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나는 성경에서 ‘명문’을 찾으라고 하면 거의 주저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15장을 든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신학적 contents도 탄탄하고, 논리의 전개도 뛰어나고, 지성과 이성을 모두 터치하고, 게다가 문장의 흐름도 좋다.

아… 바울이 천재이고, 게다가 이건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text이니, 당연히 문장이 좋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1. 부활의 역사성
부활이 아주 든든한 eye witness account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실 부활의 역사성은 기독교 변증에서 비교적 잘 develop된 이야기이다.
가끔 변증 중에서는 좀 무리수를 두는 억지 논리들이 있을때도 있는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eye witness account에 근거한 부활에 대한 변증은 꽤 탄탄하다.

2. 부활이 갖는 신학적 의미 – 개인적 영역
개인적 영역에서 부활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지를 잘 다루어주고 있다.
죄가 사해졌고, 죽음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선언은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3. 부활이 갖는 신학적 의미 – 거시적 관점
부활이 전 피조세계에 어떤 것을 가져다주는지 이야기하는 거시적 관점이 개인적 관점과 잘 조화를 이루며 논증되고 있다. 흔히 어떤 한가지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관점을 깎아내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데 여기서는 그 두가지가 다 강조되고 있다.

4. 부활의 consequence
부활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게다가 그 삶의 방식은 위의 2,3에서 언급한 신학적 의미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이 아주 속시원하다!
맨 마지막에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서 풀어낸다면 정말… 아… 하고 탄성이 나오게 된다.

5. 가슴 벅찬 부활
부활을 informative하게 강의하거나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가슴에 그 내용이 담기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읽다보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난다.

가끔은…
내가 정말 믿고 있는 내용을 누가 좀 가슴에 팍 박히게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었으면 하고 바랄때가 있다.
그래서 인터넷 설교를 뒤적이거나… 좋은 신앙의 고전들을 다시 찾거나… 그래 보는데,
내가 보기엔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런 효과를 내는 일종의 끝판왕인 것 같다. ^^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절에 한 5~10번쯤 읽어야 한다.
잘못된 신학과 죽어있는 신앙이 기독교를 점령한 시대에,
설교라는 이름으로 허접한 억지가 선포되고 있는 시대에,
고린도전서 15장은 일종의 detox가 되는 것 같다.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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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 기독교의 shallow함이 미치도록 역겹다.
그 shallow함 속의 일부가 되어있는 내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럽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를 할때면 늘 ‘공부’를 하는 자세로 접근하게 된다.
나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공부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도 역시 열심히 공부하려고 늘 나름대로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늘 공부하라고 이야기한다. ㅎㅎ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공부의 대상만은 아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에는 여러가지 공부가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신문을 보다가 분노해서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일,
가기 싫은 군대에 끌려가는 일,
지지하는 후보가 다른 사람과 침튀기는 토론을 하다가 언성을 높이는 일,
축구 한-일전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일,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충격을 경험하는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의 국민됨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뭔가를 ‘경험’해보자… 이웃을 돕는 event를 한번 해보고… 이런 싸우려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나는 현대 기독교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기독교는 21세기에서 유효기간이 지난것 같이 느껴지기 까지 한다.

이것을 돌파해내는 중요한 key는 평신도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러니까 일상을 소소하게 잘 살자… 그런 멜랑콜리한 이야기를 하는게아니다.
실제로 세상에 대항해서 살면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도하고,
세상에 의해 정복당할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경험을 하고,
강력한 세상의 시대정신에 대비해 기독교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절망감도 경험해보고…
이런 과정을 삶 속에서 겪어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contents가 된다고 생각한다.

