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절망, 희망?

어제 밤 늦게까지 한국 뉴스를 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끝까지 다 보고서야 컴퓨터를 껐다.

실망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희망을 놓지 않아야 가능하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게 늘 불확실한데, 절망에 빠지지 않을 희망이라는게 가능하겠나.
그래서 희망이 절망에 빠지지 않을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나는 절망에 빠지지 않을 근거는,
그것이 옳은 일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어야 한다고 본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다.
옳은 일이면 불확실성이 크더라도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옳지 않은 일이면 불확실성과 관계 없이 그냥 싸그리 쓰레기통에 버리는 거다.

이런 실망의 순간을 맞이할때 해야하는 일은,
여전히 하려는 일이 옳은 일인지를 다시 점검하고,
그 옳은 일을 하는 옳은 길을 다시 재정비하고,
포기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그리고 궁극적 선한 심판자가 있다는 것은 믿는 세계관을 가졌다면,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생각.

Sloth

Seven Deadly Sins 가운데 Sloth가 들어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Sloth에 대해서 쯘적도 있었는데,
Sloth는 단순한 게으름이라기 보다는 ‘열정없음’에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어떤 사람을 열정없이 게으르게 만들까?

첫째,
정말 중요한 것에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을 정말 진지하게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쉽게 sloth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둘째,
매우 근시안적으로 자신을 지키는데 급급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하면 자신을 다치게할까 무서워 그냥 움츠려드러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움츠려있으면 그 사람은 더더욱 자신을 다치는 것에 노출되게 된다.

셋째,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진지함을 가질 수 없다.
자신에 대한 reflection도 없다.
생각의 게으름이 결국 사람을 sloth로 이끈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렇게 sloth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진지하지 않고, 자신만을 지키고,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것으로 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했다!

지난 주말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했다.
Jordan Peterson이라는 캐나다의 심리학자이다.
wikipedia
위키피디아

지난 주말에 처음 접했으므로, 당연히 나는 이 사람의 생각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다음의 몇가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첫째,
기존의 권력에 대항하며 성장한 ‘자유주의’진영을 아이디어를 꽤 시원하게 비판한다.
내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자면 아마도 ‘자유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미국과 특히 이곳 bay area에서 살면서 그런 liberalism의 피로도가 내게 쌓여왔던 것 같다.
내가 찜찜하고 어색하게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면서, 너 그 옷 되게 이상해… 라고 비판해주는 목소리를 들은 느낌이랄까.

Political correctness를 막 까는데… 그게 트럼프식으로 막무가내로 까는게 아니고… 그 주장을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도록 이야기한다.

Stanley Hauerwas가 liberal democracy를 비판하면서, invitation to quit thinking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확~ 떠올랐다.

둘째,
그 주장이 매우 현실적이다.
가령, climate change에 대하여 이 사람은 그것이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라고는 이야기하지만, 그냥 구호나 근시안적 시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세째,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입장이 매우 흥미롭다.
시간이 없어서 다 보지는 못했지만 Sam Harris와 네시간 넘게 토론한 youtube 영상도 올라와 있었다!

관심은 있으나 제대로 살펴보고 공부할 여유가 없어서…
혹시 독자들중에 이 사람의 책이나 주장을 접하고 비평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좀 배워보고 싶다. ^^

Gospel Presentation (10)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1. 복음은 단순도식화 시키기에는 너무 큰 개념이다.

2. 과거에 그게 먹혔던 이유는 비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개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3. 그 기본 개념들 자체에 대한 이해가 많이 달라진 지금은 그것들을 설명하는데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단순도식화해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간결한 gospel presentation에 대한 고민은 더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gospel presentation은 가능하면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의 접점을 충분히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복음의 핵심에 이르는 길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쉬워야 한다.
이때 당연히 무엇이 그 짧은 내용에 담겨야 하는가 하는 다양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지금까지 제시된 것 가운데 그래도 가장 잘 만들어 진 것은 ‘True Story‘ 혹은 ‘냅킨전도‘라고 불리우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더 많은 작업들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Gospel Presentation (9)

현대인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신 개념(concept on God)’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기독교의 신을 믿으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을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듣는다.
죄라는 개념 자체가 많이 달라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은 매우 혼란스럽게 들릴 수 있다.

