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인도

지난 몇달간, Stanford 학생들과 함께 하는 성경공부 모임에서는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사도행전 공부가 이번이 3번째인데…
나는 이번에 참 많은 새로운 시각들을 발견하고 있다.

도저히 복음의 진보가 막히지 않는 모습에 거듭 감탄하면서도,
실제 내가 섬기는 사역들과 모임들에 주는 implication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다가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이 아침에 쓰는 이 짧은 글로 그 깊이와 감동을 다 표현하려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리라.

아직도 물론 내가 말씀을 대하는 수준이 유치하기 그지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이전에 사도행전 말씀을 접했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까지 내가 성장한 것이 아닌가 싶어… 나 스스로의 등을 두드려주게 된다. ^^
그리고 또한 내 믿음의 깊이가 더 성장했을때 내가 말씀을 이해하게 될 수준에 대한 기대와 목마름이 더욱 깊어진다.

최근 섬기는 사역과 관련해,
도대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것을 고통스럽게, 그러나 또한 다소 다급하게, 묻고 있는 과정을 겪고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 같은 성령님의 인도는… 그리고 그런 복음의 진보는,
결국 사도행전적 사역을 할때만 경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무엇이 성령님의 인도냐, 무엇이 사도행전적 사역이냐 하는 것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설명은 이 짧은 글에 담을 수 없는 것 같다.)

금관의 예수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에는 독재타도의 함성이 온 나라를 덮고 있었다.
대학의 축제라고 가보면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소위 ‘운동권’의 노래를 부르고 막걸리를 마시는 분위기가 대세였다.

고등학교때 철저하게 ‘반공 이념교육’을 받아 운동권=빨갱이=나쁜놈 의 등식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금관의 예수’라는 노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1.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2.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지금 다시 이 가사를 음미해보면서, 이 ‘운동권 노래’가 하나님 나라 신학의 아주 건강한 면을 담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한편,
지금 이 시대에… 시대를 거슬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같은 이런 찬양이 더 이상 나오고 있지 않음이 가슴 저리게 아프게 느껴진다.

다시한번 눈물로…
“금관의 예수”를 불러본다.

성실함 (6)

 성실함 없이 일을 대하는 것은,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독이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성실함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성숙함이 수반되지 않은 ‘일’은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닐까.

때로 내가 아주 힘들어 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부터 비롯된 성실함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일’에 뛰어는 사람을 보는 일이다.

물론, 내 자신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볼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성실함 (5)

내가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준은 안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실해진 것 같다.

또한,
내가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기엔 형편없이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많이 성숙해진 것 같다.

내 스스로 지난 세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 온 발자취를 보면,
내 성실함은 내 성숙함을 드러내는 표지였고,
내 성숙함은 내 성실함을 이끄는 힘이었다.

내 스스로 성실하지 못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할때,
내가 아끼는 이의 성실하지 못함을 보며 안타까워할때,
하나님의 손길이 당신의 자녀를 성숙함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의미에서 큰 위로가 된다.

성실함 (4)

무엇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일까?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일”에 임하는가 일까?

물론 그런 것들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이 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실함 자체를 재는 기준이라기 보다는 성실함의 열매의 일부를 재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것들은, 단순히 성실함의 열매뿐아니라 그 사람의 다른 면들의 열매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실함은
외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을 재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성실함 (3)

성실함에 대해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나는 매일 만난다.
누굴까?
당연히 나 자신이다.

좀 더 성실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핑계를 대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자면 깊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몹시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다른 어떤 것들은 잘 하는데…
사람이 완벽할수는 없지…
이정도 마음의 평안과 여유는 있어야지…
내가 이정도의 여유를 누릴 자격은 되지 않나…

그러나 성실함은, 내 performance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 attitude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무엇일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성실함 (2)

성실함은 능력(competency)일까 성품(character)일까?

나는 오랫동안 성실함을 성품으로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기도 했고, 내 자신이 성실하지 못함을 많이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혹시 성실함이 능력은 아닐까?
어떤 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실함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닐까?

약속을 해 놓고도 반복해서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
늘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
큰 소리를 쳐놓고 뒷감당을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성실하기위한 노력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기 위한 노력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과연 성실하지 못함이 책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마 전문적인 심리학의 영역의 고민을 비전문가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하면서 다른 이들을 양육하거나 훈련하거나 가르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반복해서 마주치게 되는 고민이다.

성실함 (introduction)

직장 일이든, 직접적인 복음사역이든…
일을 하다보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많이 느낀다.

특히 어떤 일을 부탁한 후,
그 일을 다시 점검하지 않아도 알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생각만큼 많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한 사람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귀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과연 더 건강한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더 건강한 성숙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더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성실함과 건강한 성실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실함과 영성과는 어떤 관계일까.
성실한 사람과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성실함과 관련하여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몇번에 걸쳐…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최근 내가 ‘성실함’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한번 써볼까 한다.

캘리포니아 다람쥐

내 아내는 유난히 햇빛을 좋아한다.
날씨가 조금만 좋으면 감탄사를 연발한다.

또, 추위도 많이 탄다. 그런데 두꺼운 옷 입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스턴 같은 곳에서 살 사람이 아닌데…
보스턴에서 오래도 살았다.

여전히 보스턴은 낮 최고 기온이 30s 인 날들이 대부분이고…
이곳은 낮 최고 기온이 60-70s 인데…

보스턴과 이곳 날씨를 생각하면서…
하루빨리 이 다람쥐가 캘리포니아에 와서 살게 될 날을 기다린다.

캘리포니아 다람쥐는, 내가 내 아내를 처음 만났을때부터… 아내를 불었던 일종의 애칭같은 것이었다. 다람쥐 같이 생긴데다…. 캘리포니아에서 살다 왔다고 해서 붙여준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