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3)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져서 그 audience에게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치가는, 그 목사님은, 점점 그 환경 속에서 ‘뽕’을 맞게 된다.
자기가 이야기하면 열광적으로 반응하니까,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줄 아는 거다.
그래서 더 독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더 게을러지기도 하고, 더 논리가 무너지게 되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든, 무슨 무논리의 막밀이든,
그것에 긍정적으로 반응 하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것이 종교적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 논리에 동의하지 않아도 자신이 헌신한 그 종교적 가치에 동의한다는 차원에서 동의하지 않는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앞에서 내가 글을 쓰긴 했지만,
요즘 종교가 되어버린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어떤 정치가가 막말을 하거나 논리가 부족한 말을 하더라도,
그저 내 진영의 사람이니까 하고 그 사람의 엉뚱한 소리에 박수를 치고 열광을 한다.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그럼 무엇일까?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2)

어떤 목사님이라도,
그 목사님에게 ‘당신의 설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설교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서 경청하면서 매주 설교를 이어가는 목사님들이 있을까?
나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단정적인 말이고, 정말 거의 없을 것 같다.

어떤 목사님이 살짝 뭔가 논리나 주장이 정도에서 어긋난 설교를 좀 하다고 하자.
그럼 그 교회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아마도 삼삼오오 모여서 목사님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조금 할것이다.
그러다가도, 아니 이러면 안되지.. 뭐 그렇게 이야기하는 성실하신 권사님 말씀에 살짝 기가 눌려서, 그래 뭐. 내가 그냥 좀 참고 듣지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살짝 벗어난 설교도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듣는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목사님에게 가서 꼭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좋았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은 우쭐해진다. 아 이 설교가 좋았던 거구나.

목사님이 거기서 좀 정신 차려서 살짝 비뚤어진 것을 스스로 좀 바로잡으면 좋은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않고 더 비뚤어지거나 벗어나게 되면…
위에서 이야기한 현상들이 살짝 더 심각하게 일어난다.
그 설교가 불편한 사람들은 살짝 더 불만을 이야기하고,
그 설교를 잘 들은 사람들은 쪼로록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설교 참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목사님은 거기서 살짝 더 우쭐해지고.

그러다가 어떤 임계점이 넘으면,
그렇게 불만을 갖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대해. 설교에 대해 포기한채 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교회를 아주 옮겨버린다.
그러면 목사님에게 그나마 정직한 feedback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없어져 버리고,
목사님 설교 좋았어요 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이렇게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만의 audience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나중엔 그 목사님이 막말을 하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건,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만 남게되고,
그럴수록 목사님은 더 우쭐해지고 신이나서 설교를 하게된다.




자신의 audience에 익숙해지지 않기 (1)

요즘 한국의 모 극우정당을 보면 정말 하는 짓이 가관이다.
끊임없이 막말을 해댄다. 좀 말이 심하다… 싶은 정도가 아니고, 입에 담기 어려운 아주 심한 극언을 쏟아내고 있다.
아니, 저러면 정말 저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쌍욕과 극언에 동조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저렇게 하면 자기들이 망한다고 생각을 안하는 걸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정치 전문가가 아니니, 적어도 내 상식으로는 이렇게 하면 저 정당은 망할 것 같은데… 내가 저 정당 지지자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은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글이나 youtube video등을 찾아보면서 적어도 내게 꽤 설득력이 있었던 분석은,
지금 그 정당의 사람들이 극우 youtube를 너무 열심히 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극우 youtube는 극우의 사람들만이 열심히 보는 매체이니, 거기서는 아주 극언을 하면 인기가 높아지는데, 자꾸 그런 극언들을 열심히 듣다보니 그것에 취해서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고 저렇게 망해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들을 막말이라고 신문기사에서 이야기하길래, 자세히 보니 그것도 극우 웹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말이라고.

지금 이 극우정당이 하는 이 일들이, 그들에게 정말 독이 될른지 잘은 모르겠는데,
(내 생각으론 이 사람들 이러다 큰일나겠다 싶긴 하다)
적어도 이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 ‘사실’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audience만을 위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만 익숙해지다보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식한 아빠

민우는 전공이 ‘liberal arts’이다.
‘인문학’이라고 번역해야하나.
지금은 그중에서도 주로 문학과 연극쪽의 과목들을 많이 듣고 있는 것 같다.

쉐익스피어를 배운다는데… 음… 나 같은 사람은 그거 읽어도 해석도 안된다.
무슨 몇세기의 시(poem)도 배웠다고 하고,
여성학(?) 비슷한것도 배웠고, 내년에는 political science 쪽도 과목을 들어보려고 하는 것 같다.