속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백성이었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계속 출애굽의 민족이다.)
출애굽이 지난지 몇천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로 말하면, 단군 고조선 보다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을… 매년 빼먹지 않고 기억을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서로에게 그것을 기억시키고, 자녀에게 그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어제 했던 이야기와 비슷하게,
나는 현대 교회에서 이 속죄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설교를 거의 듣지 못한다.
학문적인 적확성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포함할수도 있다.)
이 속죄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라고, 내 이야기라고 가슴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교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소위 ‘하나님 나라’의 narrative가 속죄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축소시킨채 이야기되는 것이 나는 대단히 안타깝다. 하나님 나라 narrative에서 속죄가 빠져버리면 그 전체가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이것은 old vs. new의 세대대결이나 신학대결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는,
절망적인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타락, 죄

나는 타락이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나 아담/하와의 존재 역시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경의 narrative의 beginning은,
우리의 상태가 타락한 모습이다 라는 다소 abrupt한 선언이 거의 처음에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창조는 주로 창조주의 속성과 그 창조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등장하지만,
타락의 전단계로서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타락, 죄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이 타락과 죄의 문제를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 모두에서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에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히…
어떤 형태가 되었건… 죄와 타락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나 하는 이야기를 거의 아무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타락과 죄의 narrative가 빠져 버리면 기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죄와 타락에 대해서 제대로 설교하는 설교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죄와 타락을 정말 말로 다 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죄를 자꾸만 쉬운 언어로 설명해버리는 (explain away) 시도들이 넘쳐난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shallow 해진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죄와 타락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창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의 핵심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엔 다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 창조주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에서 창조를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창조주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위대한 화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작품을 살펴보는것과 같이, 창조주를 이해하기위해 그분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나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자연보호, 환경보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대단히 합당하고 반드시 해야할 일이지만,
자칫 그 과정에서 피조세계 자체를 너무 높은 위치에 두지 않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기독교 써클에서, 특히 진보주의적 기독교 써클에서 이야기하는 환경보호에 대한 argument는 범신론처럼 들릴때가 있다.

2. 조화와 질서
나는 창조주가 모든 것을 창조했다, 무에서 유가 나왔다는 개념등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좀 의문이있다.
흔히 창조주의 위대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무로부터의 창조를 언급하는 하는데…
기독교 창조의 핵심은 조화롭고 질서있는 창조에 있다고 본다.
특히 그 조화와 질서는, 선한 유일신이 그 창조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고대 근동지방의 다른 창조설화들과 비교해보았을때, 혹은 다른 세계관이나 종교등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와 비교해보면… 기독교 창조가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조화롭고 질서있는 창조라는 것이다.

3. 출발점
기독교의 창조는 돌아가야할 실락원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창조-타락-구속의 세계관을 이야기하면서 창조질서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구속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적어도 구속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기독교는 창조를 돌아가야할 모습이라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수 기독교에서 histical Adam을 꼭 그렇게 붙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창조를 돌아가야할 실락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게… 그냥 그런거지

참 외롭다.

나는 사실 외로움을 그리 잘 타는 사람이 아니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오히려 혼자서 여러 생각을 하는 것을 참 많이 즐긴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키며 살기위해 무진장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싸우고 생각하고… 그러고 있는데,

이 고민의 package를 이해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것을 이야기할 사람도 거의 없고,
내 싸움을 이해하고 격려하거나 조언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느낄때가 많다.

함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쟤는 별나다’라는 눈짓을 받을땐 정말 더 많이 외롭다. (사실은 서럽기까지 하다. ㅎㅎ)

몇 달전에 한국에 출장을 갔을때,
토요일 저녁에 한 ‘선배님’을 찾아간적이 있었다. 그분은 목사님이시지만 목사님이라기보다는 신앙의 선배님으로 나는 늘 생각하고 있다. 설교 바로 전날 저녁인데도 나를 맞아주셨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런 외로움이 대해서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분께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은 외롭지 않으시냐고.

