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7)

(추신)

제가 글을 써놓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가지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아 덧붙입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생각이 그저 논리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사실 많은 경우 그것들은 우리의 경험과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위 능력과 실력, 그리고 학력으로서 상당한 고지에 이르러 있지만 사회적 고지에 이르러 있지 않은 제 입장에서 보면,

실력과 능력, 그리고 학력으로서 최고지에 이르지 않았지만 사회적 고지에 이르러 있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고지론이 때로는 그저 naive 하게 보일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고지론에 대한 이야기가 객관적인 주장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경험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70년대 80년대 그리고 9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제 선배님 (고지론 원조 목사님을 비롯해서^^)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이제 21세기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저나 제 후배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한 시대나 경험을 지내온 사람들이 다른 시대나 경험을 지내온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틀렸다’고 매도하는 것은 폭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의미에서 고지론자가 반고지론자를 적으로 여기는 것이라던가, 반고지론자가 고지론자를 과도하게 비난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겠지요.

한때, 

제 후배들이 고지론에 열광하기도 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 하기도 했고,

때로는 고지론에 상처받기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고지론자들에게 많이 분노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에서 고지론을 주장하시는 신실한 분들을 미워했던 제 자신의 잘못된 자세를 깊이 반성합니다.

그리고 고지론자인 선배님께도,

다소 뜬금없지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고지론자는 아닙니다만,

고지론을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제 적이 아니라,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라는 생각을… ‘이웃 또 다른 우리’라는 금년의 KOSTA 주제를 묵상하면서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길고 지루한 편지글, 그리고 이 사족과 같은 추신까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6)

박 선배님,

그렇지만 저는 예전처럼 그렇게 강력한 반고지론자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이들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전하는 논리의 완벽함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반지성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지성주의적 관점에서 완벽한 논리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피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제가 이렇게 선배님께 편지를 쓰지만, 제 생각에도 분명히 헛점이 있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배님의 반론도 기대해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사리분별을 하고, 논리적 사고를 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노력이 완벽할수는 없다는 겸손함을 계속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제가 소위 ‘고지론’ 메시지에 헌신했다고 이야기하는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이들의 대부분은 고지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 그저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며 피가 들끓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K 운동에서 여름 집회를 했을때, 오전에는 반고지론자 설교자가 서시고 저녁에는 고지론자 설교자가 서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의 대부분은 전혀 혼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이게 꼭 다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그 두개의 다른 message에 혼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critical thinking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한번에 고지론에 헌신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지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결국 인도되는 곳이 고지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헌신 이라면… 저는 그렇게 헌신의 통로로서 열정을 가진 이가 고지론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건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 아닙니까.

셋째, 그 고지론을 말씀하시는 ‘원조 목사님’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젊은 학생들이 그분의 좋은 점을 많이 닮았으면 합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자신이 믿는 것을 그대로 행동에 옮기시는 모습을 보면 깊이 존경심이 듭니다.

그리고 또 그분의 젊은 학생들을 향한 passion은 늘 제 마음도 뭉클하게 만듭니다. 

그분의 동기에대해 저는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가진 참 소중한 보배같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아주 극소수이지만, 그래도 고지론을 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의 실력과 위치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나오길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제 생각과 논리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헛점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세번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선한 양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주장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기대를 갖습니다.

제 주장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 후배들에게 요즘 가끔 이야기합니다만…

저는 진심으로 고지론을 용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좀 과해서… 하지만 이것이 제게는 제일 적절한 표현입니다. 한동안 고지론에 대한 적대감과 반발심에 쌓여있던 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박 선배님,

괜히 제 글이 지루하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선배님께서 혹시 기분나쁘게 읽으시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되면, 선배님의 말씀을, 차 한잔 앞에두고 찬찬히 좀 듣고 싶습니다.

제게도 생각의 구멍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배님도 저도…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동창생 아닙니까.

주안에서,

목수의 졸개 드립니다.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5)

박 선배님,

그럼 사람들이 제게 많이 묻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삶의 방향은 어떤 것이냐고요.