무식한 엔지니어인 아빠 입장에서는,
허억 하는 내용들을 배우고 있다.

아빠는 진짜 무식하다.-.-;

민우는 그래도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잘 한다. 자기가 무슨 과목을 들었고, 뭐가 힘들도, 어떤 교수님이 좋고… 어쩌고…
학기중에 주말에 video chat을 하면, 민우가 먼저 끊자고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민우야 이제 들어가…라고 하면… 민우는 벌써? 하면서 늘 아쉬워한다. ㅎㅎ

그러나,
이제 20대 초반인 민우는,
아직도 wisdom(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물어본다.
어떤 것은 조금 더 고차원적인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비행기 타려면 공항에 얼마나 일찍 가는게 좋으냐는 삶의 소소한 지식들도 있다.

비록 민우가 배우는 것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아빠이지만,
아직 삶의 지혜의 부분에서는 여전히 물어보는게 기특하다.

민우가 점점 커 가면서,
민우의 삶의 지혜가 어느순간에는 내 삶의 지혜보다 더 풍성해지는 날도 오겠지.
그러면 아빠가 무식할 뿐 아니라 지혜도 민우보다 못하게 되는 거겠지.

빨리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
민우에게서 보이는 삶의 지혜가 참 기특하고 깊구나… 하고 느끼는 때가 오면 좋겠다.
그때가 빨리 오도록, 민우에게 빨리 많은 지혜들을 잘 전달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잠언 9:10)

실력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에게 실력이 없다면,
그 사람의 주장 자체가 옳기 않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옳고 그름은 때로 매우 애매한 경계를 가진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질 때에는 매우 자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심하게 왜곡된 기준을 가지기 쉽다.

그런데,
실력은 그것보다 훨씬 더 공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누가 실력이 있느냐 하는 것은 더 판단이 명확한 경우가 많다.

어제 회사에서,
자기가 옳은데 실력이 딸려서 억울하다는 사람의 푸념을 한참 들어주었다.
(나도 그 친구가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집에와서 그 친구의 푸념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서,
많이 혼란스러웠다.

I’m available for you

회사일을 하는데 저녁에 conference call을 무지하게 많이 한다.
아시아쪽의 사람들과 일을 하는 일들이 많아서 그런데,
매일 conference call을 해야하는 주도 있고, 적어도 한주에 3번 정도는 저녁에 하는 conference call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급하게 무슨 일이 터지면,
그것 때문에 급하게 밤에 이메일 하고, 전화한다.

그 와중에 가끔 유럽쪽과 conference call을 해야하는 일이 겹치면,
그날은 완전 대박나는 거다.
요즘은,
아침 7시면 central europe이 오후 4시이므로, central europe에서 전화하기 좋은 시간이다.
그리고 오후 6시면 한국과 일본은 오전 10시, 중국과 대만이 오전 9시이므로 뭐 대충 그때쯤 하기 좋다.

내가 organize하는 conference call이 대부분이니까,
그러면 전후로 agenda 정리하고, 필요하면 action item 정리해서 나누고, meeting summary도 적어두고…
그럼 정말 하루가 아주 길~어진다.

그렇다고 내가 죽도록 힘들게 일하느냐 하면 그런건 아니다.
나름대로 내 일정을 꽤 flexible하게 조정할 수 있고,
내가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고 있기 보다는, 내가 해야하는 일을 내가 정해서 하기 때문에 driven되기보다는 drive하는 입장이긴 하다.

내 주의의 사람들이, 심지어는 나와 가깝다고 하는 사람들도,
내가 너무 일에만 파묻혀서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많이 바쁘지 않고, 나름대로 work-life-balance도 좋은 편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시간과 마음을 낼 여유가 있다는 것을 많이 광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I’m available for you!

진취적 피동성 vs. 퇴행적 피동성

기독교는 한편 대단히 진취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피동성 속에서만 그 핵심을 맛볼수 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project를 시작하셨고, 완성하실 것이고, 내가 그 큰 흐름에 포함된다는 것은 나를 대단히 진취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initiative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initiative에 의해 이루어지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성이 참된 진리로 가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피동성을 추구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나를 던져서 가슴 뛰도록 헌신하는 진취성도 있어야 하지만,
나의 뜻을 꺾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게 들어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그것에 순종하는 피동성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피동성을 ‘진취적 피동성’이라고 부른다.

반면,
어떤 사람은 무엇이든 하려고 하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으로’ 주저앉아버리는 결정을 해버린다.
대부분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내포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저 자신을 보고하고자 주저앉아서 피동적이 되어버린다.

이런 것은 ‘퇴행적 피동성’ 이다.

