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신비

나처럼 잘난척 하기 좋아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말 많이 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기도라는 주제를 만나면 늘 말이 딸린다.
기도의 그 말할 수 없는 신비를 내가 다 담지 못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최근,
그 기도의 신비가 더 깊게만 느껴진다.
나만의 공간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경험을 한다.

점심 먹는걸 까먹다~

어제는,
어찌어찌 하다보니 점심 먹는걸 깜빡 했다. -.-;

내가 점심먹는걸 깜빡할 정도로 배고픈것에 둔감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침에 꽤 heavy한 meeting을 끝내고… 정말 정신없이 실험하고… 이것 저럭 처리할 일들을 하고… 사람 만나고… 또 다시 실험하고… 챙길거 몇개 챙기고…

그러다보니 4시 반쯤 되어서…
흠… 오늘은 왜 이렇게 배가 유난히 고플까…

그러다 문득 발견한,
내 가방에 삐져나와있는 샌드위치를 발견했다.

허걱 내가 점심을 안먹었군 그래.

대개의 경우에는 나름대로 잘 까여진 일정대로 매일 살기 때문에 당연히 점심먹는 것도 미리 짜여진 일정 속에서 소화하곤 하는데… 어제는 어째 일이 좀 꼬이는(?) 바람에.

내가 내 삶을 제대로 organize 해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긍정적인 sign일까.

재물, 명예, 권력

내가 20대에
예수를 내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심하였을 즈음에,
나는 복음의 가치에 사로잡혀 거의 열병에 가까운 변화를 경험했었다.

그중 하나 생각했던 것이,
내 깊은 죄된 본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재물, 명예, 권력 세가지를 다 한꺼번에 가지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최대 2개까지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3가지중 2가지 까지는 함께 가져도 되지만, 세가지를 모두 함께 가지면 내가 반드시 망가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요즘 내 생각은,
아마도 그 세가지중 한가지라도 가지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대 1개까지만 괜찮다는 것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중 어느 하나도 가지면 안된다고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존경하던 신앙의 선배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고,
나 자신이 쉽게 경도되는 죄악된 모습을 봐서도 그렇고…
그것이 어떤 scale이던 간에, 권력, 명예, 부 세가지중 어느 두가지도 동시에 가지면 안되겠다는 것이 내 요즘 생각이다.

그것이 대단한 권력이나 명예나 부일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면 충분히 그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다.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명한 설교자의 명예를 가진 목사님,
유명한 학자로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는 교수님,
자영업을 하면서 꽤 많은 돈을 모았고, 자신의 회사 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장로님,
자수성가로 어느정도 재산을 모았고, 가정에서 절대 권력자가 되어 있는 가장,

지금 나는,
어떤 권력을 행사할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대단히 큰 부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많은 명예를 소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세가지 모두가 내개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는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내가 가져야할, 내게 허용된,
혹은 내가 가지지 말아야 할, 내게 허용되지 않은,
그것들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요즘 학생들의 눈으로 본, “복음, 민족, 땅끝”

지난 주말에는,
우리 지역의 조장들의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기회가 있었다.

조장으로 섬길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고, 함께 기도도 하는 참 좋은 모임이었다.

그런데,
그 대화중에 참 인상적인 것이 있었는데…
80년대생들의 시각에서 본 “복음, 민족, 땅끝”이라는 주제에 대한 impression 이었다.

대체적으로,
너무 고리타분하고, 고루하고, 폭이 좁고, 나와 관련이 없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이번에 처음 조장으로 섬기는 코스타 집회에서 이런 주제였을까…
그런 하소연도 나왔다.

나로 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한, 유익한 대화였다.

Pray to be spent

어제 설교중에 나온 말.
정말 마음 깊이 공감하는 말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 재능, 경험, 재산, 시간, 열정, 체력, 선호, 기회, 환경 -을 다 집어넣고 사는 삶을 살도록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내가 ‘reserve’에 남겨두고 사는 삶이 아니라…

아아…
정말 내가 살고싶은,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런 삶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

“학생사역자는 댄스가수와 같다”

내가 나름대로 여러 생각 속에서 정리한 것이다.

analogy를 풀어보자면 이렇다.
– 나이가 30이 지나, 40이되도록 댄스가수를 하는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고,

– 대개 나이가 들면서 댄스 가수를 그만두는 것은, 체력이 달리거나, 시대의 빠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 그 수명이 매우 짧아서 반짝 하는 순간에 온 힘을 다해서 (무리가 된다 싶게) 그렇게 뛰어야 그 경험으로 나중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 일정 시간이 지나면…
직접 댄스가수가 되는 것 보다는 댄스가수를 키우는 프로듀서나 기획사 사장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 바닥’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언젠가 이 블로그에 이 내용을 쓴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져보니 없었다.)

