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 화이팅~ ^^

그래도 나름대로 KOSTA를 열심히 섬겼었다.

KOSTA 생각하며 기도도 많이 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고, 기쁨도 컸다.

KOSTA일 제대로 못해내는 악몽도 많이 꿨고 ^^

생각해보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우고 전수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늘부터,

후배들이 KOSTA 사역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

뉴욕에 벌써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는 모양이다.

늘 후배들에겐 미안한 마음 하나 가득이다.

함께 하는 것도 미안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우리 섬기는 후배들을 생각하며,

가슴 찡~ 하지  않게 되는 때가 언겐가는 올까?

우리 후배 간사들 화이팅!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2)

자평하건대, 나는 선동가로서의 소질이 많다.

예전에는 manipulative한 나쁜 동기를 가진 선동가의 모습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적어도 내 선동이 나쁜 동기에서서 비롯되는 일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manipulative한 모습은 여전히 내게 다분히 남아 있다. 때로는, 내가 대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manipulation인지, 진정성있는 passion인지 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도 애매할 때도 많다.

이런 선동적인 내 성향은, 나를 대단히 위험한 설교자가 되게 한다.

대중의 상태를 보아가며, 그들을 감정적, 이성적으로 선동하여, 

genuine transformation이 아닌 superficial excitement를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선동적 성향을 가져서 그런지, 내 눈에는 그런 선동가들이 참 잘 보인다. 그리고 그런 선동가들이 대개는 많이 불편하다. 내가 그분들의 선동에 manipulate 된다는 기분 때문일까.

이번 수양회 설교를 하며, 참 많이 흥분했다.

내 아내는 떠나기 전에 “소리 지르지 말라”고 내게 주문했는데, 막상 학생들을 보고 message를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몹시 흥분이 되어 땀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며 때론 울먹이며 열정적으로 message를 하게 되었다.

종교적 엑스타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꽤 많이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다른 글에서 이것에 관해 더 다루어 보겠다.)

….

선동적인 성향을 가진 나도, 막상 설교를 마치고 나면,

내가 단상에서 보였던 모습이 manipulative한 선동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genuine한 passion을 표출이었는지 하는 것을 분별해낼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분별이 잘 되질 않는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의 눈물이… 내 manipulation의 결과였는지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였는지 잘 분별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설교를 마치고 호텔방에 돌아와서는, 한편 감사하고, 한편 뿌듯했지만… 또 한편으론 몹시 마음이 괴로웠다.

Leaving the Big A (7)

Apple은, 정말 막강한 권력을 가진 회사이다.

뭐 결국 그 권력은 Apple이 가진 막대한 돈에서 나온다.

Apple의 직원은, 보통 자기보다 두직급 정도 높은 사람을 상대한다.

말단 엔지니어가, 다른 회사의 부사장 급과 맞장을 뜰때도 있다. -.-;

그렇기 때문에, Apple에 다니면서 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Vendor (하청업체)들이 소유한 기술의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도 요구하면 다 알려준다.

물론 처음부터 다 잘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Apple이 들들 볶고 볶고 또 볶아서… 거의 모든 비밀을 다 말해주도록 만들고야 만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해야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 vendor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다 알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람들을 ‘control’ 할 수 있기 때문이다.

Apple은 vendor들의 기술만을 control 하는 것이 아니다.

가격, 심지어는 profit margin 까지도 control 한다.

가령,

Apple에서 마우스를 만든다고 하자.

그러면 Apple에서 design을 한다. (이것도 이걸 잘 하는 vendor와 함께 할때도 많다.)

A 라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vendor로부터 플라스틱에 관한 모든 기술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B 라는 반도체 chip을 만드는 vendor로 부터 마우스에 들어가는 chip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C 라는 레이저 기술 vendor로부터 마우스에 쓰이는 레이저 기술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D 라는 마우스 조립 회사로부터 조립에 관한 모든 기술 정보와 가격 정보를 빼낸다.

그리고 나서는,

Apple이 서로 그 회사간의 정보교류, 적정 가격 책정, 기술 교류 수준 모든 것을 다 control 한다.

