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t – 내 묵상 (2)

내 신앙에 영향을 끼친 분들중에는 목회자들도 있지만, 평신도들이 더 많다.
단순히 그분들의 신앙에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학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는 ‘평신도 설교자’라고 일컬을 수 있는 분들도 있다.

내 평생동안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를 꼽으라면,
대학교 4학년때, 김인수 교수님이 내가 다니던 대전의 작은 개척교회에 오셔서 하셨던 설교가 top 3 안에 들어간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평신도들이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norm인 것으로 여기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면 큰 blessing이었다.)

후에 코스타를 섬기면서,
‘평신도 설교자’를 찾으려고 참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 평신도 설교자들이…
손봉호-이만열-김인수 교수님 세대 이후에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아래 세대로
강영안 교수님이나 그리고 더 아래로는 장평훈 교수님 같은 분들이 계셨는데,
그보다 더 아래세대로는 거의 씨가 말랐다고 느껴졌었다.
(잘 몰라서 그런이유도 크겠지만…)

어쩌다 평신도가 설교한다고 하는걸 들어보면,
자기자랑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수준이었고,
성경 말씀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설교자를 찾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왜 그런걸까?

꽤 오랜시간 그런 고민을 했었다.
아직도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데…
한가지 내가 가지고 있는 hypothesis는,
50년대생 후반 정도부터는…
신앙 리더들의 신앙이 대학생 선교단체나 대형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길러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이다.

예전 사람들은,
말하자면 프로그램, 제자훈련 그런거 없는 상황 속에서,
나름 성경 읽고, 그거 들고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교회에서 교사하고, 그러다가 혼자서 더 성경 연구도 하고… 그렇게 자란 반면,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아래 세대 사람들은,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키워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좋은 resource를 공급받기는 했지만,
그 프로그램을 넘어서 더 성장하는 일이 극히 드물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기가 개인으로서 missional하도록 성장하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 내 한가지 가설이다.

@ 금년 코스타주제랑 무슨 연관이 있는 얘기냐고 물으실 분들이 있겠지만,
결국 missional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고민이 The sent의 주제와 가장 잘 align된다고 보여 missional 한것에대한 생각을 많이 나누어보려고 생각중이다. ^^

The Sent – 내 묵상 (1)

매년 코스타 주제를 여러가지로 생각해보고, 나름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말씀 묵상도 하면서 참 큰 유익을 얻었다.

비록 금년에 땡땡이치고 결석하는 불량 코스탄이 되었지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다른해 만큼 공부하고 묵상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내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이 유익이 있을 것 같다.

아마도 systematic한 묵상이라기 보다는,
잡생각들의 모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사실 지난번에 인디 컨퍼런스 즈음해서,
나름대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올려보려고 했으나,
적어도 시카고 집회가 끝날때가지 기다렸다가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정리를 좀 미루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아직 시카고와 인디 설교와 강의를 아직 하나도 듣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ㅎㅎ

옛 친구 (2)

이 친구는,
대단히 optimistic 하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optimistic할까 신기하다 생각할정도로 그렇다.

젊은 시절에야,
어차피 젊은 혈기로, 누구나 optimistic한 시기를 지내기도 하지만,
이 친구는 유난히 더 그랬다.

반면,
나는 예전부터 pessimistic한 성향이 더 컸다.
치밀하게 분석하여서, 늘 worst case에 대해서 대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는, optimistic한 대신 별로 치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빈틈이 많지만, 매우 과감한 추진력을 가진다. 내가 보기엔 무모해보인다고 생각되는 것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척척 해낸다.

반면,
나는 실수는 적지만,
많이 두려워하고, 주저하고, 망설이곤 한다.

이 친구는,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일에 involve 되어서 테네시쪽에 그 책임자로 금년부터 와 있게 되었다.

이번에 만나서도,
결국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이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아… 그랬지…. 이래서 나는 이 친구와 함께 하는걸 참 좋아했지…
하는 것이 다시 remind 되었다.

내가,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내 고민을 이야기하고,
변혁되지 않는 세상속에서 느끼는 좌절을 이야기하는데…

이 친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고민을 그냥 올킬해버리는 것이었다.

