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그늘 아래

내가 생각하기에 내 장점이자 단점 가운데 하나는, 웬만해선 쉽게 질리지 않는다는 거다.
똑같은걸 몇번이고 반복해도 별로 지루하지 않다.

지난주말, 이 노래를 한 50번쯤 들었다.
여러 다른 사람들이 부른 버전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를 자유케하시길…

내가 좋아하는 쉼

내가 쉬고 싶을때 하는 모습은 딱 이렇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을 하면서… 생각을 좀 많이 해야하는 강의나 오디오 북 등을 듣는 것이다.

이게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거 아는데… 나는 그게 진짜 휴식이 된다.^^

뭔가 머리를 많이 써야하는 강의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건 공부이지 쉬는게 아니다.
게다가 인터넷에 있는 강의들이라는게 대개는 내 두뇌를 100% 사용해야할만큼 어렵지 않으니까… 남아도는 자원이 내게 있는 거다.

뭔가 쉰다는 것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약간 남아도는 brain function을 쓰기 위해서 나는 10년,20년이 지난 게임을 하곤 한다. 가령 수호지같은^^

언제부터 이런 이상한 버릇이 생겼는지는 나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데… 뭔가 스트레스 많이 받으며 일하고 난 스테레스를 나는 보통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푼다.

그렇게 하고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오디오북이나 강의를 들으니까 새로운것을 알아서 좋고…

이번 주말엔 그렇게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ㅎㅎ

성경 개관 hangouts group

최근에 회사일이 완전 장난아니게 바쁘고 stressful해서 살짝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할일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서 또 hangouts group을 하나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구약과 신약 전체를 4~5주만에 후다닥 훑어 내려가는 class인데 생각보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sign-up을 해서 살짝 놀라고 있다.

내가 최근에 엄청 stress 많이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이런 중에도 잘 할 수 있을까.

혹시 비슷한 형태의 그룹을 인도해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은 제게도 tip을 좀 나누어주십시오.^^

부채의식

바울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사람인 것 같아 보인다.

낮에는 텐트를 만드는 사람으로 일하고, 밤에는 전도를 하는 삶을 살기도 하고,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격렬하게 토론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갈길을 가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그것 때문에 매도 맞고, 조난도 당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그야말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이게 내가 해야할 일이다’라는 것이 정해졌을때 타협함 없이 쭉~ 직진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참 독특한 것은 바울이 가졌던 부채의식이다.
내가 복음을 받았는데,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그 부채의식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평생을 살면서, 포기하거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쭉~ 직진하면서 역경을 견뎌내어야하는 것도 있을 텐데…
바울에게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것이 이 부채의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꼰대 (5)

꼰대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상황이나 배경에 무관하게 강요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반대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에게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런 사람이 리더나 멘토의 위치에 가면 훨씬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꼰대는 그래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라도 하지.
자신의 생각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는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고, ‘착하고 옳은 소리’만 계속 하는 리더를 상상해 보았는가?

매일 웃으면서 착하게 살아라. 교통법규 잘 기켜라, 친구랑 싸우지 말아라… 정말 착하고 옳은 이야기만 하는 nice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이끌어 리드할 수 없다.
그냥 그 사람은 착한말 위키피디아인거다.

나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꼰대인 경우와 착한말 위키피디아인 경우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 볼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차라리 꼰대가 낫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어느 정도까지겠지만…

꼰대 (4)

내가 생각하기에,
일반적인 인생의 지혜는 말할것도 없고,
특히 신앙의 성숙에 관한 한, 그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으로부터 배우는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사람마다 필요의 차이가 있고, 또 상황에따라 그런 멘토십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분명히 많다.
그렇지만 정말 사람들을 돌볼줄 알고,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신앙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그리고, 먼저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건 자신이 얻은 지혜를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나누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며 얻었던 지혜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나누는 것은 일종의 ‘빚’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선배들은 꼰대로 몰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후배들을 위해 내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의 후배들은, 때로는, 의사소통 방식이 꼰대와 같이 느껴지는 선배라 하더라도,
그들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 거의 필사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꼰대’라는 label은 가능한 멘토십을 약화시키고 그나마 있는 멘토십 조차도 무시하거나 거부하게될 위험이 있다.

힘내라, 힘!

나는 비교적 꽤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걸 어느정도는 하는 편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multitasking을 잘하는것 같지는 않고, 다만 많은 일들을 시간을 쪼개가며 나름대로 내 시간사용을 최대한 optimize하는 것을 어느정도 할 줄 아는 것 같다.
이런 능력(?)이 길러진건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부터였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이 뜨거워져 성경공부도 더 많이 하고 싶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더 자라나고 싶어 좌충우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한편으로는 학교 실험실에 묶여서 해야하는 일들이 아주 많았다.
하루 12시간정도는 학교 실험실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그러면서 어떤때는 한주에 3개인가까지 성경공부를 했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만들어서 했거나 인도했던 것이었고.
그러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고, 근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 가서 봉사도 했었다. 크지 않은 교회이지만 청년부를 막 셋업하는 일도 했었고.
예전에 체력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회사에서 일이 너무 많아 지난주에는 살짝 멘붕이 왔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한꺼번에 떨어지는데 정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회사일 말고도 당연히 하고 있는 다른 일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들을 다루는데 버겁하는 생각을 했다.