대개는, Apple이 모든 기술 정보를 다 가지고 있고, 나머지 회사들은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갖는다. 기술적으로 종속되기 싶상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vendor들에게 아주 작은 폭의 (쥐꼬리 만한!) profit margin이 남도록 가격을 책정한다. 

그리고서 Apple은 30%의 profit margin을 남긴다.

그야말로 기술로, 돈으로, 거의 모든 것으로…

vendor들을 자기 밑에 종속 시키고,

자신은 막대한 이윤을, vendor들에게는 아주 소폭의 이윤을 분배해준다.

현대판 지주와 소작농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일을 즐겼을까? No way…

내가 이런 일을 잘 했을까? Oh… Yes…

나는 그런 내가 몸서리치게 불편했다.

수양회 설교를 마치고 (1)

이 블로그에서 쓴 것과 같이, 지난 주말, 미국 중부의 어느 교회의 청년부 수양회에 강사로 다녀왔다.

참 오랜만에 그런 세팅에서 설교를 했는데, 나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A 회사’를 떠나는 내 transition에 관련된 시리즈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주말 수양회 설교를 하면서 느낀 점들이 많아, 

두가지 시리즈 글을 한꺼번에 써보기로 하겠다.

우선 내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은 이것이었다.

‘무조건 기본적인 것을 다루자’

그래서,

그쪽 교회 청년부에서, Vision, Calling and Life 라는 주제로 이야기해주었으면 하고 부탁했을때,

‘Calling’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대한 내용으로

‘Vision’은 이 땅에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대한 내용으로,

‘Life’는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내용 (Lordship)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었다.


내 나름대로,

적어도 내 생각에,

내 신앙의 기본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룬 셈이다.


순전히 나타난 ‘결과'(?)들만을 보면,

설교의 방향도 잘 잡았던 것 같고, 

사람들의 반응도 만족스러웠다.


그동안 그 청년부에서 여러 리더들이 마음을 많이 쓰면서 복음을 소개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수련회 마지막날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로 영접하겠느냐는  초청에 참 많은 사람들이 응답하였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너무 자의적인 신앙 생활에 매달려 있다고 고백/회개 하고, 새롭게 신앙을 재정비 하겠노라고 일어서서 헌신하였다.

message를 마치고, 눈물 범벅이 된 청년들이 내게 찾아와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마치고 난 지금,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Leaving the Big A (6)

장로님 S씨를 접하면서, 나는 참 여러가지 질문이 생겼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질문이 생겼다기 보다는 있던 질문이 깊어졌다.)

1.

과연 S씨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S씨는 과연…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죽어서 천당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좀 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나라 복음의 그 큰 scale의 내용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복음, 신앙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정말 그런 복음을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2. 

많은 경우, 우리는 ‘악인’을 규정하고 그 악인을 정죄하는 것으로 신앙적 행동을 define하곤 한다.

그런데, 이토록 심하게 깨어진 세상 속에서, ‘악인’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한 걸까?

시편에 그토록 나오는 ‘악인’에 대한 정죄와 절규는 이런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좀 더 많이 stretch 해서, 히틀러는 악인일까? 스탈린은? 김일성은? 

그런 사람들과 나 사이에 과연 어떤 간극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3.

무능함/무지함은 악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S씨가, 정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지해서, 복음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고 하자. 그래서 나름대로의 의도는 선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남기는 일들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S씨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는, 결국 악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일종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악함’이라고 define 하는 것은, 대단히 초실용주의적 어긋난 접근이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수양회 설교

참 오랜만에,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전 직장에 다니면서 여러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럴 기회에 적극적으로 involve 하지 않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신앙/신학적 고민이 나름대로 깊어, 마음을 담아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하는게 자신이 없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 수양회 강사로 가는 이 교회로 부터는,

작년 수양회에 한번 초청을 받았다가 거절했는데,

이번에 또 한번 부탁을 받아 정말 딱 잘라 거절하기가 많이 어려웠다.


작년 11월에 부탁을 받고, 정말 많이 많이 망설이다가, 

순전히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가기로 약속을 했다.