옛날 같으면 고지를 차지했을 텐데,

나보다 실력 좋지 않은 아무개는 나보다 훨씬 잘 나가는데,

아, 내가 그때 진로를 이렇게 선택했어야 지금쯤 고지에 있는 건데,

이런 ‘찌질이’가 되어야 할까요?

혹은,

이 공정하지 못한 더러운 세상, 확 뒤집어 엎자!

하는 과격 분자가 되어야 할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실력에 비해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방향은 다음의 몇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꾸준히 노력해서 나름대로 최상의 고지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고지를 차지하는 것 자체가 가지는 대단히 큰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아지는 것 자체가 죄라던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전혀요.

자신의 삶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최상의 삶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고지’의 수준에 자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또 대단히 중요할 것입니다.

뭐랄까… 여전히 ‘고지론적 삶’ 이라고 할수는 있겠지요. 다만 modified 고지론이라고나 할까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자족’이라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높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성실함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높아지는 것은 성실함으로부터 따라올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이 따라올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이미 고지라고 사람들이 여기고 있는 것을 따라가기 보다는, 남들이 하지 않은 길을 개척해 가는 것입니다. 소위 ‘미답지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황병구 본부장이 이 내용을 복음과 상황 지에 기고한 적이 있었죠.

저는 처음 미답지론을 주장하는 그 글을 읽었을때, 아 참 좋은 얘기다… 하고 넘겼었는데요, 지금 제 삶을 보면 상당히 미답지론적인 삶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적어도 현재는 말입니다.

이미 고지라고 주어진 것중 하나를 선택하기 보다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제 삶으로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후배들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적극적으로 고지를 거부하며 사는 삶입니다.

Mother Theresa와 같이 말입니다.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4)

박 선배님,

뵙지 못한 동안, 제가 경험한 고지론의 영향이랄까… 제 경험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부를 꽤 잘 했을 뿐 아니라, 저는 공부를 참 좋아했습니다. 혼자서도 심심하면 전공 교과서에 나온 문제를 풀기도 했고, 이런 저런 새로운 실험을 접하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꽤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던 ‘모태 신자’였던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흔히 하는 이야기를 그냥 대충 받아들이고, 대외적으로 그것이 제가 공부하는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안정성을 확보하기위한 제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지만요.

대학교 3학년때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러나, 제가 가지고 있던, 야망은 처절한(?) 해체를 경험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공부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고, 신앙은 아직 제게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를 제공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관성 때문이었을까요… 공부는 계속 잘 할 수 있었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에서 석사도 마쳤습니다. 그 이후 직장생활도 했고요.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학문과 직업활동의 이유와 동기를 찾기위해 많이 노력했지만 뭔가 잘 톱니바퀴가 잘 맞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시계와 같이 자주 저는 제 자신을 ‘손을 봐줘야’ 했었습니다.

제가 고지론을 처음 접한 것은 휘튼에서 열린 K 수양회였습니다.

저는 당시 동부의 명문 공대 M 학교에서 막 첫번째 퀄리파잉 시험을 합격한 직후였습니다.

정말 교과서에서만 보던 사람들의 손길과 발자취가 실험실마다 배어 있는 곳, 노벨상 수상자를 동네 아저씨 보듯이 볼 수 있었던 곳에서 저는, 아… 정말 여기서 제대로 열심히 해서 빛을 한번 내봐야 겠다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고지론은 큰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정말 저 같은 사람에게 매우 잘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공부해서 남주고, 고지를 점령해서 유리한 싸움을 싸우고… 그 당시 ‘고지’를 향해 가는 제게 그야말로 불붙는 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공부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도교수를 여러번 바꾸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제 동기에 대해 많이 돌이켜보는 경험을 했고, 학업을 그만해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석사학위 2개, 박사학위 1개를 받는동안 제 지도교수가 총 7명이었으니.. 정말 쉽지는 않았죠.

그러면서 제 심장 깊은 곳에 있는, 이기적인 동기를 철저하게 점검하는 시간을 갖을 수 있었고, 대학교 3학년 이후 풀리지 않던 학문과 직업 할동의 동기에 대한 이슈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음을, 그저 최상의 것을 추구하는 학교의 분위기, 성공을 갈망하는 세상적 욕심이 저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마치 초콜렛 코팅이 상한 케잌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이 고지론이 덮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 지도교수는, 저희쪽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대충 5명 안에 드는 대가였습니다. 그래서 학회에서 제가 발표를 하거나 하면, 누구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제 talk에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었죠. 제가 전공한 분야가 소위 ‘오래된’ 분야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학문적 연구가 활발한 분야는 아니지만, 막상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이 많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반도체 제조분야, 나노 기술 분야에서 제 분야의 지식이 활용되지만, 막상 체계적으로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죠. 

