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funding

Start-up company를 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전 속력으로 계곡을 향해 달려가면서 누군가가 그 계곡에 다리를 만들어 줄 것으로 소망하는 것.

나같이 겁이 많은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start-up company의 일부가 되는 것이 참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인데…

우리 회사의 ‘잔고’가 5월 말 정도까지만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이 된지 꽤 되었다. 좀 여유있으면 좋으련만 뭐… 쩝.

그런데 최근에, 5월 중-하순 정도까지 어떤 진전을 이루면, 앞으로 1년 정도의 재정이 채워지도록 deal이 이루어졌다. (아직 finalize 된 것은 아니지만 대충 1년동안 $ 1M 정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쪽으로 정리가 되고 있다.)

하나의 계곡에 다리가 만들어 졌다. ^^

문제는 그 다리가 끊어지기 전에 그 다리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는데….

물론 힘들때도 있지만, 이거 참 해볼만하다!! ㅎㅎ

하나님의 인정, 사람의 인정

내가 잘 아는 형이 있다.

소위 그 삶을 드려서 ‘헌신한’ 사람이다.

여러가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credential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내려놓고’ 헌신했다.

그 형의 그 헌신의 이야기를 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 형과 그 형의 이야기는 꽤 유명해졌다.

그런데… 

내가 그 형을 보면서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

그것은, 너무 젊은 나이에 유명해져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는 헌신이 참 아름답기는 한데,

이제는 그것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너무 젊은 나이에 ‘뜨는’ 바람에… 오히려 그것이 그 형의 자유로운 헌신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때가 참 많이 있다.

(물론 그 형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우려가 그저 기우일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지난 주,

후배 부부가 자신의 것들을 ‘내려놓고’ 선교에 헌신한 이야기를 들었다.

참 감동적이었고, 그 부부가 정말 그 헌신을 아름답게 계속 이어가길 기도한다.

그러나…

그 부부를 보면서… 내가 아는 그 형이 겹쳐서 떠올랐다.

자신의 헌신이 자산이 되어서, 이제는 그 자산을 바탕으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 후배 부부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 부부의 아름다운 헌신을 하나님께서 많이 기쁘게 받아주십시오.

저 헌신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혹여나, 저 헌신이 하나님과 사람들앞에 내세우는 장식이 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혹시… 한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사랑하시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을때, 그 ‘헌신’이라는 장식품을 꺼내어 몸을 치장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싶은 욕망이 떠오를때… 주님께서 저 귀한 부부의 손을 꼭 잡고… 

“그 헌신, 내가 참 기뻐한단다. 그거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않아도.. 괜찮단다. 내가 너희와 이렇게 함께 하잖니… “

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적어도 한동안 만이라도…

이 귀한 부부가, 그리고 이 귀한 헌신이…

너무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떠벌려저서 이들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Everybody’s Normal Till You Get To Know Them

최근, Everybody’s Normal Till You Get To Know Them 이라는 책을 읽었다.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님인 John Ortberg가 지은 책이다.

그냥 책 제목만 보고서도…

아… 이거 뭐 다 아는 얘기…

이렇게 생각했었고,

역시 읽어보니… 역시 다 아는 얘기 였다. ^^

그.런.데.

그 ‘다 아는 얘기’가 그렇게도 깊이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얼마나 정상이 아닌 사람인가… 

그 책에 나와 있는 대로 as-is tag이 붙어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내가 역시 다른 이들을 그렇게 바로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한동안, 책, 강의, 기사, 심지어는 설교까지도…

내가 다 아는 얘기를 하는 것은 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이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너무나도 자주…

내가 이미 다 아는 얘기를 내 마음 깊이 안착시키는 일을 더 많이 해야할 때도 있는데 말이다.

한동안 조금 더,

“내가 다 아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쿨~ 하기 어려운…

어제 글에서,

정치에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어조의 글을 쓰긴 했지만,

현재 5:50am. 크게 실망스럽다. -.-;

한편으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국민에게 무엇을 바라랴…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하고,

도무지 대안세력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야권에게 무엇을 주기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결과를 새누리당이 얻어내는 것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유시민이 그랬던가.

우리나라는 정치지형이, 기울어진 축구장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

진보쪽은 기울어진 아래쪽에 골대가 있고, 보수쪽은 위쪽에 골대가 있는.