직장 내에서 교묘하게 얽혀있는 알력다툼에 관해서 이야기 하면서,
변하지 않는 system 속에서 integrity를 지키면서도 survive 하는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25년전에 함께 이야기했던 세상을 변혁하는 기독교라는 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만 이 친구는,
자기는 그런 교묘한 알력다툼 속에서,
그냥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를 다 까고 보여준단다.
그리고 직장 상사에게 늘 직언을 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안되면 어쩔 수 없고, 그래서 잘 되면 좋은 거고.
허억…

나는,
과연 내가 하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변혁을 꿈꾸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복잡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냥 이 친구는… 이게 될까 되지 않을까를 많이 고민하지 않고, 그냥 덤덤하고 투명하게 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것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삶의 상황에 대하여 분석적 비판적으로 보기 보다는,
진취적 긍정적으로 보는 자세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잘 하시겠느냐…
뭐 그런 식의 믿음이라고나 할까.

오랜만에,
이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옛날에 이 친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게 자연스럽게 전염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 신뢰, 진취적이고 용기있는 삶의 자세 등등이 다시 remind 되었다.

참 감사했다.

이 친구가 앞으로 몇년은 테네시에 더 있을 것 같다는데…
좀 더 자주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다.

지난 주말의 짦은 대화는,
아마 내 삶의 자세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변화의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옛 친구 (1)

대학때와 대학원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하나가 금요일 밤 늦게 text를 보냈다.

이 친구는,
내가 대학 4학년때와 한국에서의 대학원 시절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함께 캠퍼스주변을 조깅하고,
함께 QT를 하고,
아침을 함께 먹고,
각자 실험실로 일하러 갔다.

그리고 밤 늦게,
다시 만나서 하루가 어땠는지를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나누었다.

석사 1년차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이 친구와 내 마음을 막 흔드셔서,
대학 신입생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주셨었다.

그래서,
대학 1학년 기숙사를 방마다 다니며 방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신입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중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모아서 우리끼리 성경공부를 시작했었다.
(지금도 나는 비교적 introvert 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introvert 였다.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거의 terrifying한 것이었는데, 그런 용기를 갖게 되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같은 교회에서 청년부를 함께 섬겼고,
함께 성가대를 섬겼고,
함께 지체부자유 고아들을 돌보는 일도 했었다.

주말에 마음이 맞으면,
몇명이 함께 누군가의 기숙사 방에 모여,
새우깡 한봉지와 물을 떠넣고 먹으며,
함께 기타를 치며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고, 밤새워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두명이 쓰는 기숙사 방에, 7-8명의 남자들이, 발냄새 풍기며 모여 앉아서, 그렇게 함께 우리 삶을 나누었다.

이 친구가 여름에 단기선교를 간다고 해서,
내가 가진 돈을 톨톨 털어 그 단기선교 가는것에 다 주는 바람에,
나는 한달여동안 거지로 살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유학생시절,
이 친구는 내게, 힘들면 이야기해라. 내가 여기서 돈 모아서 보내줄께. 그렇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

이 친구도 일정이 넉넉하지 않아서,
겨우 두시간 남짓 만나서 잠깐 이야기한 정도 였지만…

참 반갑고 좋았다.

Hopeful

어제 밤,
참 오랜만에 코스타 관련해서 꽤 긴 conference call을 했다.

동부에 계신 분들은 2AM 넘어서까지 해야했고,
이걸 organize한 JK는 멘탈이 초토화된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되었지만…

나는 conference call을 마치고 참 감사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다.

뭔가 한줄기 빛이 쭈욱~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감사했다.
그리고 참 감사했다.

교육

민우가 이제 11학년에 올라가게 된다.
슬슬 대학가는 준비를 해야하는 시기인데,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대학들에 대하여 좀 ‘공부’를 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것은,
학교마다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교육방침이 있고, 인간상이 있고, 그것에 맞추어서 커리큘럼등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어떤 학교는, 4년내내 학생들이 거의 자유롭게 아무거나 들을 수 있도록 하는가 하면,
어떤 학교는, 그 학교 출신이라면 공유해야하는 내용을 core로 두고 requirement 두고 있기도 하다.

미국에 살면서, 나름대로 여러 학교들 출신들을 다양하게 만나면서 지내고 있는데,
어떤 학교 출신들이 이렇다 라고 모두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학교가 제공하는 내용을 참 잘 소화하여 그 학교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공부한 학교들 (한국과 미국)을 가만히 더듬어 생각해보면,
나와 잘 맞는 학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상에 내가 부합되지도 않는 것 같다.

