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1)

내가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갑질’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못되게 하는 일을 참 잘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게 못되게 하는 것을 참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갑질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그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앞으로 몇번의 글에서 내가 갑질에 대해 생각하는 몇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번주에는 또 한번 엄청 갑질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서…
한편 불편한 마음이 있고, 한편 잘해야하는 부담도 크다.

흔히 갑질이라고 하면,
갑의 지위를 남용해서 쓸데없이 을을 괴롭히는 짓을 의미하는데,
나는 갑의 위치에 있을때 어떻게 나쁜 짓을 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여기서 한번 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선 clear하게 이야기할 것은,
갑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을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볼수는 있지만 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가 매우 중요할 것같다.
그렇기 때문에 갑으로써 잘 해보려고 노력해도 갑은 그 존재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배우기, 사랑하기

어떤 아이가 자꾸만 물건을 훔친다고 하자.
그 아이는 그냥 자기가 갖고 싶어서 옆의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그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아이가 물건을 훔쳐오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는 게 중요할까?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게 중요할까?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태를 수습하는게 중요할까?

이것들이 모두 다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둑질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Therapeutic한 현대의 기독교는,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핑게하에 사랑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지만 늙지않기

나이가 이제 겨우 40조금 넘었거나, 50조금 넘었는데,
마치 ‘통달’이나 한 것 같이
“그거 해도 안되는거야”
“옛날엔 나도 그랬지”
“그건 네가 아직 젊어서 그래”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전 맥빠진다.

나이가 들지만 여전히 청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감동이 있다.

다음의 video는 Stanley Hauerwas가 로마서 13장에 관해 토론하는 짧은 clip이다.
2014년에 비디오가 올라온걸로 보면, Hauerwas가 74세일때의 모습인데,
분명 할아버지이긴 한데, 정말 청년의 기개가 넘친다.

정말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을 내가 control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나 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내 삶을 내가 control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대단한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변화이던 간에 모든 변화를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특히 내가 무엇인가를 실패했다고 느낄때나, 내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낄때 그런 공포는 더더욱 심하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만일 나보다 큰 초월자가 내 현재 상황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실까?
당연히 그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심지어는 무너지게 하셔서 새로운 길로 이끄시지 않을까?

이게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렇다는걸 아는데,
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상황이 되면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고, 당황한다.

나 같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한 것 같다.

첫번째는,
그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보는 것이다.
처음엔 그러면 죽을 것 같은데, 자꾸 해보면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걸 체험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들어서 알던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어 아는 것 같이 알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나의 약한 부분을 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다.
가족이 될수도 있고, 친구가 될수도 있다.
그냥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누구에게 조금 기대어 부축을 받는 것이다.
불행히도 내겐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패닉에 빠졌을때 내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참 큰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편 내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도움을 구하기도 해야하고, 어쩌다 도움이 살짝 왔을때 그 도움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 나 같은 쫄보에겐 그런것도 용기다.

젊은 놈들!

내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시지만,
내 나이 또래나 나보다 조금 더 젊은 사람들의 부모님들을 보면 ‘극우’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중 어떤 분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태극기나 심지어는 가스통을 드시는 분들도 있다. -.-;

나는 그 어르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분들이 가지는 비이성적 두려움과 분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중 많은 분들은 매우 진정성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걸 이용해먹는 정치꾼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르신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빨갱이’가 되었다고 걱정하실수도 있겠다.
나는 빨갱이가 보기엔 완전 반동주의자일텐데 말이다. ㅎㅎ
그 분들의 눈으로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니들이 빨갱이를 몰라 라는 말이면 그저 대화가 거기서 더 이상 진행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나는 피부로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번 법무장관 임명에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분노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일부 접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분노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아니, 저건 합리적 분노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의 ‘정서’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일베를 하는 아주 극소수 20대를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정상적인 20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지도 않고,
그나마 미국에서도 20대의 한인 학생들을 많이 만나면서 지내질 않으니
그 생각과 정서를 이해할 기회를 얻기란 정말 어려워 보인다.

내가 제한적으로 접한 20-30대를 보면서,
사고방식과 논리구조가 다르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이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 사람들에게 공감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윗세대 어른들이 ‘니들은 빨갱이를 몰라’라는 것에서 대화가 끊기듯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던지는 어떤 말에서 그들과의 대화가 끊기지는 않으면 좋겠다.

치사한 짓

회사에서 치사하거나 졸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다.
어느 인간사회든지 그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 자기가 올라서기위해 저렇게 까지 하나 싶은 일들은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 퍼뜨리기,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망신주기,
몰래 뒤에서 사람들을 자기편 만들어서 멀쩡한 사람 뒤통수 치기 등등.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90% 이상은 사실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력으로 안되니까 그렇게 해보려는 것일까.

