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중심의 질문, ‘너’ 중심의 질문

사랑이 많은 부모라면,
자신이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에게 충분히 잘 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때로는 그 안타까움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자신을 자책한다던가, 아니면 왜곡된 자기 보호 기재로 인해 비뚤어진 감정표출을 하게 된다던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이 아예 없다면 그것 역시 대단히 이상한 모습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사랑의 모습에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묻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모습이 더 많이 나타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나’가 있는 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중심에는 ‘너’가 있기 때문이다.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중심의 질문을 하는 것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부모로서 살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역자로서,
선생이 되어 가르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public servant로서,

‘나’ 중심의 질문이 아니라 ‘너’ 중심의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너’ 중심의 질문을 많이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집중하기 보다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느냐에 집중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해야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없는 내 모습에 많이 안타까워하며 아파할 것이다.
능력이 제한된 인간으로서 그런 안타까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리더가 정말 진실된 리더인가를 평가할때,
그 사람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가 하는 것이 참 좋은 판단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Sloth

Dorothy Sayers는 The other six deadly sin 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The sixth deadly sin is named by the church acedia or sloth. In the world it calls itself tolerance; but in hell it is called despair. It is the accomplice of the other sins and their worst punishment. It is the sin that believes in nothing, cares for nothing, seeks to know nothing, interferes with nothing, enjoys nothing, loves nothing, hates nothing, finds purpose in nothing, lives for nothing, and remains alive only because there is nothing it would die for. We have known it far too well for many years. The only thing perhaps that we have not known about it is that it is a mortal sin…. But theseareall disguisesfor theempty heart and theempty
brain and theempty soul of Acedia

흔히 ‘게으름’이라고 번역하는 Sloth는 사실 의미없이 열정없이 사는 삶을 이야기한다.

뭔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대해 그저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둔감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등은 다 Sloth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Dorothy Sayers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It is one of the favorite tricks of this sin to dissemble itself under cover of whiffling activity of body. We think that if we are busily rushing about and doing things, we cannot be suffering from sloth.”

바쁘게 사는 것은 때로 sloth의 죄를 짓고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부지런히 살면서 의미 없이 사는 것은 sloth 인 것이다.

정말 가만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가지 사이에 위치한다.

의미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의미없이 바쁘게 살거나.

정말 은혜가 필요하다.

송철호 이야기

이번에 울산 시장으로 당선된 송철호 변호사 이야기가 뉴스와 여러 인터뷰등에 떴다.
아는 사람을 알지만, 송철호 변호사는 이번에 당선되기 전에 자그마치 8번이나 여러 선거에서 낙선했다.

김어준과의 인터뷰에서 송 변호사는 몇번 떨어지고 나서는 아예 주소도 옮겨서 출마하지 않으려 하기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그래도 지역주의에 누군가는 도전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강변하는 바람에 계속 출마하게 되었다고.

1992년 40대 초부터 이제 70이 다 되어서까지 계속 그렇게 안되는 싸움을 도전을 했으니…
송철호 변호사는 결국 자신의 인생 전체를 ‘지역주의 타파’라는 것과 싸워온 셈이다.
이번에야 그래도 될만한 싸움이었지만, 지난번 선거까지만 해도, 울산에서 민주당계열로 도전하는 것 자체가 패배할것이 빤한 싸움이었다.
그래도 싸워야할 가치 때문에, 그리고 그 가치를 가지고 함께 싸우는 사람들 때문에 그 안되는 싸움을 계속 싸워왔던 것이다.

나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때로…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안되는 싸움을 계속 싸우라고 격려하는 동료가 없다고 느낄때는 참 외롭고 힘들다.

이런 정치인들의 동료의식과 헌신을, 왜 더 이상 기독교에서는 보기 어려운 걸까.

은혜의 복음이 인간에게 담겨질 수 있을까

은혜의 복음은 대단히 급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또한 혁명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예전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 은혜의 복음이 어떤 사람의 인격에 담겨졌을때, 그 인격이 그 은혜의 복음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여 ‘터져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그 사람의 본성 자체를 흔들고 바꾸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그 사람 감성의 혼돈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 그것은 겉보기에 그 사람 전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심각한 침체와 눈물 속에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한 아픔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마음의 무너짐을 사모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볍게 이야기하고, 가볍게 헌신하고, 도전하지 않는 복음은… 적어도 내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삶속에 담겨져 있던 그 혁명적이고도 급진적인 복음은 아니다.

노예의 쇠사슬 자랑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에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하여 정복당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By Amiri Baraka, formerly known as Leroi Jones

은혜가 편해진다면

은혜가 편해진다면 그것은 은혜로서 작동하지 못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사이에서,
은혜를 이야기하면 고루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있다.
기독교의 클리셰를 그저 이야기하는게 아니냐는 거다.

그런 속에서 은혜는 그 효과를 잃어버린 것이다.
은혜를 결코 편해질 수 없다.

마치 단물이 빠진 껌이나,
오래되어 향을 잃어버린 향수,
더 이상 켜지지 않는 오래된 TV와 같이…
현대에 은혜는 그렇게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뭔가 좀 신박한 방법으로 re-brand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냥 은혜로는 relavancy가 없으므로 그 relavancy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가 relavancy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사람이 은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그걸 잔뜩 package를 하고 사탕발림을 해보고자 하는 모습이 슬프다.

