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롤러 코스터를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은 재미있다. 물론 그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for example, 우리 어머니^^)

롤러 코스터를 탈때 느끼는 머리 뾰쪽 서는 느낌은 일종의 무중력감이다. 중력과 함께 낙하를 하기 때문에 잠간동안이나마 중력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중력감을 느끼는 다른 event가 있다면, 고층빌딩에서 자살하기위해서 낙하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롤러 코스터는 재미로 타지만 아무도 자살을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롤러 코스터는 안전함을 믿지만, 자살은 한번 떨어지만 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롤러 코스터도 이렇게 재미있게 탈진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인생의 롤러 코스터는 어떠한가?


생을 살다보면 승리의 순간과 절망과 패배의 순간을 모두 경험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실하다면, 나는
절대로 안전하다! 그러므로 내가 빠른 속도로 높은 고지를 올라가고 있건, 가장 낮은 곳을 지나고 있건, 정신없이 빙빙 공중회전을
하고 있던 간에… 이것을 통해 내게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의 blessing들을 기대하고 그것에 흥분할 수 있다.

만일 up & down이 없는 롤러코스터라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up & down이 없는 인생이라면 그것이 순탄할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짜릿함은 없겠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자!

Risk-taking faith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risk-taking 하는 측면이 있다.

므나의 비유나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밑천을 그냥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낸 종들을 책망한 것은,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라기 보다는…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한 것에대한 책망의 성격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주인을 hard master로 인식하고,
risk taking 하지 않은 것을 주인이 책망한 것이다.

내가 주위에서 보는 많은 ‘지식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물론,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가 아주 그런 성향이 많은 사람이지!)

안전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과감함’을 포기하는 자세.
정말 ‘믿음’을 가지고 risk-taking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주저하고 망설이고 재고 따져보다가 결국 ‘안전함’을 선택하는 자세.

오늘 아침 말씀 묵상에서,
주님께서 내게 하신 책망이자 격려였다.

내가 보는 나, 다른 사람이 보는 나

1. 내 professional field에서
나는, 내 지도교수가 나를 underestimate 한다는 생각이 들때마다 몹시 답답하고 화가 났었다.
지도교수가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나는 훨씬 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내 지도교수의 성향과 내 성향의 차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내 지도교수에게 (아니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100% convice 시키지 못하면 정말 많이 답답하다.

2. Christian environment 에서
사람들이 나를, 실제 나보다 훨씬 더 괜찮게 본다.
정말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Christian들에게는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문화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주일예배가 주는 의미

주일 예배는,
내가 생각하기엔… celebration 이어야 한다.
주일(일요일)을 안식일(토요일)을 대신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서로 감격했다고…
주일의 예배는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의미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닌, 정말 승리의 주님을… 비록 현재의 삶에서 모든 것이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
주일 예배는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양육을 받고…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통해서 별로 공급을 받지 못해도, 정말 celebration이 되었다면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성경공부 하고, 개인 성경연구 하고… 하는 일들을 한 10년 정도 하고나면…
왠만한 설교를 가지고는 ‘공급’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아침의 QT 말씀이 설교 말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일 예배가 정말 celebr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celebration’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구원 얻는 백성으로서의 기쁨이다!

저 아무것도 없이… 한시간 내내…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 안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은 정말 다릅니다! 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제대로 주일예배가 드려지는 것일 것이다.

2.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말 다른 사람의 영적,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재정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섬기며…
내가 아끼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정말 있다면… 설교가 그날 ‘꽝’ 나도…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마이크 사고가 나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celebration 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나보다 훨씬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기도를 해도… 정말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일 예배를 점검해본다.

나는… 정말…
입만 살아 있는… 말만 살아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복습

요즈음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배웠던’ 기초 개념들을 복습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나 내가 그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살고 있는지 깜짝깜짝 놀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것,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조절하셔야 내가 안전하다는 것,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것…

내 삶이 나를 지치게 만들때,
내가 돌아가 휴식할 유일한 ‘그곳’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임을 자꾸 깨닫는다.

그것 없이… 세상을 뒤집겠노라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 하겠노라고,
다른 사람을 섬기겠노라고… 방방 뛰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

1990년에 나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바로 그 모습을 꼼꼼하게…
‘복습’ 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으면…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불사이자사(不思以自思)

不思以自思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생각이 난다.