나는 신, 죄, 인간,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신, 죄, 인간, 구원등에 대해 훨씬 더 오래동안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로 기독교를 설명해내는 선교적 자세가 정말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아테네 전도를 실패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바울의 아테네 전도가 실패한 이유는 그 속에서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아테네 사람들의 언어로 복음을 communicate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바울이 이야기하는 기독교적 개념이 그저 생소하기 때문에 회심자가 적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영리, 브릿지, 전도폭발, 빌리그래함 전도등은 모두 긴 대화가 아닌 짧은 선언으로 회심자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나는 그게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Gospel Presentation (8)

현대 기독교에서 흔히 ‘복음을 전한다’라고 이야기할때 그 메커니즘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다.

이미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개념들 -신, 인간, 죄, 세상-등을 기독교적 개념으로 구조화해서 설명한 후에, 그것을 그 사람들이 ‘개인화(personalization)’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전파’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첫번째로,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이 대충 비슷하고, 그것이 기독교적 개념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위 ‘복음’에 대해 어느정도 들어보았고 그것에 대한 대략적 이해가 있다. 그러니 이제는 이미 조각조각 여기저기에서 들어보았을 파편들을 잘 조립해서 구조물로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그나마도 그 꾸며진 구조를 많은 사람들이 어느정도 익숙하게 들어보았다. 예수천당-불신지옥이 되었건, 사영리가 되었건, 전도폭발이 되었건 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그 내용을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어느정도 들었을 그 내용들을 개인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빌리그래함의 전도집회는 대표적으로 이렇게 작동했다고 본다.
그리고 빌리그래함의 전도집회에 영향을 받은 현대 복음주의권 집회의 대부분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할때는 바로 이런 방법을 택한다.

나는 여전히 이런 접근이 유욯한 사람들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고,
빌리그래함식의 전도는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

Gospel Presentation (7)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다.
그렇게 욕먹는 것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잘 못 represent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가령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기적이고 율법적이고 judgemental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사랑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그냥 위선적이고 답답하고 나를 정죄할것만 같은 곳이 교회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렇게 기독교가 mis-represent한 것들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대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참 만만치 않다.

게다가 Christendom의 시대에는 그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기독교에 대한 이해들이 있었다.
‘신’이란 어떤 분인지, ‘죄’란 무엇인지 등등.
그런데 지금은 그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모호해져 버렸다.

가령 현대인들에게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신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매우 다양한, 그러나 기독교적 개념과는 다른 신개념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Post-Christendom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assume하지 말아야 한다.

Gospel Presentation (6)

아무래도 이렇게 그냥 쭉~ 나가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약간의 신학적 논의들에 대한 설명을 더 덧붙여야겠다.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은 로마시대에 종교적으로 사용되던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정치적인 말이었다.
대개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이라던가, 황제의 생일 등과 같이 제국의 위용을 더 드러내는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복음’이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성도들이 로마제국하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죄-예수-구원의 framework에서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매우 정치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유앙겔리온’이 되려면 예수님 사건은 무엇으로 이해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로마제국의 통치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땅에 임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앙겔리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통치를 회복하신다는 것에는 물론 ‘죄-예수-구원’의 스토리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Gospel Presentation (5)

사실 구약을 보면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것을 그냥 자연스러운것으로 다루고, 죽음을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이야기하는 ‘사망’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서신들과 바울서신들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복음서에서는 의외로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오히려 복음서에는 ‘복음’이라는 어떤 event가 일어났다는 왁자지껄함이 가득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가지 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약에서와 같이 쩨데카(공의)와 미쉬파트(정의)라는 주제를 통해서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신구약중간기과 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부활’과 같은 논의들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 문들을 통해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 안에 사망을 이김, 공의, 정의, 부활 등등의 이야기들이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것과 같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질문 자체가 매우 shallow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복음의 진수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은 자신이 씨름하고 있던 것이 죽음의 문제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

Gospel Presentation (4)

물어보지 않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죄-예수-구원은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일까?
나는 그것은 아주 기본적으로는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다.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질문들이다.
인간이 누구나 죽음을 대면하게되기 때문에,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모두에게 relevancy를 분명히 갖는다.

그러나…
죽음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문의 전체는 아니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죽음’으로부터 비롯되기 보다는 ‘삶’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것이 현대에 기독교가 relevancy를 잃고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진지한 핵심으로 다룬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럼 복음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지만, 그와는 다른 문제들도 아주 많이 다룬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relevant한 질문들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들을 정말 ‘복음’에 다가오도록 만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