그래서 제 지도교수는 각종 기업들로부터 많은 기술 자문 등을 요청받았고, 소위 expert witness 라고 해서, high-tech company늘 사이에 특허 분쟁이 붙었을때 전문가 의견을 내는 사람으로 많이 불려다니며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기 비행기도 있었으니까요.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같아 보였죠.

그런데, 이런 제 지도교수로부터 제가 아주 반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심한 ‘열등감’ (혹은 그 이면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우월감’) 이었습니다. 다른 연구 그룹에서 나온 논문을 보면서 그것을 깎아 내리면서 그 헛점을 찾아내려고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아주 빤히 보이는 방식은 아닙니다. 아주 subtle하게… gentle하게… 소위 학문적 비평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 처럼 하면서…) 

말하자면 세계에서 top 5에 있는 사람인데… 자기가 그중 4-5등 쯤이 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우려를 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이분에게는 top 5에 있으면서 top 3 까지가 고지인데… 그거 안에 들어야 하는데 뭐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일수도 있겠죠.

아, 제 지도교수는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아주 인격도 좋으시고요, 참 친절하고, 참을성도 많고,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너그럽고… 절대로 소위 ‘괴수’라고 불리는 나쁜 교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졸업을 1년 정도 앞두었을때, 매일 아침 QT/기도를 하는 시간마다 아주 반복해서 제가 병들어 있음을, 세상의 가치에 오염되어 있음을, 특히 M 공대라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identity보다 M 공대 학생이라는 identity가 저를 지배하고 있음을 자꾸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니 이제 좀 알겠으니 그런 묵상좀 그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는데도, 자꾸만 그런 묵상만 이루어지는 경험을 몇달동안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차적 목적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으로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의 경쟁 자체가 모두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이차적이라는 것이지요.

고지중에서 최고의 고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고지 중에서 최고의 고지에 있는 (혹은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3)

박 선배님,

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 이외에도, 제가 고지론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고지론에는 노력과 성공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망가진 세상입니다. 앞에서도 제가 언급하긴 했지만, 성실하게 땀흘려 일한다고 그것에 비례해서 보상이 주어지는 세상이 아닙니다. 물론 성실하게 땀흘려 노력하는데에, 보상이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개런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어떤이를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 임을 온전히 더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낮아지기 위해서 높아져라, 섬기기 위해 고지를 정복하라 라고 이야기할때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노력하지만 성공을 신앙의 양심상, 혹은 하나님의 다른 부르심 때문에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더 공정할수록, 고지론은 더 맞는 이론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악이 궁극적인 심판을 받는 그날이 오기 전, 노력이 성공을 담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지론은, 노력과 성공 사이에 하나님이 자리를 빼앗아 버리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고지론이 갖는 가장 치명적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다른이들보다 높아지려는 죄악된 본성이 다루어지지 않은채로, 주를위해 높아져라 라고 외치는 것이 무책임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성공의 빈익빈 부익부가 심각한 이 세대 속에서, 성공과 안정이라는 세상이 주는 신기루에 이미 영혼을 팔아버리고 있는 이들이게… 고지를 점령해서 섬겨라 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그저… 성공해라 라고만 해석되고 이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지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의도가 정당하고 선한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앞에서 노력과 성공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아버린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떤 의미에서 고지론은 이미 성공한 사람들에게 해야하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자, 이미 그렇게 고지를 점령했으니, 낮아져서 섬겨라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가 보고있는 대부분의 청년 학생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대상이 아닙니다.

저같은 resume를 가진 사람도 스스로 고지론이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끼는 마당인데, 과연 고지론이 맞아 떨어질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저 기독교를, 기득교로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을 불러오기 십상입니다.

