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pel Presentation (3)

그럼, 복음을 제시한다고 할때,
죄-예수-구원을 복음 제시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그건 뒤에 조금 더 다루겠지만 딱 그렇지도 않다.

사실 여기서 살짝 고민이 좀 된다.
이걸 신학적으로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주 길고 (어쩌면 지루한) 내용이 여기에 담겨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게 이 블로그에 적절할까 하는 것 때문이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 논의는 좀 과감하게 skip하기로 마음 먹었다. ^^

좀 길고 복잡한 논의를 다소 쉽게 설명하려고 시도를 해보겠다.

복음이란,
선한 창조의도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과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스토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런데 이 큰 스토리는 그 스토리가 이야기되는 시대에따라 다르게 비추어지거나 다르게 강조되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이거 잘못 이야기하면 이단 비슷하게 되기 때문에… 이 비유가 좀 아슬아슬하긴 한데… ㅠㅠ)

가령, 이렇게 생각해보자.
모든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하자.
그 만병통치약은,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을 하기 때문에,
그 약만 먹으면 에이즈로부터 무좀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하자.

그런데 그 만병통치약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어떤 우울증환자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주게되고,
어떤 두드러기환자에게는 가려움을 없애준다.
어떤 심장병환자에게는 심장 박동을 찾아주고,
어떤 관절염환자에게는 관절의 고통을 없애준다.

그러면 그 약을 심장병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렇지만 그 약을 심장병약이라고만 하면 안된다.
심장병 약이라는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장병약이라고 하면 그것은 관절염 환자에게 적용되지 않는 약이 되어버리고 만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사셨고 처음 복음이 선포되었던 그 시대를 포함해서,
어떤 시대이던간에 그 시대가 특별히 가지고 있는 문제와 질문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시대에는 추상적 진리가 시대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인권이 시대의 관심사가 될수도 있다.
어떤 시대에는 전쟁없는 세상이 모든 이의 바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끝을 모르는 쾌락추구의 파괴성이 그 시대의 화두가 될수도 있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Gospel Presentation (2)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앞글에서 이야기한것 처럼,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일까?
(이것을 앞으로 죄-예수-구원 이라고 줄여서 쓰겠다.)

나는 죄-예수-구원이 복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분명히 확신한다.
그리고 죄-예수-구원이 의미하는 것을 다 믿는다.
그러나, 복음을 죄-예수-구원으로만 이야기하면 복음에 대한 어떤 왜곡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에 쓰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나 혼자의 주장이 아니고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이 내용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더 구체적인 독서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을 해주시길.)

우선, 1세기 신약백성들이 이해했을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자.

여러 성경구절을 찾아볼 수 있지만, 신약과 구약에 동시에 나와있는 본문을로서
로마서 10장과 이사야서 52장에 함게 나와있는 대로,
복된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한 본문을 생각해보자.
이사야서에 기술된 그 복된소식(복음)의 내용은 죄-예수-구원이 아니다.
이사야서에는 그 복된 소식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사야서의 그 본문에 따르면 복음은 죄-예수-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인 것이다.

Gospel Presentation (1)

‘복음을 전했다’라는 표현을 교회에서 듣는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다행히도(?) 그런 표현을 별로 쓰지 않는다.
나는 정말 복음을 전해야한다고 믿는다. 나 개인적으로도 ‘구령의 열정’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오해가 많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을 볼때 좀 불편하게 여겨질때가 있다.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할때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나는 위에 써 있는 말중 동의하지 않는 말이 하나도 없다.
나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완전 적극적으로 공감/동의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도 완전 동의하고, 그것때문에 무한히 감사하다.
그리고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너무 좁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그게 잘 먹히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별의 별것을 다 배운다

나는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내가 제일 하고자 했던 전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꽤 재미있어 했다.
대학때는 오죽해야 시험보는게 재미있을 정도였다.
진짜 재미있게 공부했다.
전공과목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혼자서 다른 전공과목들을 독학하기도 했다.

그런데 박사는 재료공학이라보 보기 어려운 쪽으로 하게 되었다. (내가 꼭 하고자 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내 지도교수는 전자과와 화공과 겸임교수였고,
내가 한건 물리-화학-화공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분야였다.
그런데 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박사 졸업할때쯤엔 그것도 왕창 재미있어 했다.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복잡한 미분방적식들을 풀어가며 빡쎄게 했다.

그런데 졸업후 직장은 그것과는 또 다른 일로 빠지게 되었다. (내가 꼭 하고자 하는 분야쪽에서 job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디스플레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꽤 열심히 했는데, 그것도 진짜 재미있었다.
왕창 배웠다.

그리고나서는 또, 디스플레이쪽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운 다른 분야의 일들을 했다. (디스플레이쪽을 계속 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job이 없었다.)
roll-to-roll 이라는 방법으로 manufacturing을 하는 것에 뛰어들었고,
그걸 가지고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완전 빡쎄게 많이 배웠다.

지금은 난데없이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원래 지금 회사에 온건 이런걸 하려고 온게 아닌데….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제는 밤 늦게까지 brain surgery를 하는데 들어갔다. -.-;
지금 만들려고 하는 device가 brain에 연관된 것인데, 그 수술과정을 봐야 device를 제대로 디자인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다음주에는 cadaver를 가지고 해부하는 session을 출장을 가서 하루종일 하게 된다.
사람 시신을 해부하면서 여러가지를 배우는 거다.
허걱… 나는 평생에 내가 이런걸 배우게 될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한대로 일이 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뭔가 좀 배워서 그쪽을 좀 안다… 싶으면 분야가 바뀌어서 새것들을 계속 배워야하는 일을 30년째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는 좀 진득하게 한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배우고 싶은데…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이런걸 보더라도, 하나님은 나랑 참 취향이 맞지 않는 분인 것 같다. ^^

허름한 옷의 갑질

나는 보통,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의 가격을 다 더해서 50불이 되지 않을때가 많다.
셔츠 – 20불
청바지 – 20불
양말&속옷 – 5불
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요즘같은 겨울에는 그 위에 외투를 입으니, 50불이 넘을 것 같다.

