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음

바울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살짝 좀 힘들게 느껴질때는…
이분이 가지는 확신이 너무 크다는 것을 발견할때다.

이분은 뭔가 자기가 믿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좀 많이 심한것 같다. ㅎㅎ

아니, 이분이 생각이 별로 없이 그냥 믿는 분도 아니고,
나름대로 여러가지 생각도 많은 분인데…
어쩌면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걸까.

그리고 그렇게 흔들리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하는 걸까.

반면 나는 참 많이 흔들리곤 한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도 많고,
걱정도 많고, 갈등도 많고…

예전에는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것을 따라보려고 노력했으나,
요즘은… 내가 바울을 닮을수는 없다는 것을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는 중. ㅎㅎ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은,
때로는 흔들리면서, 때로 실수하면서, 그렇게 그 안에서 자라도록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세지향적 신앙은 현실을 무시하게 만드는가

내세를 자꾸 강조하다보니,
이생에서의 삶, 현실에서의 삶을 도외시하게되었다는 비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한때 그렇게 나도 동의도 했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세에대한 강조때문에 현실을 무시하게되었거나,
내세에대한 강조때문에 이원론적 사고체계에 빠져버리게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그 내세에 대한 소망 때문에 정말 현실을 열심히 살았다.
그분들은 이생이 영원한 삶과 연관되어있고 연결되어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이생을 더 가치있게 살아갈 수 있었다.

현실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내세에대한 강조가 아니라,
내세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을 보면서 하게된 생각.

얼마나 알아야할까?

바울의 초기 저작인 데살로니가 전서를 끝내면서,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아도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복잡한 신학적 훈련 없이도 정말 웬만하면 정말 좋은 크리스천으로 살 수 있는 영역이 아~주~ 넓다.
문제는..

1.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어서 핑게를 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설득을 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설명들을 더 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2. 이미 알고 있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지만…
그냥 게으름으로 그 말씀을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3. 교회나 다른 단체등에서 받은 신앙교육이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신학적 논증을 통해서 그것을 깨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가을

한국도 그렇고, 미국의 다른 지방도 그렇고, 또 유럽도 장난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덥고 더웠던 여름이 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한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을이 되면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면서 살짝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야말로 가을을 조금 탔던 것 같다.
그때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분명한 지역에 살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계절이 지나는 것에 신경도 쓰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가을이라고 뭘 생각했던 기억이 정말 가물가물…

그런데…
내가 20대, 30대에 가을을 가을로서 누리면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참 내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 경험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종의 특권이었다.
만일 내 20대와 30대가 그렇게 가을을 누릴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면…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여유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그 가을이 되는 멜랑콜리함을 누리는 특권을 잃어버렸을 것 같다.

우리 민우가,
이번 가을을 멜랑콜리하게 누리면 좋겠다.
괜히 짧아진 낮시간, 오후 6시 해가질때 괜히 카페 어디에 혼자 앉아 책을 읽으며 센티멘탈해지는 사치를 좀 부려보면 좋겠다.

그게 어디 우리 민우 뿐인가.
학업, 취업, 생존에 쫓겨 가을을 가을답게 보내지도 못하는 것 같아보이는 청춘들이,
그렇게 가을을 좀 타면 참 좋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망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겠다.

나는 그때 우리 주님 만나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분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우는 것이다.

정말 억울하고 속상하고 마음 아팠던것, 외롭고 두렵 막막했던 것…
그것들 그냥 꼭꼭 가지고 있다가 우리 주님 만났을때 그 보따리 풀어보는 거다.
그리고는 왜 그러셨어요… 하면서 그 억울함 다 풀어내는 것.

그러니…
이땅을 살면서
그 억울함 다 풀면서 살려하지도 말고,
그 외로움 다 해결하며 살려하지도 말고,
그 아픔 다 위로받으려 하지도 말고,
오히려 주님 때문에 서럽고 힘들게 더 살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던 사람들의 회심은?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전서 본문이 시작된다.
기대가 크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어쩌면 바울의 가정 첫번째 편지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를 더 일찍 쓰여졌다고 보는 것 같던데… 어쨌든 바울의 아주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인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바울의 신학 자체가 다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부분도 있지는 않았을까…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그렇게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행전 17장의 전반부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전도사건 이후에 그 곳을 빠져나와야만 했던 것이 데살로니가 전서의 배경이 되는 것 같은데…

그 아주 초기에 바울이 가졌던 생각은 아마도…
그 당시 이미 벌어지고 있었던 성령에 의해서 열려지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현상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한편 바울이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으로서의 깊은 성경에 대한 지식, 아라비아 광야와 그 후에 자신의 경험과 관찰등을 통해서 재해석하게된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
이것이 아주 막~ 얽혀져 있는 단면을 살펴볼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뭐 기대는 이렇더라도 데살로니가를 그렇게 깊게 공부하게되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건가?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은 우리별 1호이다.
그때 우리별1호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사실 거의다 내 바로 위 선배, 내 친구, 내 바로 아래 후배들이다.
내 바로 위 선배, 동기, 바로 아래기수 후배, 함께 교회에 다녔던 친구들이 만든 거다.