오히려 고지를 점령하라 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혹시 하나님께서 이미 고지로 불러놓으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해라 라는 식으로, 즉 영역주권론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2)

박 선배님,

저 정도의 실력과 학력이면 한국에서 몇 퍼센트 안에 드는 사람일까요? 혹은 미국에서는요? 전 세계로 보면요?

저는 그게 소숫점 이하로 표현될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제가 고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뭔가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소위 제 ‘눈’이 높아져서, 혹은 주제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괜한 peer들과의 경쟁의식 때문에 이미 고지에 올랐음에도 고지에 오르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제가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소위 커리어 관리를 함에 있어 고지에 오르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설명할수도 있겠고요. (이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일정부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제 아버지 세대에 지금 저와 같은 resume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저처럼 느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아 이정도면 정말 꽤 안정된 고지구나 하고 느꼈을 가능성이 꽤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이유를 다음의 두가지로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이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성공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비해서 성공이 주는 보상(reward)는 대단히 큽니다. 일단 대박이 터지만 정말 크게 터지죠.

그렇지만 그렇게 안정된 보상을 받는 그룹의 비율은 과거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다수는 소위 성공하지 못한 loser로 살게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의 reward가 크기 때문에 성공을 향한 다수의 갈망은 예전보다 더 크지만, 실제로 성공에 이르는 사람은 적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은, 거의 대대로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떨어지기도 하고요.

두번째는,

어차피 성공 혹은 고지의 개념은 대단히 상대적입니다. 

연봉 1억/10만불 이상은 고지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고지라는 것이 그저 그 주변보다 더 높은 지대가 고지 이듯이, 성공의 고지 역시 주변보다 더 높아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그 기준이 대단히 상대적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하바드 출신이 가지는/느끼는 고지의 기준은, 중졸학력의 사람이 가지는 고지의 기준과 다를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지는 ‘지금보다 조금 더 높아진 위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 때문이 그렇다고 할수도 있겠지요.

고지론자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1)

박 선배님,

오랜만에 연락을 드립니다. 안녕하신지요?

벌써 뵙지 못한지도 몇년이 지났습니다. 선배님께서 쓰시는 글들을 그저 인터넷에서 읽는 수준으로 선배님께서 여전하시구나 하는 것을 알고 지냈습니다. 여전히 선배님께서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이 멋있습니다!

최근,

선배님께서 인터넷에 고지론을 옹호하는 글들을 쓰신 것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 훌륭한 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지론적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시는 선배님이시기에, 생각과 삶을 일치해서 살아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선배님,

그렇지만 선배님의 글을 읽으며 저는 뭔가 선뜻 선배님의 생각에 깊이 동의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을 또한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선배님의 삶과 생각과 신앙과 도전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제게 분명함에도 말입니다.

해서, 이 지면을 빌어 (screen 면이라고 해야하나요) 선배님에 대한 제 생각 몇가지를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우선, 제가 읽기에도 손이 좀 오그라드는… 읽은 사람 입장에서는 역겨울만한… 그런 내용들을 좀 한번 나열해보겠습니다 

저는, 모 특목고를 2년만에 마치고, 고3을 건너뛰고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것도 입학 성적이 꽤 좋았습니다. 

그 명문대를 과수석으로 졸업했고, 대학때엔 전공과목에서 A0 받으면 실망, A- 받으면 절망하는 수준의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그 후에는 저희 분야에서 소위 학교 순위로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미 동부의 모 공대에서 박사를 받았습니다. 

보통 저희 실험실에서 졸업하면서 논문 하나 낼까말까 수준인데, 저는 논문도 5개나 쓰고 나왔고, 그나마 그것도 지도교수 도움 없이 혼자 써서 낸 것들입니다.

고등학교때 IQ test를 했을때 나온 IQ는 155 였습니다.

지금은 소위 ‘최첨단’에 해당하는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데, 제가 속한 팀은 이쪽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제일 앞서가는 leading group입니다. 저는 그 속에서 소위 ‘핵심 멤버’ 가운데 한사람입니다.

