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탄신일

이순신 장군 탄신일은 4월 28일이다.
아니 그런걸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국민학교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 생일이 4월 28일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문제는,
생일이 4월 28일이었던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친구가 자기 생일이 이순신 장군 생일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던 기억은 나는데,
그렇게 이야기할때 표정이 어땠다는 것도 기억이 나는데,
막상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친구랑 친했던 것 같은데…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친구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뭐 내 생일날 집에 불러서 함께 짜장면 시켜먹는 생일파티(?) 할때, 그 친구도 왔었겠지.

혹시라도 그 친구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처럼 그 친구도 내 생일은 기억하지만 내 얼굴은 까맣게 잊고 있으면 좋겠다. ^^
그렇게 조금 덜 미안하도록.

한번이라도 헌신해본 사람들

소위 ‘토착왜구당’이 국회에서 폭력사태를 일으키고 있는데, 참 기가 막히다.
잘만하면 이게 그 사람들이 완전히 찌그러지는 계기가 될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 잘되길 바란다

그런데 이 토착왜구당 사람들 하는게 정말 참 어설프다.
나름대로 장엄한 표정을 짓는데… 뭐랄까 안쓰럽다고나할까, 좀 웃기기도 하고

왜 그렇게 느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는데,
나는 이 사람들이 가치에 헌신하지 않고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마치 가치에 따라 하는 것 같이 고함은 치는데, 그게 진정성도 없어보이고, 좀 어설프기도 하고 그런거지.

그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 반대편 사람들은, 그 가치를 위해서 감옥도 가고, 고문도 받고,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게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보이는 상황에서도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젊음을 던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 토착왜구당은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에 가깝다.
(아, 그렇다고 진보세력이 이익집단이 전혀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더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그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으니 정말 없어 보이는 거지.

어떤 가치가 옳고 그름을 약간 접어두고라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비치는 독기는,
참 우스꽝스럽다.

정말 이번에 한번 더 청소가 되길 바란다.

I miss her

우리가 키우던 개는 이 아이가 8살이 되었을때 shelter에서 데리고 왔다. 그리고 4년 조금 넘게 우리가 키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이디가 세상을 떠난지 1년 반 정도가 벌써 지났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한번씩 하이디 생각이 난다.
위의 사진은, 우리 집 거실 한 구석에 민우와 아내가 함께 마련해 놓은 ‘하이디 메모리얼’이다. ^^
하이디의 foot print, 하이디의 사진, 하이디 닮은 강아지 인형까지.

작년부턴가, 민우가 새로운 강아지를 또 한마리 입양하자고 주장을 해왔고, 나도 그 주장에 살짝 동조를 하고 있는 중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새로운 강아지를 입양해오면, 하이디 생각이 나지 않게 될까?
아마 안 그럴것 같다.

하다못해 애완동물도 그런데,
마음을 나누던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다거나, 다른 이유로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쉽게 채우는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전학을 3번이나 했고,
그 후에도 국민학교 친구 대부분과 다른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친구중 아무도 같은 고등학교를 가질 않았었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때 썼던 일기에,
사람을 그리워하는게 힘들어서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게 힘들다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 내겐 그게 마음의 부담으로 남았던 것 같다.

나이가 든 지금,
내겐 그런 감성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하이디 사진을 문득 보며 하이디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그런게 좀 남아있긴 한 모양이다.

하이디가 분득 보고싶어질때가 있다.
오늘 점심은 맛있는걸 먹어야겠다. ^^

<오해하지마>, 주제를 구합니다

몇주전부터 저희 교회 podcast를 통해서,
교회에서 흔히 오해하는 것에 대해 오해를 풀어주는 10~15분짜리 짧은 강의(?)를 녹음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 구원을 죽어서 받는 거다?
– 성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자?
– 예수님의 부활이 뭐가 중요한데?

이렇게 세개를 녹음했고,
아마 이번주에는
– 성경은 그냥 글자그대로 읽으면 되는거다?
라는 주제로 녹음을 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4주 정도는 더 하게될 것 같은데,
다루었으면 하는 좋은 주제 추천받습니다~ ^^

기적(?)을 믿지 않는다!

지난 주말, 갑자기 허리쪽 근육이 땡겨서 많이 아팠다.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걷는것도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이유가 사실은,
내가 허리 스트레칭 운동 (link)를 하는데,
한동안 이걸 안하다가, 뭔가 밀린걸 하려고 좀 더 오래 이걸 했더니 근육에 무리가 간것 같다.
배 쪽 근육에서도 쥐가 나고… ㅎㅎ

토요일에는 원래 오랜만에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는 아내와 함께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 계획은 완전 꽝났다.

