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솔직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노래이다.

지나치게 가사가 shallow 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게다가 이게… 잘못된 곳으로 mislieading할 가능성도 많다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오늘 그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 보면서…

그리고 두해 전에 태어난 내 하나밖에 없는 조카를 생각하면서… (내일이 고놈 생일이다 ^^)

아… 이 노래는 고놈에게는 불러줄 만 하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가,

무엇보다도,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제대로 알며 크면 참 좋겠다.

narcissistic하게, 혹은 shallow하게 그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통해,

뼈속 깊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지 않(던) 이 노래의 가사를,

내 조카의 생일에 마음을 담아 보내고 싶다.

시편 1편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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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의 번성함을 보고, 하도 복창이 터지고 속이 쓰려서…

시편 1편을 보다가, 문득 공동번역이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해서 찾아 보았다.

아.. 이거 참 맛깔나게 번역했네.

나름대로 그래도 시 같은 맛을 살리려고 노력하며 번역한 흔적이 보인다.

악인의 번성함을 보며,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한 마당에…

시편 1편의 내용과 더불어, 그 번역의 신선함에 잠시 refresh 되다.

기도가 깊어질때

말씀을 연구하는 일은,

좀 부지런히 힘을 내면 그럭저럭 되는 것 같은데…

기도가 깊어지는 것은 참 다르다.

지금껏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기도의 깊이가 깊어졌던 과정은,

gradually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몇번의 quantum jump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 같다.

처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지 대략 1년 반 남짓 지났을 때, 

열정적 종교생활에 약간 burn-out이 되고, 그와 함께 학교 생활 속에서의 어려움이 겹쳐졌을때.

내 탄식이 깊이 있는 기도가 되는 경험을 했다.

처음 코스타 집회를 갔다 온 후, 

교회 청년부 아이들과 함께 새벽기도를 했을때…

가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뜨거움으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반복해서 기도하는 경험을 했다.

이때 방언도 하게 되었고, (그런데 사실… 나는 방언의 유익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

일종의 신비체험도 좀 했다.

그러다가 한동안,

소리쳐 기도하는 일이 딱~ 막혀버리는 기간을 겪었다.

아무리 소리내서 기도하려 해도 그게 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깊이 주님과 머무는 기도를 하는 경험을 했다.

최근,

주변 여러 사람들의 고난을 간접으로 경험하면서,

일종의 영적 침체를 겪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나와 내 주변의 죄를 보며 느끼는 중압감 등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도를 하는 기간을 좀 지냈다.

(사실 아직도 좀 그런 기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간을 거치며 기도가 조금씩 깊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아직도 내 기도의 깊이가 영… 마음에 차질 않는다.

분명히 이것보다 더 깊은 무엇이 있을 텐데…

기도가 겨우 이런 수준이 아닐텐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죄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죄의 무게가 정말 말도 다 할수 없이 무겁기 때문이다.


삶의 궤적 속에서,

잘못된 결정, 죄에 이끌린 선택 등등을 사람들은 반복해서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에게 필요한 첫번째 말은,

그 잘못에 대한 지적이나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러실 필요가 없는데, 

그 망가진 세상을, 자신을 저버린 세상을 향해 가슴을 찢어가며 아들을 내어 주셨다.

마음이 무너져, 몸이 아픈 이에게,

몸이 아파 마음이 무너진 이에게,

하나님을 너무나도 피상적으로만 만나기에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를 기피하는 이에게,

깊은 침체 속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구원을 바라고 있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를,

제발 누군가가 좀 해주길…

정말 그러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들이 제발 좀 귀를 열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을, 온 가슴으로 받아들이길 기도한다.

아빠, you are very predictable

민우가 내게 잘 하는 말이다.

아빠는 매일 청바지에 셔츠 입고 회사가고,

민우를 학교 데려다줄 때 똑같은 말로 인사하고,

민우와 엄마에게 똑 같은 농담하고, 똑 같은 장난 치고,

똑같은 음식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아 하고,

똑같은 헤어 스타일에,

똑같은 표정…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하는 것이 매우 predictable하단다.