그냥 괜히 소위 resume만 번드르르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제 전문분야에 관한한, 저만큼 잘 훈련되고 갖추어진 사람을 사실 그리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실력으로는 왠만한 상황에서 누구와 겨루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아… 제가 써놓고도 참 어이가 없습니다.-.-;  선배님은 저를 아시니까, 이해하실겁니다. 제가 무슨 어줍잖은 자랑하려고 이렇게 나열한게 아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장황하게 제 resume를 다시 풀어서 쓴 이유는, 제가, 어찌보면 대단히 고지론적 위치에 있음을 설명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실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이런 내용을 거짓 없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렇다면… 과연 제가 ‘고지’에 선 사람일까요?

소위 resume 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찌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저는 제가 ‘고지’에 선 사람이라고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고 못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두가지만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번째, 제 socioeconomic class가 결코 ‘고지’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job security에 대한 걱정이 크고요, 10년후 뭐하고 사나 이런 고민도 많습니다. 공부를 오래하느라, 지금 40대 중반을 향해 가는데 아직 ‘내집’도 없습니다. 딸아이 하나 있는데, 그거 대학은 어찌 보내나 걱정도 크고요. 그저 대부분의 사람이 하는 고민을 그냥 하면서 삽니다. 회사에서 파는 점심 사먹는게 아까워서 싸구려 샌드위치 도시락을 싸가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사회적 지위로 보더라도, 저는 그저 ‘회사원’ 혹은 ‘연구원’일 뿐입니다. 대단히 많은 이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고요, 제 개인의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한 위치에 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결코 불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제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지금 제가 가는 길을 가기로 ‘선택’했습니다.

둘째, 저보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 역시 찌질이의 푸념이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소위 ‘고지’에 가까운 환경에 가면 갈수록 그런 일종의 소외감은 더 큽니다. 왜냐하면 제가 접하는 사람들은 역시 또 peer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바드를 졸업하면, 동창이 모두 하바드 졸업생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비교대상은 하바드 졸업생이지요. 아니, 그러니까 하바드 간것 만으로도 이미 고지라고 생각해야하지 않느냐 라고 말씀하신다면, 제가 위에 첫번째 이유로 말씀드린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

게다가, 저보다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저보다 꼭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 이게 찌질하게 들리지 말아야 할텐데요… 저는 그 사람들을 결코 제 선망의 대상으로 두지 않습니다. 대학원때 제 officemate이었던 유태인 친구는 지금 최소 연봉 25만불을 받으며 지내고 있지만, 저는 그 친구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렇게 더 높은 고지에 올라선 친구들을 보면 소위 ‘운’이 좋거나, (실제로 첨단 학문쪽을 하다보면 ‘운’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이건 이쪽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아, 물론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요.^^) 아니면 이미 가진 줄/빽이 좋거나, 이미 가진 자산(금전, 인맥 등)이 압도적으로 풍부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하자면 잘나가는 기준을 보면… 그렇게 ‘공정하지'(fair)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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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4번에 걸쳐, 편지글 양식으로 고지론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편지글 양식으로 한 것은, 그래야 딱딱한 비판이 아니라 부드러운 대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였습니다. 

고지론 비판의 글이 아니라, 제 관점에서 바라본 고지론의 위치에 대한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바라기로는, 고지론 비판자들에게는 고지론을 ‘동지’로 여기게 되고, 고지론자들에게 역시 반고지론자들을 이해하는 tool을 제시하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이 댓글로 생각을 좀 나누어주시면 저도 제 생각을 가다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아내의 단기선교

요즘 내 아내는 무.지.하.게. 바쁘다. -.-;

지난 월요일에는 무슨 시험도 하나 봤고… (뭔 시험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꽤 중요한 시험이라는거 말고는. ㅎㅎ)

졸업 준비에, job interview에, 학교 공부 계속 하는거, 그리고 뭐 연구하는것도 있는데 그것도 마무리 해야한다고 하고… 

그렇다고 그것만 하면 되느냐 하면…

남편이 또 무진장 바쁘니까, 남편이랑 함께 시간 나눠서 민우도 돌봐야 하고, 집안일도 하고…

그런데…

이 바쁜 와중에…

세상에….

이 와중에…

다음주에는 민우를 데리고 단기선교를 떠난다!