나는 속으로, 아… 이럴때 예수님이 손만 대면 확~ 낫게되는 그런 기적 같은걸로 이거 확~ 풀어지면 좋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아내도 여기 저기 근육이 뭉쳤다고 해서, 이 동네에 있는 아주 아주 허름한 찜질방에 둘이 갔다. 한 사람이 입장료 25불, 둘이 자그마치 50불이나 쓰고 ㅎㅎ
뭔가 뜨뜻한곳에 누워 있으면 좀 풀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거기에 허리 진동기(?)가 있었다.

위와 같이 생긴거.

저거나 한번 해볼까. 해서 그거 한 5분 했더니만, 확~ 나아졌다! 허걱.
아니 이거 가지고 그렇게 나이질걸 가지고 내가 그렇게 골골 했단 말이야?
야, 신박하네…

야 참 잘되었다. 다행이다. 빨리 풀어져서.

그러고나서 집에 왔는데,
아까 오전에 했던 생각이 문뜩 났다.
예수님이 손을 대어서 확~ 낫는 것 같은 일이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거.

물론 허리진동벨트가 예수님의 손은 아니지만,
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후다닥 나아버렸으니…
아주 착하고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이라면 ‘주님께서 해주셨어요’ 라고 할만도 한데,
나는 그런 생각을 잠깐이라도 하지 못한 거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은 정말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그걸 가지고 감동받거나 그걸로 뭔가 확~ 뒤집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나님과 만나는 방법도 그래서 그런 놀라운 일들 보다는 사색속에서 더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러실것 같긴 하다.

야, 내가 너 거기 찜질방 가게 해서, 그 허리 진동기계 쓰도록 해서, 그렇게 후다닥 낫게 해 줬는데,
너는 그거 가지곤 내 생각을 눈꼽만큼도 안하는구나.

Does Anybody Care About Me?

한주에 평균적으로 3명 정도는 꼭 어떤 일이든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온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정기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다 일년에 한번, 어떤 경우에는 몇년에 한번 보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중 1/3 정도는 내가 얼굴도 모르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다.

도와달라는 요청도 매우 다양하다.
job을 찾는데 도와달라는 사람도 있고, 신앙의 질문을 가지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있고, 삶의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만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는 친구가 그 동네 사는데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받아 만나기도 했고,
내 아들이 그 직장에 다니는데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받아 만나기도 했다.
몇년만에 연락을 해와서는 최근에 job을 잃었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만나기도 했고,
갑자기 마음이 힘들다고 해서 뜬금없이 만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중에는 같은 교회에 다니거나, 좀 더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있다.

한참 피크때에는, 일주일에 그런 사람들을 꼭 두어명씩은 만나서 식사나 차를 했었고,
일주일에 또 몇명 이메일과 message등을 통해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요즘은 그게 좀 뜸해서,
그래도 한주에 한명쯤 만나고, 몇명 정도와 online에서 연락하고 있는 중이다.

이게 2~3년 전부터는 이런 사람들과 너무 많이 연결이 되어서…
좀 당황하면서 어찌할줄을 몰랐는데,
요즘은 그게 내가 해야하는 일이려니… 생각하고 웬만하면 시간을 내어서 그런 사람들과 많이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평생 교회를 다녔고,
회심을 한 이후에 교회를 열심히 다닌게 30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회에서도 정말 사람들이 나를 genuine하게 care해서 내게 다가왔던 적은 대학교때 한 2년 정도 있었다.
그 이후엔, 교회에서도 사람들은 내게서 무엇을 받으려고 내게 연락을 해오지, 내게 무엇을 주고 싶어서 연락을 해오진 않는다.

그런 시간이 이제는 너무 길어져서, 내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다시 받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게 최근에는 조금 더 확장이 되어서,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를 care하시기는 하실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좀 우습지만 정말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내 마음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고, 그걸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는건 그래도 어느정도 견디고 참아주겠는데…
하나님도 내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다는 막막함이랄까 그런게 사실 요즘 좀 있다.

뭔가 건강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건 어떻게 해결해볼 수 있을까?