나는 출장을 갈때도 대개는 그렇게 입고 간다.
일본 토쿄 중심가의 높은 층의 office에 미팅을 하려 들어가면,
나는 혼자 청바지에 허름한 셔츠를 입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장에 넥타이 다 메고 쭈루룩~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너무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않으려고 그럴때는 살짝 조금 더 낫게 입으려고 노력을 할때도 있긴 하다.

그런데….
내가 출장을 다닐때도 그렇게 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내가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그 사람들에게 잘보여야 하는 입장이라면, 옷도 더 단정하게 챙겨입어야 하는 거다.

내가 옷을 허름하게 입고 다니는게 갑질이라는 생각에 많이 불편해졌다.

불편한 비행기 자리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음… 최소 250파운드(114 Kg) 는 되어보이는 거구였다.
나는 복도쪽 자리에 앉았고, 그 아저씨는 중간자리에 앉았는데…
자신의 체격이 크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앉자마자 팔장을 끼고는 웅크려 가능한 자신이 차지하는 부피를 줄이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워낙 그 아저씨가 거구여서, 당연히 팔걸이도 그 아저씨 것이었고,
내 자리의 상당한 부분을 그 아저씨의 옆구리가 넘쳐 흘러 들어왔다.

나는…
당연히 불쾌했다.
아니, 어쩌다 이런 자리에 걸려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시간이었기에 그냥 나는 불편하게 어정쩡하게 몸을 기울여 앉은 채로 왔고, 그 아저씨는 그 아저씨대로 몸을 잔뜩 웅크린채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그 아저씨 잘못은 아닌거다.
그냥 그 사람은 체격이 그렇게 큰걸 어쩌란 말인가.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의 존재가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불쾌한 기분이다.
그 사람의 존재가 불쾌한 것 보다도…. 한 사람의 존재를 그렇게 불쾌하게 느낀다는 사실이 불쾌한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 경험이야 그분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감히 동등하게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한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를 감사할줄 아는 것은…
여유가 있을때는 쉽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정말 존중할줄 아느냐 하는 것은 여유가 없을때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내 마음의 여유없음은, 여유 없는 비행기 자리만큼이나 빡빡했다.

나의 위치는?

이제 한달남짓 지나면 나는 50세가 된다.

50이면 지명(知命) 혹은 지천명(知天命) 이라고 하여 천명(天命), 즉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고 했다.

지금시대가 공자의 시대와 같다고 볼수는 없겠지만,
그러니 예전의 50세가 지금의 50세와 같다고 볼 수 없겠지만…
나는 천명을 아는것은 정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

돌이켜보면 30에는 대충 나 스스로 생각의 자립이 이루어지고, 어떻게 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 같으니… 30까지는 어느정도 나이에 맞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40에 내가 不惑 이 되었다고 말하기는 정말 어렵다.
정말 불혹이 되기위해 치열하게 노력을 했고, 지금까지도 노력을 해 오고 있지만… 정말 택도 없다.

그런데 이제 知天命 은 더더군다나 말도 안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30정도까지는 어느정도 나이게 맞게 성숙해져왔지만,
40에서는 좀 뒤쳐져있었고,
50에서는 말도 안되게 뒤쳐져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30대와 40대를 잘 못 산 것일까?
출장와서 호텔방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Not 1K!

United에서는 일년동안 100,000 mile을 타면서 united ticket으로 $15,000 이상 면 1K라는 status를 준다.
이게 매년 갱신 되는 것이어서 딱 일년동안의 실적만으로 그 다음해의 지위가 결정된다.

1K가 되면 국제선 upgrade coupon도 몇장 주고, upgrade도 잘되고, 국내선에서 economy를 타더라도 공짜로 snack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다.

출장을 부지런히 다닌 덕분에 몇해동안 계속해서 1K를 유지해왔는데,
작년 후반부에 출장을 좀 게을리(?) 했더니만,
Platinum으로 지위가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금년에는 1K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오늘로부터, 다시 금년의 출장 일정이 시작된다.
일단 가볍게 국내 출장을 2월중에 두번 찍고…
아마 3월쯤에는 해외로 한번 더 가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금년에도 역시 1K에 미치지 못하길 살짝 바래본다. ㅎㅎ

생각의 성실함

내가 생각하기에, 부지함과 성실함은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한가지 차이가 있다.
부지런함은 육체의 움직임에 대한 description이지만, 성실함은 자세(attitude)에 대한 description이다.
이게 정확히 그렇게 구분되는 용어(termonology)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정의해보고 싶다.

생각하지 않고 몸을 열심히 움직여 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엔 그런 사람은 부지런하기는 하지만 성실하지는 않다.

부지런한 사람이 성실하게 되려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생각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부지런함이지만, 진정한 성실함은 생각의 성실함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정말 제대로된 생각은 대단히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어떤 순간에… 에이 몰라… 라고 생각을 포기해버리면 결코 그 사람은 성실해질 수 없다.

생각/사색/묵상을 꾸준히 열심히 쉬지않고 해야한다고…
오늘도 자꾸만 나를 다그친다.
나는 그리 성실한 사람이 아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