기사가 떴는데, 그때 우리별 만들었던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모교에 기부를 했다는 거다.
https://www.chosun.com/economy/science/2022/08/19/YDR74G7DB5EMRP6NUTWGDZXCMU/

참 멋진 선배,친구,후배들이다.

그중 우리 학교 첫 총장이었던 최순달 교수님의 말씀이 기사에 나와있다.
“너희가 공부하는 데 들어간 비용 중 일부는 시장에서 채소나 생선을 파는 할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왔음을 명심해라. 받은 혜택의 곱절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져라”

참 멋진 말이다.
소위 능력으로 경쟁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이런 멋진 이야기를 젊은 학생들에게 해주는 어른은 더 이상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

어린시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가고싶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내 어린시절도 내게 거의 대부분 긍정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린시절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시절에는 생각이 단순해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 하는 걱정을 대부분 하지 않아도 된다. 부모님이 그건 그냥 책임져 주시니까.
또 어린아이들은 조금 더 차원높은 인간관계의 어려움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어린시절이 아름다웠다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그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런 참 난감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자주
‘다시’ ‘돌아감’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다 가치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다시 어디로 돌아간다’는 설교를 하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다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때가 있다.

다시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크리스천에게,
그 첫사랑의 순간보다 지금 너는 훨씬 더 성장해 있고, 너는 지금 다시 그 첫사랑으로 돌아갈수도 돌아가서도 안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게되는 경우가 있다.

어린시절의 그리음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은 참 아름답지만,
그것으로 다시 돌아갈 일은 아니다…

반도체 산업의 부흥?

나름대로 나도 한때는 반도체 공정쪽의 일을 했던 사람인데… ㅎㅎ

사실 한국에서 석사는 그 당시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에 들어가는 capatitor 재료에 대한 것을 했었고,
미국에서 박사는 반도체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플라즈마 에칭공정에 대한 것을 했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석사를 마친 실험실 졸업한 사람들의 아주 대다수가 반도체 회사에 갔고,
미국에서 박사를 마친 실험실의 졸업생중 아주 다수는 역시 반도체 관련 회사들에 갔다.

그런데 내가 박사를 마칠때쯤에는 벌써 반도체관련한 것들은 살짝 좀 유행이 지난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는 한참 ‘나노 테크놀로지’라는 것이 hot하게 느껴지던 때여서 나 같은 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나노 테크놀로지를 한다고 박박 우기는 경우도 꽤 있었다. 나도 졸업을 하면서 job을 찾을때 내 resume에 nanotechnology라는 것을 억지로 넣어서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난주에 Biden 대통령이 앞으로 반도체 생산과 연구 개발등에 $52 Billion (한국 돈으로는 67조 정도 되는건가)을 지원하는 법에 서명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 미국의 여러 학교등에서도 반도체관련 게다가 반도체 공정관련 연구비가 엄청나게 뿌려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그렇게 돈이 몰리면 그쪽으로 사람도 많이 뽑을 가능성도 많고.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미국의 주요 연구중심 대학들에서 전통적인 반도체 공정쪽으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람들도 대개 지금은 나이가 꽤 많을 것 같다.

가령, 내 박사과정 지도교수는 그야말로 전통적 의미로 반도체 공정쪽을 연구했던 사람인데, 그 제자로서 교수를 하는 사람들중 반도체 공정쪽을 계속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없다.

이게 어떻게될지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정말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여러가지 환경들이 다시 갖추어질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꽤 회의적이다.

은혜

“Grace is not opposed to effort, it is opposed to earning. Earning is an attitude. Effort is an action. Grace, you know, does not just have to do with forgiveness of sins alone.”

Dallas Willard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대단한 선언이다.
그러나 그 은혜가 우리의 책임과 행동을 필요로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은혜의 반대말은 ‘노력’이 아니다. 은혜의 반대는 ‘내가 열심히 해서 얻었다는 자세’이다.
기독교에서 노력이 실종되어버린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