뭐 내가 그렇다는거 fully 인정하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대단히 predictable한 아빠가 되는 것이 민우에게 과연 좋은 것일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은 좀 고민이 된다.

내 연극 동아리 실패담

1.

대학때, 나는 연극을 꽤 열심히 했었다.

시간만 나면, 대학로를 다니면서 연극 대본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고,

극단에 찾아가서 한수 가르쳐 달라고 해서, 연극 배우가 직접 학교에 와서 연기 지도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기본기에 충실하게 연극을 배웠다.

발성법, 무대 동작, 소품 만드는 법 등등…

2.

나는 학교가 신생 학교여서, 전통이라는게 없었다.

동아리도 뭐 그냥 몇사람이 모여서, 우리 동아리 만들자 하면 만들게 되는 거였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같은 활동을 하는 여러개의 동아리가 생기기도 하였다.

연극도 두개의 동아리가 생겼다.

우리가 속한 A 동아리는, a 과학고 출신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고,

우리 라이벌 B 동아리는, b 과학고 출신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졌다.

이 두 동아리는 분위기가 꽤 달랐다.

우리 A 동아리는, 연극 자체에 집중했다. 소위 본질에 집중한 거다. ^^

연극에 대해 토론도 하고, 연극을 차근차근 열심히 배웠다.

옆 B 동아리는, 함께 몰려다니며 엄청 술을 마셨다. ^^

그러다보니 솔직히 그쪽에서 올리는 연극은… 살짝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다.

우리는 그게 늘 자랑스러웠다. 우리는 본질에 충실한, 연극을 더 잘하는 그룹이라고.

3.

우리 A 동아리는 그런데, 계속 a 과학고 출신들이 들어왔다.

거의 a 과학고 동문회 분위기의…

그러다보니, a 과학고에서만 통하던 농담 그런것도 많이 하고… 

점점 a 과학고 출신 아닌 사람들은 들어오기가 좀 힘든 모임이 되어갔다.

B 동아리는,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뭐 술마시고 노는게 큰 일이었으니.. 당연히 오디션 같은거 보더라도 문턱도 낮았고, (우리는 오디션 진짜 깐깐하게 했었는데… ㅎㅎ)

2년 정도가 지나자 b 과학고 색깔은 거의 없어졌다.

4.

내가 학교에서 졸업한지 벌써 20년이 훨씬 더 지났는데…

지금 찾아봤더니, A 동아리는 아마 버얼써 없어진 듯 하고, B 동아리는 아직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본질에 충실했고, 나름대로 그것이 자랑스러웠으나…

쪼그라들어 소멸했고,

저쪽은 기초도 부족했고, 우리는 그것을 우습게 여겼는데…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

(기독)운동, 교회, 회사, 가치, 사람 등등을 생각하며…

나는 내 실패담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요한 것 보다 더 망가진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소위 ‘갑’ 이다.

이게 보통 갑이 아니고, 완전히 울트라 짱 수퍼 갑이다.

이 회사가 가지고 있는 cash가, US government가 소유하고 있는 cash보다도 많단다.

이 엄청난 돈의 힘으로, 정말 무지막지한 권세를 휘두른다.

그러다보니, 나 같은 엔지니어에게도 꽤 큰 파워가 있다.

가령, 내가… vendor들에게 이야기하는 말투는 이런거다.

“내일 아침 몇시까지 무슨 데이터를 준비해서 보내라. 이번 데이터는 매우 중요한거다. 지난번 처럼 빼먹는 것 없이 꼼꼼하게 해라.”


vendor들이 나에게 하는 말투는 이렇다.

“우리가 논의해보니 이런것들이 위험요소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을 부탁한다.”

“원하는 데이터를 바로 보내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여기 요청한 데이터를 보낸다. 검토해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더 요청을 해주길 부탁한다. 이렇게 함께 일할 수 있어 기쁘다.”