아직도 우리는 토요일이다

나는 요즘 우리 교회에서 유치원부터 2학년까지 아이들 주일학교를 담당하고 있다.
아이들이 진짜 귀엽다.
무지하게 말을 안듣는데, 그래도 참 많이 귀엽다. ^^

그러다보니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다. 늘 교회의 소식을 예배 끝나고 듣게되고, 설교도 녹음한 것으로 따로 듣고 있다.
뭐 그리 나쁘지 않다. ^^

그런데, 어제는 부활절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명절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많이 기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많이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금~토요일에, 나에게 하는 설교를 혼자서 만들었다.
그 설교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일요일 새벽에 하셨다.
금요일은 절망의 날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과 함께 꾸던 꿈도 사라졌고, 삶을 걸었던 열정도 꺼졌다.
치열한 노력도 그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에 진이 빠지는 슬픔의 토요일이 왔다.
토요일에 제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그저 정말 진이 빠져 있었을 거다. 슬픔과 탈진과 두려움과 실망등이 섞여 있었겠지.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바꾸었다.
아직 절망의 통곡으로 인한 탈진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완전히 뒤집을 뉴스가 나온것이다.
제자들은 그 새로운 엄청난 소식을 어떻게 handle 해야할지도 잘 몰랐을 거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걸렸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 토요일을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꿈들이 꺾이는 절망을 경험하고,
우리의 노력이 한계에 다다라서 이제는 침체만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저 자기연민과 의욕없음에 사로잡혀 축 늘어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활의 일요일이 온다.
부활의 일요일은 그 침체의 절망과 의욕없음이 멋쩍어지는 날이다.
예전에 꾸었던 꿈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방식으로 그 꿈을 차원이 다르게 이루신다는 것을 보는 날이다.

아직 우리는 토요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일요일이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토요일을 살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맞는 부활절은 늘 부조리하다.
이 어정쩡한 상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래의 기쁨을 드높이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것이 믿음이다.
이 어정쩡한 토요일에, 영광의 부활의 일요일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아직 토요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요일을 아는 사람들이다.

글쎄…
나는 혼자서 내가 짠 이 설교의 내용을 곱씹으며 혼자서 눈물이 가득해졌다.
한편으론 하나님 앞에서 좀 서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감사하기도 하고.

아직은 토요일이다. 그러나 일요일이 온다. 아니 일요일이 왔다.
부활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5)

어떤 사람이 어떤 개념을 믿고 산다는 것은, 그 믿고있는 개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unintelligible)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중력을 믿는다.
그런데 만일 내가 중력을 의심한다면, 농구를 할때 껑충 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칫잘못하면 내가 그냥 껑충 뛰는 순간 그 힘으로 우주 밖으로 날아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안심하고 제자리 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중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중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은 unintelligible 한것이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처절한 처형 끝에 삼일만에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내 삶이 unintelligible한 삶을 사는 것이 기독교의 당연한 norm이 되지 않는한,
이렇게 정치가 종교가 되는 것과 같은 nonsense는 계속 반복될 것 같다.

뜬금없이 하게된, 금년의 고난주간 묵상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4)

가만히 생각해보라.

죽어서 천당가고, 살아서 복받는다는건 사실 대부분의 종교가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뭐 고등종교 뿐 아니라,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같은 것들도 결국 그거 비슷한것들 아니겠는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말에 대체로 동의한다.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은,
그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거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만족을 채워주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기독교는 정말 종교가 되어버렸다.
샤머니즘이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 차이가 별로 없게 되어버렸다.

기독교가 종교가 되어버려서,
기독교와 정치가 부딪히니 정치가 더 상위의 개념을 차지할 여건이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기독교가 종교가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치가 종교가 되고 있다 (3)

미국과 한국의 보수 기독교의 예를 들었지만, liberal한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수 기독교는 그나마 처음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한것이라면,
liberal 기독교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종교을 색깔을 선택하여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
liberal 기독교에서는 보수 기독교와 좀 다른 방식으로 정치는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할만큼 내가 뭘 알지는 못한다. ^^

그런데 얼핏 생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가 contents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기독교가 이야기하는건 죽어서 천당가는 것과
세상에서 복받고 사는 것이 되어 왔지 않았던가.

그것 말고는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해 뭐라 할말이 없으니,
결국 기독교 밖의 contents에 의해 지배당해버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기독교가 소위 ‘성경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분야에 대해 한마디씩을 거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가정, 성경적 직장생활, 성경적 경제활동, 성경적 자녀교육… 등등이 얼마나 초라하고 shallow한가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기독교가 세상의 가치에 대한 대안적 가치라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죽어서 천당가고 살아서 복받는다는 것 가지고 무슨 수로 세상을 해석해 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