만일, 내게, 조금 더 다른 교육의 option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쩌면 이렇게 엔지니어를 하고있지 않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전공을 한것도 아니었고,
나중에 이 전공이 나와 딱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걸 거지고 박사까지 받고 여태껏 그걸로 밥벌어먹고 살고 있다.

민우는,
전반적으로는 liberal art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수학이나 과학을 뭐 잘하는 수준으로 하기는 하지만,
책읽고, 쓰고, 사색하는 쪽을 더 즐긴다.
그리고 공학쪽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보다는 순수과학쪽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민우가 그런 관심을 갖는 것이 반갑고 감사하긴 하지만,
우리 부부가 그런 쪽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도움을 주기가 어렵기도 하다.

민우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
내가 해주지 말아야 하는 것의 경계가 늘 모호하게 느껴진다.

Too Serious

예전에는 내가 블로그에 농담도 올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재미있는 것들도 퍼다올리고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걸 할 수 없게 되었다.

facebook 같은 곳에서 그게 워낙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어디 재미있는 것이 올라와 있으면,
그걸 퍼다 나르는 일이 꽤 중요했었는데,
이제는 facebook같은 곳에서 매우 빠르게 퍼져버리니,
이런 B급 블로그에서 그런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지난 몇년간 이 블로그의 글이 많이 ‘심각해져’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답글을 달기도 머시기하고…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지난주,
ㄱㄷㅇ 간사님의 사진 충만한 포스팅을 읽다보니,
아… 사진 같은걸 잘 찍으면,
나 같은 사람이 얼굴에 인상 잔뜩 쓰고 하는 이야기를,
훨씬 더 부드럽게 하는 것도 가능한거구나… 싶었다.

덜 serious해지도록 노력!

바쁘게 사는 죄 (6)

사람을 바쁘게 살도록 만드는 system은 악하다.
I repeat.
사람을 바쁘게 살도록 만드는 system은 악하다.

그렇다고 그 악한 system을 무조건 뛰어나오라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 해야할 일은,

1. 우선 그 system이 악함을 인정하는 것
2. 그 system 밖의 대안이 없을까를 찾아보는 것
3. 2번이 없다면, 그 system 안에서 좀 덜 바쁜 방법을 찾아보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 돈을 덜 번다거나, job security가 나빠진다거나, name value가 떨어지는 직장을 선택한다거나…)

이 시리즈의 글은,
중간에 다른 것을 쓸 일이 많아,
맥이 좀 끊긴 감이 있지만…

나름대로 내가 깊이 고민하는 것이어서 어떻게든 좀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좀 맥이 끊기니, 나도 생각의 흐름도 좀 끊긴 감이 없지 않긴 하다. ㅎㅎ)

바쁘게 사는 죄 (5)

나를 포함해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갖는 아주 큰 딜렘마는 이것이다.

바쁘게 사는게 나쁘다는 것도 알고,
바쁘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도 한데,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나 같은 엔지니어가,
바쁘지 않게 사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 가능할까?
정도의 차이가 어느정도 있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죽어라고’ 일을 하는 직업들 이외에 정말 대안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주 바쁜 사람들중 어떤 이들은, (나를 포함해서)
사실은 약간 덜 바쁜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사실,
내가 이 전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 직장으로 옮긴 것도 그런 move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말 9-5 하는, 널럴한 직장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하루 14시간 일하는 직장으로부터, 하루 12시간 일하는 직장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혹은,
평소에 아주 바쁘더라도,
휴가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금 덜 바쁜 직장은, 덜 잘나가는 직장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쁘게 사는 죄 (4)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에 의미는 부여해야 하겠고, 그리고 그것을 미화할 필요가 있으므로…
나는 자꾸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많이 바쁘지만, 그 속에서 깨닫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바쁘게 사는 속에서 사는 의미를 자꾸만 정당화하려 한다.

그렇게 하니, 당연히 매우 efficient하게 일을 하고,
일을 하는 측면에서는 successful하다.
그러다보면, 성공과 능력을 우상으로 추구하는 것은 더욱 심화되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내 영혼이 병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바쁘게 사는 것에서 주는 건강한 유익이 있다.
(언제 다른 기회에 이것에 관해서도 좀 정리를 해보려 한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 자체가 주는 해악이 크다는 것,
쫓기며 살도록 나를 drive하는 ‘system’은 타락으로 인한 distortion이라는 것,
사랑할 여유가 없이 사는 것은 죄라는 것 등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과 같이,
바쁜 생활 속에 자꾸만 함몰되어가는 속에서,
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건강한 영적 break-through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