크리스천 의사와 치과의사들이 가난한 나라에 가서 말하자면 무의촌 진료/봉사/치료를 해주는 일인데…

이 와중에 일주일 시간을 뚝~ 떼어서 돈도 많~이~ 들여가면서… 그렇게 단기선교를 한다.

준비과정 중에는… 하루씩 금식도 하면서 바쁜 와중에 기도도 했었다.

내 아내가 수퍼우먼이냐 하면…. 전혀 아니다.

뭐 사실 학벌(!!)로 보면 완전~ 수퍼우먼일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 알고 지내면 늘 힘이 넘치고, 자신감 만빵에 두려움 없이 척척… 나가는… 수퍼우먼과(科)는 확실히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 보통사람으로 지내다가 비상시에 잠깐 힘을 발휘하는 헐크에 가깝지 않을까. ㅋㅋ

그런데 이 와중에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뭥미?

이제 아~아~주~우~ 오래 공부하는 것이 드디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underprivileged people을 돕는 것으로 한 시즌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즌을 시작하고 싶은 모양이다.

이제 이번주 토요일 새벽에 에쿠아도르를 향해서 떠난다. 거기까지 가는데만 12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이런 와중에 이런 결정을 하고서는 딸내미와 함께 떠나는 마누라가 참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다.

민우는 자기가 학교에서 배운 Spanish를 가서 써먹어보겠다고 벼르고 있다. ㅋㅋ

17일 새벽에 SFO 공항에 다시 도착할때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품고 섬기면 좋겠고,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그 마음에 담는 기간이 되면 좋겠다. 내 사랑스러운 다람쥐들… ㅎㅎ

과로

최근 계속 머리도 아프고, 몸도 좀 아픈 것 같고…

무슨 감기기운 비슷한게 계속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귀도 멍멍하고…

소화도 잘 안되고,

잠 자는 것도 영 시원찮고…

하여간 계속 좀 컨디션이 별로였다. -.-;

왜 그럴까 잘 몰라서 이리저리 뒤져보니… 귀에 염증이 있으면 (ear infection) 이런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허억…

예약을 하고, 지난주 금요일에 의사를 만났다.

내가 이런 저런 증상들을 쭈욱~ 이야기하니까…

이 사람이 한참 듣더니만, 내 직업이 뭐냐, 하는 일은 재미 있냐 등등의 엉뚱한 질문만을 한다.

나는 그래도 대답을 쭉 했더니만, 내 귀 안쪽도 들여다보고, 청진기로 숨소리도 듣고, 목구멍, 콧구멍 이런것도 보더니만… 내 몸 여기 저기를 주무른다. 허걱…

한참 그러더니만, 

나보고… 좀 일을 덜 하라고 진단을 내린다. -.-;

자기가 보기엔 과로/stress 때문에 온몸의 근육이 다 뭉쳐있고, 수면 부족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단다.

얼핏 보니… 이 실리콘 밸리에서, 나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많이 만나본 것 같아 보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금년들어 주중에는 하루에 6시간 이상 자본적이 거의 없었고, 건강을 위해 이를 악물고 운동을 하긴 하지만, ‘쉼’을 누렸던 적은 정말 없었던 것 같았다. 

정말 10대 때부터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아… 이제 정말 체력으로 승부할 나이는 지난게 맞나보다.

몸은 예전과 같지 않은데, 지혜는 아직 제 나이의 분량에 차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을꼬.

지난 금요일 글과 관련해서, 아땅님의 질문에 대한 답

아주 중요한 내용을 잘 지적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

우선 예로 들어주신 포르노 산업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즉, 포르노 산업 근절을 위한 기독교인 연대 이런 식의 움직임이 포르노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threat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거지요. 

저는 여기서, 몇가지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가치와 방법의 문제입니다.

포르노는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일 수 있는데요, 그것을 이야기할때,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든지, 그놈들은 다 사탄이다는 식의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든지,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한다든지 하는 등의 방법을 택하지 않고 가치를 드러내야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다고 생각하는 바가 옳다면, 그것을 이루어내는 방법 역시 폭력적이지 않은, 옳은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방법이 폭력적이 되면, 전하고자 하는 message가 악한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현대의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사랑으로서 진리를 말하라”는 명령을 등한시 한 채, 사랑 없이 진리를 이야기하려다보니 진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로는, (개인적 판단에 근거한) 신념과 (본질적 진리에 대한) 신앙의 문제입니다.

