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llow Passion?

예전에 이 블로그에 쓰기도 했지만,

나는 한때…

내 나름대로는 ‘주님을 위한 열정’을 주체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복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혼자 아무도 없는곳 까지 차를 타고 가서, 차 안에서 소리치며 기도하고 복음을 외쳤을 때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고, 주님과의 동행이 길어지면서…

그때 그 열정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을 위한 열정이었다고 백보 양보해서 인정을 한다 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시시콜콜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외쳐야’했던 ‘불’이 마음 속에 있었다면…

요즘은,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 그리 쉽게 밖으로 뿜어져 나오질 않는다.

우선,

내 한계에 갖혀 경험한 주님이 너무 제한적이라는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이고,

또한….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한 것을 다시 시시콜콜 풀어내는 것이 너무 천박하다고 느껴진다고나 할까.

신앙의 영역에서 경험한 초월과 신비가, 언어로 표현되면서 마치 식어버린 군만두 같은 느낌을 주게되는 것 같다.

한편…

내가 shallow한 passion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으로부터 grow 했다는 것은 기쁘고 감사하지만,

또 한편…

주님의 복음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뼈가 녹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던 예레미야의 passion이 네게 어떤 모습으로 자리해야 하는 걸까 하는 해답이 없는 것은 혼란스럽다.

참…내…

이만큼 주님을 믿고 따랐으면 그래도 좀 어느정도는 통달(?)할 수 있는거 아닌가.

아니 주님께서는 가끔 한번씩… 내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붙들었던 것을 확~ 흔드시면서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시는데…

이거 참… 

주님이 도무지 내 장단을 맞춰 주시지 않으니,

내가 주님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마주치신 본문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온다.

그때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하나 떠나가고,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이 본문을 생각해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시기 전에,

먼저 그럴 정죄하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군중을 향해,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하심으로써…

그들이 먼저 돌을 놓고 돌아가게 만드신다.

교회 내에서도,

정말 정죄가 난무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저 상황의 피해때문에,

억울한 사고 때문에,

능력의 부족 때문에…

혹은 이런 것들의 조합으로, 

많은 정죄를 받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받는 정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너무나도 자주, 내가 정죄하는 입장에 서곤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너무 나도 자주.. 그냥 automatically 정죄라는 못된 버릇이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

정죄의 피해자들에게,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 당신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제 안에 있는 못된 악의 습관이 나와서, 당신을 정죄하는 것 같이 반응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는 제 잘못된 자아 입니다. 사실 그놈은 벌써 죽은 놈인데… 가끔 그렇게 발악을 하곤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당신을.. 정말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주님, 제게… 정말 죄가 없다면 그 사람을 돌로 쳐라 라는,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제게도 좀 아프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옛 자아 라는 이 못된놈이… 자꾸만 정죄라는 죽음의 카드를 빼어 들곤 합니다.

이렇게 요청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요즈음,

주님께서 그런데 정말 그 질문을 던지신다.

“네가 정말 죄가 없느냐?” 

나는 

허걱… 

저는 당신을 수십년간 믿어 왔고,

당신을 위해 헌신했고,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질문을…

“너는 죄가 없느냐?”

아…

음…

아….

음… 주님…

….

그렇게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저는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주 아주… 제 자신으로 봐서는 소망이 없는…

그 질문을 깊이 이렇게 받고서야 비로소,

제게 깊이 스며들어 있는 정죄의 나쁜 습관이 약간 치유되는 듯 합니다.

Do I miss Boston? Sure I do!

최근,

보스턴의 어떤 회사로부터 올 생각이 없느냐는 요청을 받았었다.

사실은 회사라기 보다는,

내 예전 직장 상사였던 사람이 보스턴의 어떤 회사의 부사장으로 가면서 나를 자기 팀에 불러오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쪽으로 이사하게 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래 저래 보스턴 생각을 다시 많이 하게 되었다.

내가 보스턴을 그리워 하는 걸까?

지금쯤 보스턴은 막 단풍이 시작하려하는 시즌일테고,

찰스강가에는 초가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때, 던킨 도넛 헤이즐넛 커피는 더욱 맛있게 느껴질 테고,

아참… 금년에는 Fenway Park에서 Red Sox 경기가 10월 내내 열리게 되겠지!

바닷가에서 사먹는 clam chowder, 

Rock port 해안가의 예쁜 상점들과 작은 등대,

별로 friendly 하지 않은 보스턴의 지하철 T.

음… 

보스턴이 그리운건 정말 맞는 모양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다 난다.

보스턴에서 나보고 오라고 하는 그 사람은,

너를 불러오는건 내가 괜히 이기적인 욕심은 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라며… 

이야기했지만,

지난 한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는,

내가 보스턴으로 훌쩍 이사가고 싶어하는 것은, 

내 이기적인 욕심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든것도 사실이다.

I surely miss Boston a lot! 🙂

가슴을 뛰게 했던 clip

예전에 youtube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는데,

예전에 왜 미국이 위대한 나라였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미국에서는,

양당이 government shut-down을 놓고 chicken game을 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파렴치한 보수정파와, 무능력한 진보정파가 맞서도 있는 상황.