Too many messages…

나는 내 전화번호를 거의 절대로 회사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다.
그렇게 전화번호를 주기 시작하면 전화와 voice message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하는게 거의 불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떻게 내 전화를 알게된 사람들이 부지런히 전화를 하고 message를 남기는데… 대부분 그 전화들을 무시하곤 한다.

그래도 회사 전화, 회사 전화로 오는 text message, 내 개인 전화, 내 개인 전화로 오는 text message들이 벅차게 느껴질때도 있다.

게다가 카카오톡도 있고, 나는 facebook message도 있다.
카카오톡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만 연락하고있고,
facebook message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씹는 때가 많다. ^^ (아니면 며칠 후에 답을 하거나.)
그도 그럴 것이 나는 facebook app을 전화에 넣어놓고 살지 않기 때문에 facebook message를 바로바로 체크하지 못한다.

또, 회사 내부적으로 사용하는 message도 있다. (회사에서는 google hangouts를 쓴다.) 이게 또 장난아니게 계속 터지고.
그리고 아내와 민우와는 Allo를 사용한다. 이 둘은 내가 세계 어디에 있든지 가장 급하게 연락할 수 있는 hotline을 가진 셈이다. ^^

아 물론 내게 가장 많은 message가 들어오는 것은 email이다.
뭐 email은 그래도 좀 manageable 하다. 왜냐하면 급한것이 아니면 읽지 않은 상태로 표시해 놓았다가 나중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해볼 수 있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manage 하면서 사는지 잘 모르겠다.

내부분 그래서 이렇게 분류를 해놓고 산다.

– Allo : 아내와 민우
– Duo : 가족
– 카카오톡 : 잘 아는 사람들. 그렇지 않는 경우는 notificatoin을 다 꺼놓고 지냄
– 회사 전화 : 회사 내부 사람들에게만 알려줌.
– 개인 전화 :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줌
– 회사 이메일 : 일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쭈악~ 뿌림
– 개인 이메일 : 여기저기 뿌리는 버전의 이메일(자주 체크 안함)과, 조금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는 이메일(들어오는 족족 push message가 뜸)이 따로 있음.
– Facebook messenger : 거의 사용 안함. 이쪽으로 연락오는 사람들은 어차피 나와 아주 가깝지 않은 경우가 많고.

그런데 이것도 늘 나는 manage 하는게 벅차서 허덕허덕 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결국 message들을 제때 대답을 못하고 놓쳐버리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거다.
내가 꼭 얘기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끈질기게 몇번씩 전화를 다시 하지만,
내가 꼭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나를 오히려 배려해서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거다. -.-;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다 manage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accesible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사는게 참 쉽지는 않다.

진짜 정치 관련된건 적게 쓰려고 노력하는데…

Facebook등을 뒤져보면 다들 자신이 다 정치 전문가가 되어 나름대로 썰을 푸는걸 본다.
어떤건 들을만 하지만 대부분은 완전히… 음….

또 나도 정치에 궁극적(?) 소망을 두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는 탓에,
정치에 관한 글을 이 블로그에는 적게 쓰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지만,
어제는 밤 1시까지 뉴스를 보다가 잠들었고,
아침 3시에 한번 깨서 뉴스 확인,
5시에 결국 깨서 개표방송을 보면서 아침시간을 보냈다.

음…
솔직히 말하면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참 좋다. ^^

이상의 시대는 갔다?

사회학자이자 침례교 목사인 Tony Campolo는 University of Pennsylvania 에서 여러해 교수로 섬겼다.
언젠가 들은 그의 설교에서 특별히 학생들의 저항정신이 가득하던 1960년대에 사회학교수였던 것이 무척 exciting 했다고 이야기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모습에 불만을 가득 품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인 Tony Campolo를 향해 분노의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그 젊은이들은 비록 매우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지만, 자신들이 세상에 나가면 세상을 바꾸어 보리라는 꿈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Bobby Kennedy, John F Kennedy, Martin Luther King Jr. 등 새로운 사회로의 이상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일들이 일어났고…
그것과 같은 시기에 학생들은 점점 “me-generation”이 되어갔다고 회상했다.
(이 사람들이 취했던 정치적인 입장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 이들은 적어도 그 시대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을 제시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품는 것을 중지한채, American pie에서 어떻게 하면 더 큰 조각을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세대가 점차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고 느껴질때가 많다.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정말 안되는데…

정말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때는

아둔한 나는,
당연히 은혜를 까맣게 잊고 살때가 많다.

그런데 특히 내가 은혜를 정말 아주 까~아~맣~게 잊을때는,
“악인의 형통”을 보게될 때이다.

악인의 형통은, 참 견디기 어려운 분노를 자아낸다.
이게 뭐 거창하게 악인의 형통… 이렇게 썼지만,
가령 일은 잘 안하고 팽팽 노는 직장 동료가 상사에게 싹싹~ 잘 해서 잘나가는 걸 본다거나 하면 참 정말 열이 받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뭐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이 아주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바른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그 악인과 대비되는 의인의 자리에 놓는 순간 나는 내 마음 속에서 심판이라는 허락되지 않은 폭력을 저지른다.
마구 진노와 판결을 남발하고, 자꾸만 나를 세상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다.

이런 process가 반복되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가 은혜라는 생각은 아주 까맣게, 정말 까~아~맣~게 잊어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