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세계관 (4)

잘못된 초월성의 또 다른 예는,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있긴 한 것 같은데,

그 과정에 하나님이 상실해버린 경우이다.

나는, 

비뚤어진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비뚤어진 평화주의적 세계관도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을 넓히고 싶다는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표현해 내는 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저 정교한 전략과 계산과 논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소위 ‘젊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불리우는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흔히 발견한다. (나를 포함해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고 거짓된 복음이 득세하는 것을 대단히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극복해내는 solution/과정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 보인다.

궁극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바꾸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인식,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방법론도 하나님의 거대한 일하심 안의 작은 부분일 뿐이며, 자신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겸손함은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참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들에게 심정적, 정서적 동질감을 더 느끼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목표로 두고 과정에서의 초월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프다.

망가진 나 자신을 거울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초월적 세계관 (3)

초월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결국은 초월성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은,

신비를 상실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세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존재/임재를 잃어버린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까.

대충 그 부류를 생각해보면,

우선, 하나님이 아젠다의 목표에 있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그저 수단일 뿐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대단히 초월성을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이는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오히려 그 목표에 하나님이 있지 않기 때문에, 초월성을 잃어버린 모습을 많이 보인다.

예수 믿고, 방언하고, 자기 문제 해결 받고, 병고침 받고, 미귀를 물리치고…

혹은 좀더 교묘하게 하나님을 목표에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선교를 하면서, 선교전략상 ‘영적인’ 부분을 악용하는 경우이다.

선교라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구체적인 실행전략으로 초월적인 것을 추구한다.

영적 전쟁, 하나님의 권능…

그렇지만, 그 추구하는 정점에, 하나님 당신이 계시기 보다는, 선교적 목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교회 성장, 교세확장, 전도, 선행 등등의 종교적 목표를 세운 후 그것의 수단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성향들은 모두 궁극적 의미에서의 초월/신비를 상실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그저,

현실 세계에서의 해결책으로 신비를 가져다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초월성은,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는 것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뒤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는 것에는 인격성이 매우 중요하다.)

초월적 세계관 (2)

한국 선교초기,

시어머니로부터 심하게 시집살이를 당하는 며느리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 터이고,

그야말로 인격적 대우를 받는 삶 자체가 박탈당한채,

가난을 온 몸으로 싸워냐야하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권서인(勸書人)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결국 남편몰래 얘배당을 출석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여인에게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 기독교가 흔히 접근하는대로, 

그 여인을 기독교적 상담을 통해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내 생각에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현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trivialize) 통로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현실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어쩌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교회 예배당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하는 일을 통해,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과의 대면(encounter)가 너무나도 웅장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문제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볍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실은 단기적으로, 심지어는 장기적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질긴 목숨 끝내고 나면 저세상 가서는 편할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젋다. 아직 챙겨야할 아이들도 있다.

상담이나 마음을 터놓는 대화 등과 같은 therapeutic한 방법으로 ‘치유’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분이신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하는 것을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이 마음속에 담는 ‘초월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이 여인이 경험하는 신앙의 요체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며 살기 위해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이라던가,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델은,

이 여인에게 적용되기 대단히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지금 이 여인과 같은 위치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도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위해, 이를 악물고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다.

여러가지로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개선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힘도 없다.

이런 이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거야’

세상은 변혁해라.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위에서 이야기한 여인과 같이,

교회 예배당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월'(transcendence)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역설적이지만,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닐까.

초월적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것은,

내가 받았던 신앙교육과 신앙훈련의 핵심이었다.

지난 20여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얻었던 유익은 대단히 컸다.

내 삶의 방향과 전략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 기독교 세계관 이라고 해서 접했던 것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framework을 기본으로 해서,

특히 ‘영역주권론’적인 관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 피조세계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해야한다는 것은,

젊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한계를 많이 느끼고,

그 대안적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대충 지난 10년여정도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대안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는, 평화주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 세상을 거스르는 가치관 등등이 많이 포함되었었다.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소망의 tone으로

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한 것이었다면,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과 미국의 기독청년들에게는,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설명해내고, 소망과 joy를 제공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개인적으로,

그 대안을 찾아내어 실전적용을 해보았다고 하기엔 아직 길이 멀지만,

최근 ‘초월적 세계관’ 이라고 내가 이름지은 일련의 세계관의 틀이,

혹시 대안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계관 논의를 할때,

이런 세계관은 옳고 다른 것들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식의 접근은 미숙한 자세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복음이라는 웅장한 스케일의 구조물을,

그 당시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내는 tool이 기독교 세계관이지,

기독교 세계관 자체가 복음을 함축해서 설명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범했던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복음 전체인 것인양 이야기하는, 환원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는, 기존의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그건 아니고, 이게 바로 유일한 복음적 세계관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데… 사실 마음이 좀 불편하다.