Liberal과 Conservative의 frame이 몹시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요즘… 다시 한번 생각을 자극하는 clip.

(이 앵커의 comment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논의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대화가 될 수도 있을 듯.)

영지주의로부터 배운다? –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전서의 고난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

Disclaimer: 나는 영지주의를 절.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영지주의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참~ 많다.

피조세계가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도 아주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육체’는 그것 자체로 칭송받기에 매우 어려울만큼 죄로 물들어 있는 존재이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 예수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육체’ (혹은 피조세계)에 물들어 있는 죄를 소멸시키시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고난을 통해 그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고, 죄악된 육체를 소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러면 다음의 성경의 내용들이 훨씬 더 잘 설명된다.

– 우리의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개념

– 고난을 통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선이 될수 있다는 개념

– 아무런 자신의 죄와 무관하게 받는 고난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질병, 상황의 변화 때문에 겪는 고난 등등)

혹시 시간이 좀 있다면,

소위 ‘주류’ 신학에서 육체를 악한것으로.. 정말 많이 악한 것으로 여기고, 그 육체의 죄를 소멸하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설명한 입장이 있는지 좀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이런 것에 대해 좀 아시는 독자가 계실른지? ^^

나를 표현하자? – 겸손함이 실종된 시대

facebook을 보면, 셀카가 난무한다.

뭐 굳이 셀카가 아니라 하더라도 먹은 음식 얘기, 여행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 등등 ‘자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좀 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깊이 있는 생각과 고민을 나누기도 한다.

뭐 내가 쓰고 있는 이 블로그도 다르지 않다. 결국 내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어른 그리스도인이었을 시절만 하더라도,

정말 겸손한 크리스찬을 종종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뭐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유교적 겸손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이 무익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런 겸손함.

사람이 완벽할 수 없으므로, 사람의 겸손함 역시 완벽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그런 겸손함을 virtue로 여기고 그것을 더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요즘 정말… 그렇게 ‘겸손한’ 사람 찾기가 참 쉽지 않다.

그중 특히 위험한 사람은, ‘옳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를 개혁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부류의…  

이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기 때문에, 다른 옳지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자신을 돌아보며 겸손한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내 주장을 펴고,

나를 표현하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균형을 이루어야할 반대 방향의 균형 추가,

현대 기독교에서 상실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그리고,

내게도 역시 그 겸손이, 진실한, genuine한 겸손이 사라져 버린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해본다.

찬양

하나의 씨앗교회찬양인도자가, 휴가를 떠났다.

그래서, 졸지에 내가…

지난주일과 이번 돌아오는 주일에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주와 이번주… 찬양 곡집을 뒤적이며… 기타를 치며 혼자 집에서 찬양을 부르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아… 이게 참 좋다.

참 오랜만에 내 삶에서 찬양이 살아난 느낌이다.

지난 주말에 정말 열심히 본 비디오

지난 주말에,

몸과 마음이 많이 피곤해져 있는 와중에,

다음의 비디오가 활력을 주었다. ^^

정말 재미있었다!!!

나는 정말.. 많이…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때 읽은 특수상대성이론을 설명한 과학문고 한권을 읽고는 완전히 빠졌었다. 그 이후로 완전히 그것에 팍~~


그런데,

대학에 가서, 친구들이 과를 정하는 것을 보니까… 

각 과학고등학교 수석+상위권들이 다 물리과를 가는 것이었다!

아… 저기 가면 나는 뼈도 뭇추리겠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뭐 그냥 많이 아쉬워하며 재료과를 선택했다. 재료과에서는 고체물리 같은거 많이 좀 하는 줄 알고. ^^

이런 비디오를 보면서,

아.. 그래… 내가 민우만할 때, 

난 정말 커서 이런거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가슴 싸~ 한 기억이라고나 할까… 그런게 몰려왔다.

그렇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재료과 선택한 이후 그 나름대로 신실하게 인도해오셨던 것 같다.

때로는 내 적성과 맞지 않는 것을 하느라 애를 먹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예전에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엉뚱한 선택을 할때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의 길을 잘 인도해주시며…

그분이 내 하나님 되신다는 걸 참 징~ 하도록 가르쳐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이 물리학 관련된 비디오를 보고나서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는 따뜻한 분이신 적이 있었나?

내 신앙과 삶의 여정을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는 분이시라기 보다는,

계속 흔드시고, 훈련시키시고, drive 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를 처음 접했을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에 사로잡혀 많이 울고 울고 또 울었지만…

그 후 하나님께서는…

늘 나를 들들 볶으시는 분이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깊은 죄의 뿌리를 정말 고집스럽고도 끈질기게 다루시는 하나님.

가끔,

삶이 무겁게 느껴지거나,

사람들로부터 아픔을 당했거나,

여러가지 부담 때문에 힘들 때에는…

때로 하나님께서 너무 그렇게 나를 심하게 하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하나님은 “immovable mover” 이신게 분명하다.

꿈쩍도 않으신다.

주변의 많이 힘든 어떤 사람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내게 대하시는 것 같이 그렇게 harsh하게 대하지 마시고,

좀 부드럽고 따뜻하게 해 주셨으면…

그런 바람을 좀 가져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