이번 수양회 message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 힘들었다.

12월 마지막주말까지 설교 개요와 소그룹 성경공부 discussion 자료를 보내주기로 했는데, 결국 deadline을 넘겨야 했다.

어떻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아주 막막하게 느껴지는 기간이 아주 길었다.


결국, 복음의 개인적 차원, 복음의 거시적 차원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헌신함 이렇게 세번의 message를 하기로 가닥을 잡고, 정말 막판까지 message 준비를 하고… 

이제 오늘 저녁 message를 시작으로 수양회를 시작한다.


가끔, 아주 자신있게 message를 준비하고 갔다가 그야말로 영~ 별로인 경험을 하기도 하고,

혹은 별로 자신없이 준비하고 갔다가 하나님께서특별히 함께 해 주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이 심겨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참 오랜만에,

정말 자신없이… 설교하러 떠난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긍휼함을 베풀어 주시길…


(시리즈 글은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

Leaving the Big A (5)

처음에는, 그 manager S씨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악한 사람’으로부터 나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내고, 또 그 ‘악한 사람’과 싸우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이 싸웠다.

S씨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데리고 나가서 밥을 사주며 힘내라고 격려해주는 일을 하기도 했고, 

그중 크리스천인 한 동료는 힘들어 할때, 회사 parking lot에 데리고가서 손잡고 기도를 해주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라고 나를 여기 보내셨나…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내가 회사를 떠날 때, 그렇게 나와 시간을 보냈던 동료들이 참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데, S씨 안에 있는 ‘나’를 보게 되면서, 그 사람이 좀 더 이해되기 시작했다.

왜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사는지, 어떤 생각의 process들이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등등…

그러면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무지.

이건, S씨가 흔히 시중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아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의미, 사람됨의 소중함,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등등…

정말 포괄적인 진리의 다양한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S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많이 알게 된 것은,

이 사람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나름대로 이렇게 하는 것이 대단히 신앙적인 결정과 행동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내 직장 동료 중에는,이 manager 때문에 depression에 빠져서 큰 고생을 하다가 직장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 직장 동료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회사 나오기 직전에 S씨와 나눌 기회도 만들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어. 성공이 바로 이렇게 눈 앞에 있는데 그걸 그만두더라고…

과연 S씨는, 악한 사람일까, 아니면 무지(그래서 무능)한 사람일까?

이것은 지금까지도 내게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Leaving the Big A (4)

그런 manager와 함께 일하는 것은 참 힘들었다.

게다가 그런 장로님 manager와 일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S씨를 대단히 싫어했다. 거의 증오에 가깝도록 싫어했다.


그렇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내 manager를 싫어하다보니, 아무래도 내가 일을 하는데에도 여러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그 team의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고, 내 agenda의 순수성을 의심받을 때가 많이 있었다.


사실 S씨를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S씨의 boss는 S씨를 매우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S씨는 그 boss에게 정말 잘했다. 그 boss에게 하는 presentation material을 준비하기위해, 자기 아래에 있는 직원을 들들 볶고 볶고 또 볶아서.. 그야말로 최고의 것을 준비해갔다. 


함께 식사를 할때, 그 boss의 컵에 무엇이 묻어있는 것을 보자, 자신의 것과 얼른 바꾸었다. 이게 그 boss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boss를 잘 위해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그런 S씨와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 내 ambition 속에서 있었다면, 나는 아마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심한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거의 명확해 보였다.

아니,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의 내게도,

정말 그런 모습은 너무 자명하게 보였다.


S씨와 기분 나쁜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올 때 마다,

나는 마치 거울을 보고 이야기한 것 같은 느김을 받곤 했다.


실제로,

내가 가정에서, 친구와의 관계에서, K 운동을 섬기면서, 교회에서, 성경공부 모임 등등에서,

그 manager와 같은 모습을 보였던 많은 장면들이 마치 slide show를 보는 것 같이 지나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기도를 좀 깊이 하고 싶어 엎드리면 그런 여러 기억들이 나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괴롭게 만들었다.

그처럼 S씨가 힘들었던 이유는, S씨는 바로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Leaving the Big A (3)

Apple을 떠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내 manager S 씨 때문이다.