나는 매우 자주,
퇴행적 피동성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진취적 피동성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
퇴행적 피동성을 가진 사람이 진취적 피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던지는 과감한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과정을 능동성을 거쳐야 비로서 진취적 피동성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 하나님의 형상

주말에 민우가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여기 클릭)
이 테스트에 따르면 민우는 Boston과 San Jose의 액센트를 가지고 있단다!

뭐랄까, 살짝 기분이 좋았다.
왜 좋았을까?아, 민우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래도 아빠 엄마와 함께 살아왔던 trace가 말투에 남아있는 거구나…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다가, 가끔 아버지에게 내가 머리가 빠져가지는 모습을 카메라에 바짝 대고 보여드릴 때가 있다.
이버지는 그러면 살짝 좋아하신다. ㅎㅎ
(우리 아버지는 좀 많이 심한 대머리이시다.)
50먹은 아들이 당신의 모습을 가지고 계시다는게 살짝 기쁘신듯 하다.

이런건 도대체 무슨 마음인걸까?
내가 많이 사랑하는 존재가, 나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뿌듯함.

나는 두세달에 하번 정도는, 여러 형태의 ‘무신론자’들과 토론을 하는 일들이 생긴다.
다들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많이 똑똑한 사람들이다. ㅎㅎ
그러면 소위 ‘기독교 변증’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토론을 하게 되는데….
예전에 어떤 친구와는 주말마다 4~5시간 이상 몇주간 토른을 한적도 있었다.
그럴때마다 늘 나오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슈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쪽 이슈를 꼭 한번 끼워 넣는다.)

민우가 Boston과 San Jose 액센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하지만, 일단 가슴에 다가오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지만,
결국 그것이 가슴에 다가올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변증의 딱딱함 속에 그런 것을 꼭 끼워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민우가 Boston과 San Jose 액센트가 있다는건… 그냥 가슴으로 괜히 좋다. ^^


빨리 달리고 싶은 아이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정말 빨리 잘 달린다.
달릴때 이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빛난다.
빨리 달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이다.

이 아이는 그러나 빨리 달릴 수 없다.
가지고 있는 짐들이 너무 많다.
같이 데리고 가야하는 느릿느릿한 친구들도 있다.
게다가 빨리 달리지 못하니 자꾸만 다리도 느려지는 듯 하다.

어쩌다 가끔 한번씩 한 10여미터 빨리 달릴 기회가 주어지면,
이 아이는 즐겁게 달린다.
그 잠깐 얼굴을 부딛히는 바람을 즐기며 신나게 달린다.

아이는 참 잘 달리는 아이다.
그러나 그렇게 달릴 수 없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간다.
그저 빨리 달리는 것은 내 일이 아니려니 하고서…

힘내라 친구야.
소망을 잃지 말아라 친구야.

1987, 2019

나는 1987년에 대학생이었다.
나는 지방에 있는 학교를 다녔으니 뭐 그렇게 대단하진 않았는데,
내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때나,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닐때 서울에 올라올때면,
심한 최류탄 냄새를 경험할때가 많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1987년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독재정권이 일반 시민의 힘에 무너지고,
역사의 흐름이 크게 바뀐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 해였다.

어리버리한 공돌이인 나는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도 부족하나마 그때 불의에 많이 분노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시위를 한다거나 그런거 자체가 없어서 나는 그 흔한 시위한번 해본적이 없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그렇게 불의와 싸우는 역사를 경험한 것은 참으로 큰 blessing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보는 눈이 생기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모습에 너무 많이 화가 난다.

그렇지만,
생각이 있는 어떤 젊은이들에게는, 이것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눈이 생기도록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80년대에는 대학 진학률이 20%정도나 되었나…
그때는 대학생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회의 엘리트임을 의미했다.
게다가 소위 ‘명문대’라면 더더군다나 더.
그런데 그런 엘리트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저버리고 공공의 정의를 선택했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했던 거짓말,
광주에 폭도들이 나타났다고 했던 거짓말 등은,
그때의 젊은이들이 결국 더더욱 옳음에 목마르게 만들었다.

지금의 상황이 1987년의 상황만큼 절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입만열면 빨갱이 어쩌고 하는 거짓말을 하는 정치 집단,
사실을 왜곡해서 거짓말을 돌리는 정치집단의 행태를 보면서…
이 사람들 때문에 ‘옳음’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이 잘하면 생기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1980년대의 기독청년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도를 해야하나 화염병을 들어야 하나를 고민하며 토론했었다.
그리고 그런 토론은 그 사람들이 이해해왔던 복음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해낼 수 없음을 깨닫게 했고, 복음과 세상에 대해 더 균형잡히고 건강한 방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택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 속에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참으로 답답하다.
그리고 참 쪽팔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