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깊어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 (5)

부흥의 시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갖는 일종의 환상은 그 시절이 완벽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절대로 그럴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시기에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하시는 것이긴 하지만 대부흥의 시기에도 교회에 들어오는 소매치기가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침체의 시기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생명력이 있다.
심한 침체의 시기에도 어디엔가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엔가는 깊고도 싶은 신앙과 신학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부흥의 시기와 침체의 시기는 그래서 크게 보면 cycle로 돌아가는 것이고,
각각의 시기에 다른 역할로 하나님 나라가 지탱된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침체의 시기에 해야하는 일은 부흥의 시기를 사모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있겠지만….
그 침체의 시기에 감당해야하는 일들을 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