대단히 획일적인 신앙교육만을 받아온 토양에서는, 신앙과 신념을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사실은 우리가 신앙이라고 믿는 것 안에는, 신앙이라기 보다는 신념에 해당하는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조론-진화론 논쟁이죠. 성경을 믿는다 = 하나님을 믿는다 = 창조를 믿는다 = 진화를 거부한다.

이런 등식을 획일적으로 신앙교육으로 받아온 사람은 그냥 이걸 통째로 받아들이는데요, 사실은 맨 마지막 등식은 성립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론, 진화를 거부하는 창조를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창조를 믿는 것이 곧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데요…

그런 차원에서 보면, 진화를 거부한다는 신념이 어느새 슬쩍~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과 미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갖는 정치적 신념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제는 심각한 왜곡과 오류가 빚어지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요.

그런데 아직도, 그것을 신앙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좀 controversial할 수 있겠지만, 동성애를 가지고 위의 두가지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첫번째로는요, 동성애가 죄라고 인정한다고 합시다.

심지어는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동성애자를 악당으로 몰아부친다던가, 동성애자들에 대항해서 압력을 행사한다거나, 세를 불려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거나… 하는 것은 결국 이들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동성애자에대해 약간의 호의적인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동성애가 죄다! 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아, 이 사람들이 동성애는 정말 죄로 여기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잖아요. ^^

아니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도 그런데, 비그리스도인 동성애자들이 그런 것을 경험하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동성애자들에대한 폭력, 압력, 폭언, 정죄, 사랑없음….과 같은 비뚤어진 방법은, 전하고자 하는 원래 message 자체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두번째문제는요…

정말 동성애가 죄냐 하는 것입니다.

아… 이거… 참… 잘 못 얘기하면 제가 또 완전히 이단으로 몰리겠습니다만… ㅎㅎ

정말 성경을 역사비평적으로 읽어가면서, 동성애를 어떤 경우에 어떻게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지, 깊이 연구해보지도 않은채 그저… 동성애는 죄다! 라도 외치는 것은 사실 매우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동성애라는 이슈가 삶과 죽음의 이슈만큼이나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는 그저 성경 대충 읽다가 틱 하고 떠오른 생각가지고 아, 그거 죄네… 이렇게 정죄해버리고 말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실제로 겪고 당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심각한 것인만큼, 우리도… 혹시 동성애를 정죄하는 것에 우리의 신념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경과 문화와 기타 많은 부분을 연구해가며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목청을 높이는 볼륨에 비례해서, 그것에 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할텐데 말이죠.

동성애를 예로 들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Tony Campolo가 동성애/동성결혼에 대해 정리한 것을 제말로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서 진리를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로서 적절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볼만 한 것 같습니다. ^^

Tony Campolo는, 동성애/동성결혼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인은 동성애/동성결혼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만.) 그렇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가령 구약에서 동성애에 대해서 정죄할때, 이것은 윤리적 죄로서 다루어졌다기 보다는 정결예법을 어긴 것으로 다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다시말하면 살인, 도둑질, 간음과 같은 죄의 부류가 아니라, 제사지내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았다던지, 시체를 만졌다든지 하는 정결예법을 어긴 것이라는 거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셨던 로마시대에는 동성애가 (특히 미소년 동성애?)가 꽤 유행했던 시기였는데도, 예수님께서 그것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서신서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다든 것에 주목합니다. 이게 정말 그렇게 big deal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동성애를… gossip 정도 죄의 수준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투의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동성애가 신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가만히 생각해보면, 혼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인정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

세상에서는 동성결혼을 하겠다고 하면 하게 하라.

다만 교회 내에서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라.

교회 내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인정하는 방식의 혼인을 치룬 부부만이 하나님 앞에서 유업을 함께 받을 부부로 인정되도록 하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Tony Campolo의 주장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입장에 동의합니다.)

최소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대로 가볍게(shallow) 성경을 읽고, 폭력적으로 정죄하고, 압력집단으로서 행동하고, 사랑 없이 정죄를 남발하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완벽한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결국은… 그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사람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