서론이 좀 길었지만,

앞으로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초월적 세계관’에 대해 좀 풀어보고자 한다.

PS 1) 아마 총 10번 정도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생각이 다 정리된 것도 아니고 아마 헛점도 많은 것이겠지만, 용기를 내어 한번…

PS2 ) 오늘부터, 직장에서는 죽어나는 2주의 일정이 시작된다.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댓글을 확인할 여유가 없을만큼 바쁠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다음주 중간정도까지의 분량을 대충 써놓고, 시간이 나는대로 update도 하고 다듬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복이 터졌네…

새 직장에서도, 일복이 터졌다!

보통 한 사람이 하나 맡아서 하기에도 벅차다는 project를,

나는 세개를 맡게 되었다. -.-;

하나는,

좀 스케일이 크고 기간이 2년이 넘는 큰 프로젝트,

또 다른 하나는,

기간이 몇개월 수준이고 스케일은 여전히 큰 프로젝트,

마지막 하나는,

이제 곧 있으면 끝나는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일.

당장 앞으로 일주일 남짓 이내에 무언가 큰걸 하나 해 내야 하는데,

보통 이쪽 일에 아주 숙련된 사람이 하면 두주정도 걸린다는 걸,

나는 한주 남짓한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다.

나는 아직 이 일에 익숙하지도 않은데.

회사에서 아침에 해뜨는걸 보게 될거라는둥,

집에가는 길을 잃어버릴수도 있다는둥…

회사에서는 덕담이 쏟아진다. 

우…이…씨…

앞으로 두주동안에도 이 블로그에 글을 계속 올릴 수 있을지.

새해 결심에서 쓴 것 처럼, 

이를 악물고, 하던거니까 무슨일이 있어도 계속 한다는 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으려 한다. ㅎㅎ

수염 기르기

금년초부터,

수염을 기르고 있다. -.-;

뭐 딱 대단한 결심을 했다거나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처음엔 그냥 매일 아침 면도하는 것이 귀찮아서 시작한 것이었다.

(요즘은 대충 일주일에 한번쯤 면도하고 수염 다듬는 일을 한다.)

그런데,

몇가지 더해지는 유익이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우선,

늘 나이보다 좀 어려보이는 단점이 좀 커버가 되고 있다. ^^

특히 새 직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꽤 중요한데… (직장 내에서나, 대외적으로나)

그럴때 수염이 좀 도움이 된다.

딸내미랑 노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 딸내미는, 내가 뽀뽀를 할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면서 꼭 한마디씩 뭐라고 하는데,

그러면서 장난치는 것이 참 재미 있다. ㅎㅎ

다만,

아내는 수염을 깎아 버리라는 쪽이어서,

귀가 얇은 나는, 뭐 그럼 확 밀어버릴까… 하는 것을 고민중이기도 하다. ^^

신기하다…

지난 한달동안,

지루하게 이 블로그에 썼던 일련의 내 생각들이 시작된 것은,

대충 작년 초-중반 정도부터 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한달여동안,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한국의 S 목사님의 설교를 지난 여름 즈음것 부터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면서,

어…. 어…. 이것 참 신기하구나.

이분의 설교의 흐름이 내 생각의 흐름과 정말 비슷한 점이 많구나…

하면서 들었다.

이분도 이 설교의 흐름이 대충 작년 즈음부터 새롭게 좀 형성되어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내 짧은 생각이 그분의 깊은 생각 만큼 잘 짜여져 있는 것은 아니고,

그분의 context와 내 context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생각의 흐름이 좀 다른 것들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 내가 조금 더 생각을 했더라면 저렇게 까지 갈 수 있었겠구나.. 하는 것들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래… 내 말이 바로 그말이야… 하는 것들도 많았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좀 찾아뵙고, 여쭈어도 보고, 대화도 나누어 보고, 내 생각을 설명도 드려보고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런 분이 가까이에 계시다면,

지금 내 transition의 시기에 조언도 구하고 대화도 나누고 해 볼 수 있으련만…

뭐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보았으나,

에이, 내가 언제 뭐 좋은 멘토를 가까이 두고 있었던 적이 있었나.

내겐 괜한 사치지.

그렇게 금방 허황된 소망을 접었다.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우고 계속 그 설교들을 경청 중이다. 

(출퇴근 편도 40분 운전동안 설교 한편 대충 들을 수 있으니…)

아참,

우리 마누라님도,

그 S 목사님이 자기랑 스타일이 맞는다나…

자기가 생각하고 있으면 그걸 설교를 한다고…

결국은,

나랑 내 아내가 스타일이 비슷한 것임이… ㅎㅎ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blessing

최근,

정말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것과 같은 마음에 엎드려 기도할 일들이 여러가지 겹쳤었다.