정말 그말이 맞는 것 같다. -.-;

별로 쿨~하게 이 아침에 생각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이성을 회복하면서 더 쿨~ 해지겠지…

정치에 대해서 갖는 기대

복음을 알기 전에, 나는 참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 앞길 잘 열리도록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복음에 눈을 뜨고 나니… 

이 망가진 세상 속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대학교 1학년때, 소위 87 민주화 항쟁 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에서 마침내 독재정권이 굴복하고 민주주의가 세워지는 역사적인 해였다. 그런데 그때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 것이 참 불편하게 느끼지기까지 했다. 비록 지방 단과대를 다녔지만 (^^) 그곳에서도 나름대로 시험 거부도 하고 뭐 그런거 했었는데…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제대로 치루고 싶은 욕심에 그렇게 하는 것이 참 꺼끄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후에 내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깊이 후회한 것 가운데 하나는,

내가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 정말 형편없이 편협하고 이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그때 역사의 현장에서 시위에 한번이라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 부끄러웠다. 

지금도 나는 여러가지 정치적 사안에 대해 관심도 많고, 신문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하는 편이다. 나름대로 정치적 입장도 꽤 뚜렷한 편이고.

그런데, 

87년 시민항쟁으로 얻어진 기회를 독재자의 후계자에게 그냥 넘겨주는 한국 사회를 보면서,

92년 삼당합당이라는 반민주적인 (지금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야합을 통해서 다시 왜곡이 발생하고 기득권이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97년 드디어 민주 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그 정권이 결국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면서,

2002년 큰 기대를 가지고 태어난 노무현 정권이 후반에 ‘실패한 정권’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지고, 결국 2007년 이명박이라는 뽑지 말아야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한국 국민을 보면서…

소망과 좌절을 나름대로 참 많이 경험했다.

예전에는 92년 대통령 선거였던가… 그때는 정말 예배당 한 구석에서 소리를 꽤 높여가며 김영삼이 당선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던 기억도 난다. ㅎㅎ

그런데,

한편 아직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물론 내 신앙이라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더 이상 ‘정치적 변혁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다소 나이브한 생각은 포기하게 된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청산 혹은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박정희 공화당 – 민정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에 어떤 소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민주진영 혹은 진보진영에 대한 기대 수준을 현저하게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나는 기회가 있을때마다, 내가 힘이 가능한대로, 필요한대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을 지지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에게 궁극적 희망을 두게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로 꽤 시끄러운 것 같다.

정말 제발… 청산되어야 할 사람들이 물러나게 되고, 뽑히지 말아야 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뱃지를 떼게 되는 일이 생기길 바라지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금년 후반의 대통령 선거에서 과거로 회귀하는 일이 없게되길 정말 바라지만… 

나는 그 대안 세력에 소망을 두기 보다는 그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지는 하나님의 손길에 더 주목을 해보고자 한다.

아마 그렇게 되면 정치에 대해서 갖는 기대도, 또 그것이 실패했을때 갖게되는 좌절도 그렇게 크지 않을 것 같다.

함께 살며 성장하고 싶다.

내가 늘 마음에 가지고 있는 burden은, ‘후배들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관심의 대부분이 그것에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 그리고 특히 부활절을 지내면서, 그것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키워내는 것 이외에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다” 는 바람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그저 함께 하면서 잘 해보자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의 길을 걷고 싶다는 바람이라고나 할까.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그래도 감격에 젖은 부활절을 보냈지만, 그 celebration을 다른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 계속 허전함으로 남아 있다.

함께… 살며… 성장하고 싶다.

부활절 묵상

빈 무덤은,
내게 매우 오랫동안 그저 멋진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사용되는 좋은 배경음악과 같은 것이었다.
스토리 전개에서 그것이 없으면 섭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이 핵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

그런 예수의 부활이 내게 깊이 의미있게 다가오게 된 것은, 93년 부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석사과정을 마치고 시작한 첫 직장생활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것에대해 idea가 없었고, 직장 상사와 맞지 않아 정말 많이 힘들었다. 유학을 가야한다는 압박과 정말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등이 나를 누르고 있었고, 일주일에 100시간 가까이 일을 해야하는 환경 속에서 나는 몸과 마음과 영혼이 모두 지치고 있었다.