Singleness

현대에는,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신’으로서의 삶이 대안적 삶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야하는 시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Stanley Hauerwas가 그랬다고하던데… (어디에서 그랬는지는 잘 못찾았다. -.-;)
기독교가, 독신의 삶을 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인정한 최초의 세계관이었다고.

나야 물론…
독신이 아닌 삶을 감사하며 누리며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건강한 독신으로서의 삶이 이 세상 속에서 나그네된 삶의 대안적 형태가 됨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다소 뜬금 없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겠으나, 최근 몇개월 동안 몇개의 연결된 묵상중 일부이다. ^^)

Are you satisfied with your job?

어제 운전중에 들은 어느 설교에서 나온 질문 – job satisfaction에 관한…
다음중 몇개의 대답에 yes 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1. I look forward to going to work most days.

2. I like what I do at work, at least of the time.

3. My job employees special talent I have, and challenges me to develop new skills.

4. My boss and co-workers recognize me as a valued part of the team.

5. The way I do my job now is consistent with my deeply held values.


나는…
다섯개 모두에 yes 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 참 감사한 일이다…

QT로 양이 차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QT는 지난 20여년간 내 신앙생활을 지탱해온 중요한 축이었는데…

요즘은 그 QT가…
뭐랄까… 양에 차지 않는 느낌이다.

그리고 QT를 하면서 자꾸면 역사적 context등을 따지는 습관들이 나와서,
나 스스로를 당혹하게 만든다.

나의 이런 ‘증상’과 관련해서…
다음의 기사가 매우 눈에 띄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29

You still don’t get it? (마가복음 6:30-56)

오랫동안 함께 부부생활을 해온 배우자, 나를 낳아서 키워주신 부모님, 내가 수고해서 낳고 키운 내 자녀, 피를 나눈 것과 같이 친한 친구, 존경하여 따르던 선배나 선생님등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문득 낮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사람을 내가 잘 모르고 있음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았고, 가르침도 들었고, 심지어 자신이 많은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아직도 그들이 메시아를,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심 (6:30-44)

1. 본문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어떤 일정으로 사역하고 있는지 관찰하여 보라.

2.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제안/충고에 주목하여 보라.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에 대하여 생각을 나누어 보라.
열정/열심 vs 전략적 사고, 하나님 나라의 즉각성vs. 점진성, 헌신 vs. 자아성찰

3. 예수께서 무리를 목자없는 양으로 여기신 구체적인 행동을 찾아서 정리해보라.

4. 먹을 것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보라. 누구의 제안이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는가?

어떤 경우에 실제적인 생각과 제안이 하나님 나라의 일과 배치되는가?

5. 군중을 먹이는 일에서, 제자들이 해야했던 일들을 자세히 정리해보라.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정리해보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과는 어떻게 대비되는가?

6. 빵과 물고기가 남은 것을 정리하여 바구니에 담으면서 제자들이 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심 (45-56)

 7. 무리를 보내실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필요와 자신의 필요를 어떻게 채우고 계신가?

8. 본문을 바탕으로, 예수를 만나기 전, 제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어떠했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가?

9. 48절의 ‘pass by’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모습(출 33:19, 욥9:11 등)을 생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께서 나타나심을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

10. 4장에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과 대비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라. 둘 다 밤에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4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반면,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다독이시고 격려하신다. 왜 이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11. 바로 앞 본문(오병이어)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통해 하게 하신 여러가지 구체적인 일들, 그리고 제자들로하여금 목격하고 기억나도록 하신 일들을 다시 생각해보라. 그런 맥락에서 52절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2. 게네사렛 땅에서 다시 바쁜 사역의 루틴에 들어가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았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당신이 제자들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느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정리

13. 여러가지 당신에게 닥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거나 인정하고 있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없음을 드러내심과 동시에 그것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경험이 있는가? 나누어보라.

14. 당신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 한계 상황에 닥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식/깨달음/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이다. 피상적인 이해나 생각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지혜에 대하여 묵상하고 나누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