회사든, 정치든 어찌 그리 똑같을까.

비가역적 개혁

Obama가 대통령일때,
Obama care를 정말 아주 열심히 밀어붙였다.
여론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들은 Obama care가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가짜 뉴스도 떠돌았다. 그것에 영향받은 대중은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러다 우리 망한다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번에 다시 뽑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개혁은 해야한다며 그 개혁을 지지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Obama care는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그 민주당 의원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 중간선거에서 떨어졌다. 민주당은 다수당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떨어진 민주당 의원들이 unsong hero라고 생각한다.)

그 후에 Trump가 Obama care를 뒤집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렇지만 Obama care를 뒤집기란 그리 쉽지 않아보인다. Obama는 비가역적 개혁을 이룬 것이다.

Obama care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전의 상태보다는 큰 진보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진보와 개혁은 비가역적이 되었다.

요즘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을 읽으며,
지난 밤에 이곳 시간으로 한밤중에 자다 깨다 하며 청문회를 보다가,
잘 보지 않던 facebook에 들어가서 new feed를 읽으며,
극렬한 반대와 극렬한 찬성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것을 보며,
이 와중에 광을 팔고 있는 한국의 어느 권력집단을 보며,

Obama care와 비가역적 개혁을 생각한다.

비가역적 개혁에는 희생에 동참하도록 요청할수 있는 자신감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비가역적 개혁은 누군가가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비가역적 개혁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비가역적 개혁은, 비가역적이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한다.

겸손과 자기성찰

겸손은, 나를 작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덜 생각하는 것이다.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but thinking of yourself less

CS 루이스가 한 말이다.

내가 보기엔 두 종류의 자기 성찰이 있다.
한 부류는 ‘나’라는 존재만 자꾸만 파서 ‘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른 한 부류는 ‘나’라는 존재를 세상,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전자의 부류로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은 겉보기에 겸손해보인다 하더라도 매우 이기적이면서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후자의 부류로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보이던지에 관계없이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늘 자신에 대해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 obsession이 있다.
문제는 그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을 자기 자신안에 가두느냐, 아니면 자기 밖의 더 큰 세상/존재와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할 수 있는 key는,
나를 내 밖의 더 큰 세상/존재와 연결시킬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돈 보내주세요~

민우는 돈이 필요할때면 그냥 따로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문자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Venmo로 request 하나 틱~ 보낸다.
아래 것은 새 학기가 되어서 textbook을 샀다고 내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한거다.

고연놈 같으니라고.
이렇게 돈이 필요할때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청하다니. ㅋㅋ

민우는 이번학기에 듣는 과목들이 재미있다면서 아주 신이 났다.
세익스피어도 듣고, creative writing도 듣고, 연극 과목도 듣고, political science도 듣고, history도 듣고, 게다가 요가까지.

이 고연놈에게 열심히 번 돈을 이렇게 보내주는건 나로선 기쁨이다.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릴때부터 정말 겁이 많았다.
겁이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지나치게 과하게 많았다. ^^

꽤 클때까지 세발자전거를 타는걸 무서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살 어린 여동생이 세발자전거 앞에 타도록 하고, 나는 뒤쪽에 쪼그리고 앉았다고 부모님이 말씀해주셨다.
내가 5살이나 되었을때였고, 내 동생은 4살 정도 되었을 때였겠지.
세발자전거도 겁이 많아서 타지 못하는 아이.

학교다닐때 나는 시험때만 되면 하도 가슴이 뛰어서, 뒤로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쿵쿵쿵….
대학입학시험 보는 전날, 나는 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어 한두시간 정도 쪽잠만 자고 시험을 봤다. 순전히 겁이 많아서 그런거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겁이 많다.
나이가 들어 아닌척 하는 기술이 많이 늘었지만,
정말 엄.청. 겁이 많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신앙을 갖게 되고…
바로 그 신앙 때문에, 신앙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위험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그 결정 이후의 내 삶의 형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결정이었다.

그렇게 했단 결정들을 친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친구들은 내가 꽤 용감한 것으로 생각한다. -.-;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세발자전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다섯살짜리 아이와 같다.

여전히 나는 사는게 많이 무서울때가 많다.
그냥 불확실성이 많이 두렵다.
이렇게 겁이 많은 내 성격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내가 가진 신앙 때문에 내 성격이라면 하지 않을 결정을 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 삶의 모든 모습을 계수하는 날이올때,
하나님께서는 내 겁 많음을 책망하실까?
그렇지 않으면… 겁쟁이로서 그 핸디캡을 가지고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던 모습들을 칭찬하실까?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