1. 

내가 사랑하는… 정말 사랑하는 S가 큰병(?)을 얻어 수술을 해야 했다.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신앙을 희미하게 잃어버리고 있다가, 수년전 그것을 다시 찾으며 참 멋진 변화를 겪고 있었는데…

그런 ‘회심’의 경험과 동시에 직장에서 참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이제는 이런일까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나님께서 이것 저것을 가져가시는 것만 같아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마음이 확~ 무너져내리는 것 같이 아팠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잘 키워주시는 건 알겠는데, 지금 이렇게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2. 

내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 아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찌어찌하다가 그 친구가 내게는 그 사실을 이야기해서 내가 여러가지로 도와주려 하고 있는데,

최근 그 증상이 더 많이 나빠져서 지난주에는 아침 시간에 주차장에 따로 데리고 나가 약을 먹는것을 도와주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잡고 기도해주며 진정시켜야 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젠 내게 이야기를 할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여러가지로 많이 힘들어 한다.

끊임없는 자살충동에 시달리고 있고… 그러다보니 가족들도 다 많이 힘들어하고 있고…

3.

나와 참 친한 한국에 있는 친구 하나가 이혼의 위기에 처해있다.

두주전에는 갑자기 내게 facebook message를 보내 죽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서…

이곳 한 밤중에 급히 내가 전화를 걸어 진정시켜야 했다.

그후로도 죽음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서 많이 놀라는 일이 몇번 더 있었다.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있다보니,

정말 내가 감정적으로도 이걸 다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나 역시 새 직장에서 받는 여러가지 stress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새직장으로 옮긴 후 기도의 리듬을 제대로 찾지 못해 힘들어 하던 차였고,

두어주 그래서,

아침에 회시가는 시간을 좀 늦추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렸다.

나도 마음이 정말 많이 힘들어서,

아침에 그저 엎드려 무엇부터 기도해야좋을지 막막한 심정으로 그저 내 답답한 마음부터 주님께 올려드렸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내게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하셨고,

아침마다 새로운 찬송을 떠올리게 하셨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내게 말로 다 할수 없는 회복의 소망을 공급하여 주시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내가 위해서 기도하는 그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의 마음 한 조각을 내게 느끼게 해 주시는것 같았다.

그야말로,

마음이 무너져내려 기도하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그런 어려움 자체가 물론 감사할만한 일들은 아니지만, 그런 와중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아 그래서 중간보고를 하자면,

S는 수술을 잘 받아 회복 잘 하고 있는 중이고,

직장동료는 아직 진행형이긴 하지만 몇가지 상황이 좀 정리가 되어가고 있고,

한국의 친구는 어제 내게 ‘다시는 죽는다는 얘기 안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상황을 침착하게 잘 바라보는 눈을 찾게된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고백을, 

의지적으로라도 해야하는 것 같다.

기도의 흐름?

최근 기도생활중에 경험하고 관찰하고 있는 싸이클.

감사의 기도, 깨어짐때문에 가슴아파 했던 기도로 시작했던 기도들이 흘러가는 흐름이 대충 이렇게 되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 내겐,

기도가 난잡하게 내 머리에 흩어져 있는 신학적 개념들을 정리해주는 작업을 해주고 있는 것 같다.


Lean, fat-free

새로운 직장과 함께 life-style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일단 ‘여가시간’ 이라는 것이 정말 많이 없어졌다.

그전엔 일과중에 개인 이메일을 체크하고 답하는 일들도 있었고,

내 여러 관심분야의 podcast를 들으며 시간을 보낼때도 있었는데…

Red Sox 관련 podcast, 한국 뉴스 podcast, 한국 정치 관련 podcast 뭐 그런 것들은 이제 며칠씩 듣지 못해 그냥  지워버리고 있다.

facebook을 그래도 하루에 한두번 들어가볼 여유가 예전엔 있었는데,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번 들어갈까 말까.

이 블로그도,

주말에 좀 더 글쓰는 내용들을 생각해서 줄거리를 잡아 놓았다가,

매일 저녁 조금씩 글쓰고, 답글 다는 정도로 들어오고 있다.

뭔가, 내 삶에서 fat이 빠지고 lean해지고 있다는 느낌.

아참…

말씀을 읽을 시간이 좀 부족해서, 성경을 iphone에 담아두고 많이 듣고 있는데…

이거 참 좋다!

바쁜 사람은 물론, 바쁘지 않은 사람도 한번 시도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