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한 사람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자신이 미성숙하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교회의 문화에 익숙해서,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많이 미성숙하다…
하는 식의 말을 하지만…

사실 이들과 정말 마음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보면,
자신이 전혀 미성숙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거나…
심지어는 다른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성장 자체가 멈추어버린 상태에서 몇년, 십몇년, 심지어는 수십년씩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성장/성숙에의 자극을 주는 것 자체도 매우 힘들다.

이런 사람들과 만날때마다,
나는 섬뜩하게…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신앙의 핵심이 아닌, 문화와 껍데기에 익숙해져 안주해버리는 모습,
피상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구체적이지 못한 삶,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선한 생각’들을 스스로 곱씹으며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나의 미성숙함을 내가 바라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늘 두렵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살아가다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나보다  어른이거나, 나를 감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나보다 미숙한 사람이다.
혹은, 분명히 나보다 현저하게 미숙한데 계속해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과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점점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때로 ‘어른’의 위치에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돌보는 사람들이 나에데하여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점검해보게 된다.

더 어렸을 때에는…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이젠 그런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

운동체 (안상현)

맥스 드프리의 “권력없는
리더쉽”(Leading without power)에서 운동체에 대한 부분이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내가 섬기는 곳은 다
운동체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이면서 유능한 경영자요, 또 많은 비영리 단체의 리더쉽으로 활동한 저자의 경륜이
엿보인다.

“운동체란, 미래는 그저 겪으며 인내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창조할 수 있는 것임을 모두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집합적인 정신 상태다.”(p. 27)


운동체에서는, 굉장했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또한 관계들에 대한 이야기와 뜻밖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들의 교육방식이다. 그들은 과거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방편으로 이야기를 한다.
운동체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번창한다….. 이야기들은 운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 자체가 우리의 뜻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며, 억지로 무엇을 강요하고자 하는 유혹을 크게 감소시켜 주기 때문이다.”(p. 28)

“운동체에서는, 이야기들이 그 단체에 생기를 주는 반면, 보통 단체에서는 이야기들이 사람을 조작하는 역할을 한다.”(p. 33)

“운동체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는 관료적인 것보다 실체에 더 확실하게 헌신한다는 것이다.”(p. 30)


운동체의 놀라운 측면 중의 하나는 자유로움 가운데서도 잘 훈련된 일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운동체가 그저 하나의
조직체로 뒷걸음질치는 경향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에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 즉, 그 경우에 사람들은 이해 득실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하며, 모호함보다는 편안함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또 도전보다는 통제를 찾는다(독특성보다는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언제나 더 쉽다). 개인의 은사를 존중하기보다는 업무 분장을 더 신뢰하기 시작한다.”(p. 31-32)

“운동체는
리더들이 그 집단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책임지도록 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을 때 아픔을 겪는다. 리더들만이 집단 전체에게 스스로와
다른 집단들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운동체는 또 하나의 그저 그런 단체로 되어
버리고 사기가 떨어져 운동체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 운동체를 위하여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사람은
그가 되어 가는 모습(who we become)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라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진리를 상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p. 34)

http://sssam95.egloos.com/174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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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현 간사님의 블로그에서 가지고 왔는데…
얼핏 이렇게 보면 그래도 우리 코스타 간사들을 아직까지는 건강한 것 같기도 하고…..

조직은 그냥 가만히 두면 근본주의적 원리가 강화된다 (이정희)

조직은 그냥 가만히 두면 근본주의적 원리가 강화된다. 근본주의적 원리가 조직을 운영하는데 편리하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런 방향으로 원리를 수렴시키는 것을 쉽게 있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조직을 운영할 대응 조치를 취할 기제를 조직 내에 만들어놓지 않으면 그런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다양성이라는 , 리더쉽이 미리 계획하고 지속적으로 그것을 담보하려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눈덩이가 아래로 굴러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조직운영의 방식은 근본주의적 원리로 수렴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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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지금의 코스타도 그런 상황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많이 된다…
가끔은…


떤 단체나 조직이 그 단체나 조직의 생각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곁에서 안타까워하는 일들이 있는데, 어제 몇분들과
밤에 conference call을 하면서… 지금의 코스타가 그런 오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싶었다.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10사람

내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사람을 뽑아보면,
내 인생이 어떻게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인다고…

그래서 나도 한번 뽑아보았다. (무순)

1. 김수영 자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을 통해서 나는 인생이 내가 생각해온 것 이상의 dimension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 내 부모님
I have the best parents in the world! 나는 이분들에게서 ‘정신’이 ‘물질’에 우선하는 것을 배웠다.

3. 김교신 선생
이분의 무교회 사상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분의 영향은 내게 매우 컸다.

4. 김인수 교수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가 불과 3-4번정도에 불과했는데, 그러나 이분이 나누어주신 삶의 자세와 하나님에대한 시각은 정말 탁월했다.

5. 장성욱 목사
Steve
Chang 이라고… 한국말을 잘 못하시는 1.5세 당시 전도사님. 내가 석사1년차때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임시 목회자로
섬기셨는데, 나 하나를 위해 새벽에 서울에서 차를 몰고 오셔서 나와 함께 아침 7시 QT 모임을 하셨던 것을 잊을 수 없다.

6. 팽동국 교수
나는 동국이형에게서 기도를 배웠다!

7. KOSTA 간사 팀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피부로 다가온다.

8. Francis Schaeffer
이분의 생각에 지금은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가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Contra Mundum 은 이분의 삶의 자세에서 배운 것이다.

9. Martyn Lloyd-Jones
역시 이분의 생각에 100% 동의하는지 하는 것에 자신은 없지만, 이분이 가졌던 ‘기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0. John Stott
사실은, 이분이 내게 준 가장 큰 영향력은, ‘로잔언약’을 통해서였다. 로잔언약을 접한 것은 내 신앙과 삶의 큰 도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를 ‘양육’하는 입장에서 있었던 분은 이 가운데 장성욱 전도사님 한분 뿐이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들이 대개는 내가 간접경험을 통해 접한 분들이라는 사실은, 내게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내게 큰 약점이기도 하다.

내 바램은…
내가 이 생을 마치고 나서,
내 후배, 내 아래 세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분들과 같은 사람이면 하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등과 관계 없이,
내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바라보게 하는 등대가 된다면,
내가 헛된 인생을 산것은 아닐텐데…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