관계가 이렇게 되어있다 보니,

vendor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아주 가관이다.


vendor들은 잘 대해주면 안돼. 걔네들은 하루에 한번씩 혹독한 이메일로 독촉을 하고, 이틀에 한번씩 전화를 걸어서 따져야 일을 제대로 한단 말이야. 

뭐 이런 식의 태도를 아주 흔히 접한다.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힘이니까..

그 돈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구조가 되기 마련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그 어그러진 구조 속에서 살아 가면서,

적절한 수준으로 망가지는 법이 거의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이용해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이…

망가진다.

이렇게 소망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복음이다.

신명기를 읽어내려가며 생각한 한가지

요즘 내 QT 본문인 신명기는,

노예로 수백년간 살았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이드해주는 모세의 설교집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백성이 어떤 모습인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원하셨고, 

신명기에는 하나님의 그 마음이 들어나 있다.

그런데,

신명기를 읽어내려가다보면,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진보적 지식인이 동의할 만한 내용이 참 많이 나온다. ^^

사람에 대한 배려, 생명에 대한 존중, 생태계 보호,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 등등.

OK…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자세와, 

샌프란시스코의 진보적 지식인이 살아가는 자세가 이렇게 비슷하다면…

무엇이 그 둘을 다르게 만드는 걸까?

결국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과 자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반면,

샌프란시스코의 지식인은, 그렇게 살아감으로서 얻어지는 결과/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삶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결국 이 땅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것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자세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 이후는 하나님의 몫이다.

진보적 지식인에게 있어서는,

건강한 삶의 자세들을 통해 결국 원하는 목표를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야만 한다.

따라서 삶의 자세는 목표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는 과정은 그 의미가 심각하게 diminish 한다.

….

소위 ‘지식인’ 이라는 부끄러운 옷을 입은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기 보다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고자 하는 때가 자주 있는 듯 하다.

기독지성인들이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은,

우리 삶의 열매를 우리 힘으로 맺고자 하는 욕심이 아닐까 싶다.

삼위일체?

음…

이거 잘못하면 이단 삼단으로 몰릴 수 있는 언급이긴 한데…

최근 ‘삼위일체’ 라는 것이 과연 기독교의 핵심 교리여야 할까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만일,

예수님과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급’의 Godhead가 아니라면 어떨까?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의 ‘신성'(divinity)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접근과 점검이 필요할 것 같은데,

특별히 구원론적 차원에서, 기독론적 차원에서 이 내용이 많이 궁금해졌다.

이런 종류의 건강한 debate이 있는 자료등이 어디 있을까?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 ㅎㅎ)

아는 얘기를 또 듣는 이유는?

지난 토요일 아침,

나는 인터넷에서, NT Wright에 대한 강의 하나를 들었다.

내가 그걸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아내는,

그거 다 아는 거 아니냐고, 저 정도는 당신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음…

뭐 내가 그분만큼 강의를 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아는 것이긴 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걸 그렇게 듣고 있었을까?

그걸 들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음… 다음의 몇가지 관점에서 그 강의를 들었던 것 같다.

–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강사가 얼마나 잘 정리하는지 (강사의 강의 능력 평가랄까..)

–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내 지식에 대한 재 확인/검증

–  혹시 내가 그런 비슷한 류의 강의를 한다면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하는 것에 대한 idea 수집

…결국 나는,

그 강의를 통해 어떤 새로운 것을 더 배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가끔은,

내가 설교를 듣는 자세도 그런 것이 아닐까 반성을 해본다.

내가 설교를 그런 자세로 듣지 않으려면 다음 몇가지 가운데 한가지 부류여야 한다.

– 설교자가 늘 내게 새로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것을 가르쳐 준다.

– 설교자의 통찰이 늘 많이 앞서 나가 있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그 깊이에 반복해서 감동한다.

– 그렇지 않으면… 설교가 communal 한 것이어서, 함께 공동체가 마음에 담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소위 설교 잘하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쉽게 질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설교가 communal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