김교신 선생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살고자 했으나, 무의식 중에서도 끊임없이 그분을 묵상하는 것이 되지 않음을 한탄하던 중,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날의 일기에, 기쁨이 넘쳐서
不思以自思 라 쓰고 그 기쁨을 마음에 새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

꿈 속에라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잠들고,
아침에 깨서 첫 생각이 예수님이기를 바라며…

귀족 크리스천

인간의 사회는 어느 곳이 건 ‘계층’이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부정적이지 않은 부류의 계층도 있으나 그 계층의 존재
자체가 그 사회 혹은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더 흔한 경우인 것 같다. 성경은 이러한 계층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로마서 13:1) 적극적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에베소서 2:14)

계층은 우리가 속한 지역 교회, 신앙 공동체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계층은 교회의 건전한 성숙을 이루는 좋은 프레임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친다. 그러나 교회 혹은 신앙
공동체에서 특정 ‘계층’을 이룬 사람들이 성경적 공동체를 이루는데 큰 제약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들은
‘귀족 크리스천’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이들은
‘교회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오래 교회 생활을 했거나 종교 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어서 예배의 한 순서가 끝나면 그 다음
순서를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신앙의 ‘레벨’을 교회 문화에 익숙한 정도로 평가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의 감격에 의지해서 사느냐 하는 것보다는 종교적 행위, 교회 봉사 등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그 평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때의 멸시는 물론 겉으로 잘 들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건덕(健德: 덕을 세움)을 중요시하는 교회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에 덕이 되지 않는
말은 입에 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에는 담는다.) (마가복음 7:6-23)

이들은 또한 대부분
‘가르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가 되건 가르치려 한다. 10여명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성경공부에서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어놓은 삶의 구체적 고민들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마치 유일한 성경적 정답인양 30분씩 충고를 해 준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대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건에서 겪은 일들이나 인상 깊은
설교로부터 가르칠 거리들을 잘 준비해 놓기 때문이다. 어려움이나 고민을 겪는 당사자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그저 한
사례(case)로 입력되어 자동적으로 해답을 출력한다. 당사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겪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상황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어떠한 깨달음이나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돌이키는 것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종교적
원론을 남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큰 기쁨이다. (디모데전서 1:5-7)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결코 꺾는 일이
없다. 자신이 한번 결심하고 결정한 것은 무조건 ‘옳은 것’으로 여기고 모든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과 충고와 협력을 거부하는 것을 신앙의 절개로 여기고 흡족해 한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동역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이들이 리더가 되지 않는 한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남아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이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행태는 지극히
율법적이고 종교적이다. 때로는 아무런 의미 없는 율법적 혹은 종교적 행위를 반복하면서 모든 다른 사람과의 동역을 거부한다.
(에베소서 4:1-3)

이들은 매우 사역 중심적이다. 지역 교회를 비롯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들은 탄탄한
종교행위의 이력을 바탕으로 많은 자료들과 인력을 동원해 사역을 진행시켜 나간다. 이들에게 있어 한 영혼의 구원과 양육, 성장,
치유 등의 개념보다 우선하는 것은 집단적 성장을 위한 계획, 전략, 추진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동역 하는 것은
보기 어렵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따를 ‘추종자’만이 요구될 뿐이다. 때로 자신이 거의 혼자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역
계획을 수립해 놓고 이 일들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신앙의 성취이자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성향은 ‘일꾼’을
찾는 많은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나 리더들에게 인정을 받기 마련이고 소속된 신앙 공동체에서 단기간 내에 요직을 차지한다.
(누가복음 10:38-42)

이들 ‘귀족 크리스천’들은 대개 실패의 경험이 없는 ‘성공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경우도 많다. 그들에게 있어 이처럼 좋은 배경은 자신의 신앙적 자존심을 한껏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다. 실패 혹은 좌절의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기 때문에 실패나 좌절은 당사자의 잘못쯤으로 여기고 정죄하기도 한다. 진정으로 낮아지는 섬김의 모습을
이들에게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들에겐 그저 성공을 향한 전진이 최상의 목표이다.

귀족 크리스천, 그저
이름만으로도 씁쓸한 웃음을 지어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두 단어가 한 절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속한 신앙 공동체에서, 이러한 귀족 크리스천은 흔히 발견된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캠퍼스
모임 리더들 사이에서 어쩌면 귀족 크리스천은 더 강한 연대를 가지고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특히 어쩌면 ‘특권
계층’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귀족 크리스천은 더욱 쉽게 발견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고 털어내시며 우리를 섬기시지 않았는가.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으시며 왕이 종으로
섬기시는 모습을 몸소 보이시지 않았는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그분은 이제 너희가 나가서 사람들의
발을 씻으라고 우리를 보내고 계시지 않은가.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KOSTA/USA-2001은 그래서 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반란으로 느껴진다. 금년 코스타가 유난히 더 기대된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