20대초반부터 나는 이렇게 내 시간과 자원을 쪼개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냥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지난주엔 마음이 조금 흔들리면서 살짝…에이… 힘들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힘이 달려서 허덕허덕하는 사람에게 ‘힘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꽤 잔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겐 지금 그렇게 힘내라고 더 세게 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더 이상 20-30대의 체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니 예전처럼 그렇게 달릴수는 없다 하더라도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적어도 내가 찾아낸 방법은, “막~ 달리는것”인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20대부터 발견해온 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이다.

밤에 일이 끝나고 나면 힘이 빠져 머리를 쓰는 일을 할 만한 힘이 잘 나질 않아 그냥 맹~하게 버리는 시간이 꽤 많다. 아직 조금 더 힘을 내어볼 여력이 있는 듯.

올해 초, 말씀 묵상을 하면서 그러한 나의 부르심에 더 충실하게 살자는 결심을 했었다.
이번주를 지내며, 올해 초 그 결심을 다시 되새겨 본다.

하박국

매일성경의 순서로 말씀묵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난 월말의 묵상 본문이 하박국이었다.
하박국은 폭력이다! 라고 소리치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박국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풍성한 설명을 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설명해주시고 그 그림에 하박국을 초청하신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도 나오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도 나온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일어난 즈음에 함께 읽었던 하박국은 언뜻 내게 큰 도움이되지 못했다.
그게 나는 화가났다.
어찌보면 이런 상황속에서 잘 맞아들어야하는 말씀인건데 이렇게 내 마음에 겉돌다니…

하박국 묵상을 마친지 며칠이 지나, 다시 그 말씀을 조금 곱씹어보니…
상황에 대한 일차적 해결을 당장 원하는 마음으로 하박국을 읽으면 도움이되지 않는게 맞다.
하나님께서 고구마 100개 드신듯한 말씀을 하시니… 복창이 터질 지경인거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게 구조적 악과 싸우는데 궁극적으로 남는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가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면 자신의 문제에 파뭍혀 이것이 잊혀져버릴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그림, 하나님의 공의가 마침내 이루어지는 그림… 그런걸 그리게된다면,
이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가 조금 사그러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래 남을 수 있을 것같다.

슬픔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이유들

어제 우리교회 ‘하나님 나라’ class에서 잠깐 나눈 이야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아픈 일들에대해… 기독교가 (이상한 기독교 말고, 제대로된 기독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네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인권(human right)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유대-기독교적 가치가 아니라면 그 이론적 근원을 찾기 어렵다.
다른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그 세계관이 가지는 논리적 결과로 도출될 수 없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이것은 다른 종교인들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윤리의 근원적 논리적 바탕이 기독교적 전통에서 solid하게 발견된다는 의미

둘째,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 신 혹은 신적 존재가 인간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고통 속에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느냐고 물으면, 기독교적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속에 계신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이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다른 세계관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셋째,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내가 특별한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이룬 내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겸손할 수 있다. 내가 뭔가 해답을 가지고있다고 나대지 않고, 이 아픔을 일차적으로 느끼는 흑인 형제 자매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들의 뒤에 따라 서는 것을 할 수 있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악의 솔루션은 훈장질이다.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안에 함께 머물며 내가 뭔가 급하게 해답을 주어야한다는 헌된 중압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한다.

넷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다. 내 아버지의 나라다. 세상의 아픔은 내 아버지 나라의 아픔이다. 이 땅이 내 아버지 나라인한, 그리고 그 땅에서 아픔이 있는 한, 기독교인들은 그 속에서 그 깨어짐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수 밖에 없다.
내 작은 영역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agenda가 성취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치지 않는 동인(motivation)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

미국의 상황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두가지 이유

George Floyd가 경찰의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한 것으로 인해 미국 이곳 저곳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사는 곳 근처도 도시에 따라서 저녁 8시정도부터는 대개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건 정상적인 이성과 감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 분노하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은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선진 시위’와 비교되기 때문일까.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참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일단, 적어도 내가 아는바, 이곳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게를 부수고 물건을 빼앗아가는 폭도는 아니다.
오히려 시위에 참여하는 틈을 타서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은 그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져버린다.
1992년에 그랬던 것 같이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 –> 정당한 분노 –> 무질서와 약탈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공식이 되어버리면 그건 흑인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에따라 생긴 공권력의 공백이 이런 폭력배들의 약탈로 이루어지는 고리가 끊어지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적어도 미국의 상황에서는.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 정말 분노하는 ‘정의로운 보수 백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령, 남부의 백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중에 양심있는 사람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 미국 정부의 현 대응은 잘못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그냥 흑인들과 ‘좌파 백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내 판단이 틀리기 바라고, 정말 정의로운 보수 백인들의 등장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나는 늘 사회의 변화가 자주 그렇듯이, 결국 세대가 지나가야 느껴지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세대가, 보수 백인의 가정에서 자라는 다음 세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궁금하긴하다.

민우는 자신의 세대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자기가 만나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고 이야기하긴 한다.

민우의 친구 집단이라는게… 아마 bias가 있을 테니…

어쨌든,
많이 화도 나고, 많이 안타깝기도 하고, 많이 답답하기도 한데…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무겁다.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