뭐 다른 이유가 아주 복합적으로 얽혀 있긴 하지만, 만일 내 manager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apple에서 더 일하기로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manager S씨는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실 학벌은 대단히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제를 참 잘 분석해 내고, 그것에 대한 solution을 빨리 이끌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몇가지가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우선, 아주 극단적으로 micro manage를 하는 사람이었다. 밤 11시에, 전화로, presentation file의 font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한다며 나와 argue를 하곤 했다. 그리고 결국 밤 1시가 되도록 나는 presentation file을 다시 만들어야 할때도 있었다. 

자신에게 미리 보여주지 않으면, team 밖이 어떤 사람과도 discussion을 하지 말도록 요구 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discussion이 벌어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discussion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discussion을 하자고 해놓고, 자신의 주장을 하다가, 얘기가 안되면, 그냥 내 얘기대로 해… 이렇게 되는 때가 많았다.

이런 자세는, 내게서 소위 ‘일하는 재미’를 완전히 빼앗아 가 버렸다. 늘 일이 ‘내 일’이 아니라 ‘내 매니저의 일’이 되어 버렸다. 

둘째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그러다보니, 다른 팀과 이야기할때 늘 우리 팀의 나쁜 점을 감추고 좋은 점만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도록 micro manage를 하곤 했다. 많은 일을 하는 주된 driving force가, 더 진취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빵꾸 안나도록 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많았다.

(사실 이것은, 이 S씨만을 blame 할 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적어도 내가 일했던 쪽의 apple의 culture는 사람들이 그렇게 defensive 해지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다른 글에서 좀 더 이야기해보겠다.)

세째, 대단히 arrogant 한 사람이었다. 

(교만은 늘 열등감의 다른 표출이되곤 하는데, 이 사람에게도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잘 하는가를 내세우는 것을 즐겼는데, 그렇게 하기위해서 말하는 대상을 깎아 내리는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한 engineer가 그 밑으로 들어왔는데, 그 사람에게 심한 모욕과 경멸감을 주도록 이야기하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정말 나는 피가 부글부글 끓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 동네 어느 한인 교회의 장로였다.

여름에 휴가를 내어서 중남미 선교여행을 가기도 하고,

아침이면 새벽기도에 갔다가 출근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기도해 봤는데 그건 아닌거 같다…

오늘 아침 QT를 했는데 네가 여기 계속 남도록 더 얘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S씨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 며칠동안 계속 더 쓸 생각이다. 그러나, shallow한 level에서 S씨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사실 S씨와의 만남은, 나로 하여금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데에도 말로 다 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다.)

Leaving the Big A (2)

처음 apple에 들어갈 때 내 상황은 대충 이랬다.

열정을 가지고,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다고 생각했던 start-up company가 사실상 망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고민과 생각을 참 많이 했었는데, 여러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었다. : 내가 정말 marketplace의 language를 제대로 잘 모른채 start-up company를 하겠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침, apple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apple에서 일해볼 생각 없느냐고.

나는 나름대로 고민하다가, 그렇게 가기로 결심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에서, 딱 1-2년만 일 제대로 한번 해보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기회를 허락해 주시면, 이 start-up으로 다시 돌아와서 다시 한번 해보리라.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서, 제대로 한번 배워보자.

나는 apple에 가면서도, 거기서 뭔가를 제대로 잘 해보겠다는 자세로 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 일하는 와중에도, 조금씩 짬(?)을 내어서, 나는 하던 start-up company의 business direction에 관한 conference call에도 (일주일에 3번씩) 계속 참여 했었고, 그 start-up company를 살려보기 위해서 이 동네의 다른 회사 사람을 만나기도 했었다. – 그러나 그 start-up company는 결국 작년 7월 말경에 최종적으로(?) 끝났다. 뭐 좀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 회사 자체는 아직 살아있기는 한데, 사실상 그 불씨를 다시 살리기는 이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 등등을 제대로 추스리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apple에 일하면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한번도 제대로 ‘apple 사람’이 된적이 없었다.

apple을 떠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