기도할때마다 참 마음이 무겁고 힘들었었다. 매일 아침, 그저 회사에 나가는 것이 힘들고 싫어서 거의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기도를 하고 가야할 정도였다.

그 고난주간, 나는 금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주일동안 아침과 점심 금식을 하고, 금요일에는 하루종일 금식을 하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지 않으므로, 시간이 남아서 나는 주차장에 혼자 가서 찬양도 듣고,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면서 점심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그 고난주간의 묵상은 복음을 받아들인지 3-4년정도밖에 되지 않는 내게는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풍성함을 가져다 주었다. 혼자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회사 뒤쪽 야간 같은 곳에서 점심시간에 그야말로 목놓아 울기도 하였다. 

나는 그저 내 문제로 힘들다고 이러고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이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이 가슴이 깊이 다가왔다. 아… 나는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했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다고, 여전히 나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고, 여전히 나는 내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가 돌아가셨다니…

기도를 하면서… 마치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시는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십자가 아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게 남는 것은 이것이었다. 아니,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이렇게 힘이드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셔서 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나는 이렇게 힘든데… 가슴이 답답해져서 계속 그렇게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부활절, 나는 내 눈이 새롭게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만일 주님께서 정말 부활하셨다면… 정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면… 인간의 그리고 나의 궁극적 문제인 죽음의 권세가 껶인 것이라면…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인내를 가지고 그렇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망을 가지고 견디어 낼 수 있겠다… 하는 깨달음이었다.

글쎄… 그때의 깨달음이 대단히 신학적으로 깊은 것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부활이라는 명제 앞에서 소망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붙들 수 있었던 정도였다고나 할까. 그 이후에 성경공부등을 통해서 그 부활의 깊은 의미에대해 catch up 하는 데에는 그후로도 몇년이 더 걸렸다.

그 부활절이 왜 그렇게 내게 특별한 것이었을까?

물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내게 그런 eye-opening experience를 하게 하신 것이기도 했겠지만…
예수께서 겪으셨던 처절한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과 내 어려움을 동일시(?)할 수 있었고… 그래서 부활의 아침에 내게도 소망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말하면, 예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이 깊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이 컸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번 부활절 예배에서도, 나는 부활의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정말 부활하셨다. 어둠이 깊을수록, 그 부활의 소망과 기쁨은 선명하기만하다. 어둠과 깨어짐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부활의 소망이 더둑 빛나고 있다.

Christ is Risen. He is Resin indeed!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7)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정말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마치 아직 무엇이 덜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될때도 있지만, 이제 정말 다 이루셨다. 죄에대한 궁극적 심판도, 내 죄에 대한 속죄도, 피조세계의 회복의 시작도, 이제 다 이루어졌다.

이제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세상이 감히 상상할수도 없는 소망이 주어졌다.

내일 부활절에는 이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마음껏 죽음을 향해 조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께서… 정말…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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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6)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참 길고 긴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목요일 밤에 붙잡히신 후에,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새벽녘에 엉터리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또 다시 각종 모욕과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해골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몸을 박아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받으시는… 정말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모두 담당하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광대한 작업의 시작이 이제 완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십자가의 외로운 처형을 경험하시면서 참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시지 않으셨을까.
만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그 아버지와의 fellowship이 참 그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끊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인데.

금요일 낮시간이 지나면서는, 예수께서는 이제 고통을 소리쳐 표현할 힘도 다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내 옛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깊이, 아주 깊이… 눈물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칠언 (5)

요한복음 19:28
“목마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시편 69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정말 목이 마르셨다.

우리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하필이면 왜 이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한 처형 방법이어야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죄의 consequence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형법이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 방법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33살 청년 예수의 몸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정말 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밝히 드러나면서, 정말 어쩔줄 몰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이제는 죄가 싫은데… 그것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들.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왜 그렇게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매고 있는 것인지.

내 자존심을 꺾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는 것은 왜 그렇게 힘이드는지. 왜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지.

각종 음란함은 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것과 같은…

이런 내 안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시는 육체적 고통에 담겨있다.

내가 내 sinful nature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 마다, 그리고 그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고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타협하고자 하는 이 죄 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 고통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것을 토닥거리며 함께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 드러내고, 토설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겨내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더 선명할수록, 죄를 다루는 내 모습이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