그분은 무슨 질문을 하면 바로 대답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늘 그냥 크게 도움 안되는 대답을 주시곤 하는데,
그날은 꽤 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게… 그냥 그런거지”

그 후 계속해서 나는 그 짧은 문장을 계속 곱씹어 보고 있다.
그냥 그런거다…

한편 신앙이 깊어질수록 당연히 외로움이 커지게 되겠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만의 신앙의 틀이 고정되어 가면서 다른 신앙의 틀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냥 그런거다… 라는 그 선배님의 말씀에는, 그 두가지가 다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신앙과 신학

지난 주일에는,
욥기 연구로 박사를 받으신 어떤분과 짧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욥기에 대해 이런 저런 것을 여쭈어 보다가 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분은 상당히 liberal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대개 한국교회의 setting에서 liberal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계신분들은, 그냥 나 같은 평신도를 대할때 무척 조심하신다. (아마 목회자들을 대하실때는 대개 더 많이 조심하시겠지…. 잘못하면 사탄취급을 받는 수가 있으니…ㅋㅋ)
그래서 나는 대개 그런 경우, 미리 그쪽이 안심시킬만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서 대화가 좀 이루어졌는데 나로선 참 흥미로웠다.
욥기, theocracy, open theism, process theology 등에 대해 짧은 시간이지만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름대로 새로운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Biblical text와 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짧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liberal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계신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참 흥미롭게 느껴진다. 내가 대개는 잘 모르는 이야기를 듣게되니 신기하고 재미있게 배우는 기회가 되어서 그럴테고, 흔히 보수적인 신학적 입장을 가진 분들로부터 잘 듣지 못하는 면들을 듣게 되니 그럴테고…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신학이 가지지 못하는 지적흥분이랄까 그런게 있다.

그러나,
그런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서 내가 늘 갖는 질문은, 과연 저 신학으로 저분은 신앙을 어떻게 정리하고 계신걸까 하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두개를 아주 이분법적으로 나누시는 것도 보았다. 학문적으로는 완전 liberal하게 나가시지만 신앙생활은 그냥 보수적인 신앙인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거다.

어떤 분들은 liberal한 신학의 입장을 가지면서 신앙이라는 것을 define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모호하고 어렵게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분들은 그 두개를 어떻게든 연결을 짓고 서로 대화를 해가며 통합시키려고 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나는….
뭐 와장창 liberal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느니 어쩌니 할만큼 신학을 잘 알지도 못하지만,
어쩌면 내가 접하고 만나는 대부분의 동료 보수 그리스도인들에 비해서는 더 liberal한 입장에 대해 열려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서 정말 내가 어떤 신학적인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하는 건 거의 아무에게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서 ㅋㅋ)

과연 그런 나는 내 신학과 신앙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통합시키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출장 후기 (8)

내가 중학교때 나는 늘 반장이라는걸 했었다.
나는 그리 좋은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 반에는 정말 좀 껌을 좀 씹는 그런 애들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포크를 들고 그걸 흉기삼아 서로를 찌르는 싸움을 교실에서 본적도 있었다.

자습시간에 선생님이 “야 반장. 애들 조용히 시키고 있어” 라고 이야기하고 나가면 반장인 내가 조용히 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뭐 그런데 중학교 애들이… 반장이 조용히 하란다고 되나. 당연히 애들이 장난도 치고 떠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들어오면 애들은 금방 후다닥 자리에 앉았고, 나는 애들을 조용히 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자서 엉덩이를 대걸레자루로 맞았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야, 반장. 너 맞고 싶지 않으면 네가 애들을 이렇게 때려. 알았지?”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었다.
아니, 같은반 친구를 때리라고 선생님이 이야기하는게 말이 되나…

그래도 옆반 반장은 진짜 자기반 애들을 때렸다.
자기가 맞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겠지.

나도 정말 그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때도 있었다.

그때 나를 붙들어 준 건 우리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오승아, 절대로 그러면 안된다. 자기 반 친구에게 맞는 자기 아들을 보는 그 엄마가 보면 그 엄마 눈에서는 피눈물이 날거다.”

이렇게 벤더(하청업체들)을 만나기 전에는,
내 어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것을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업계에 있는 친구들을, 내 지위를 이용해서 때리는 몰지각한 일들을 하지 않게 된다.

반장이 자기반 아이들을 때리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 처럼,
큰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로 하청업체를 못살게 구는 것 역시 정말 말이 안된다.

이번 출장을 다니면서는 그러나…
내가 그렇게 대걸레 자루를 휘두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장 후기 (7)


Grossmünster라고 불리는 예배당 건물이다. 종교개혁자 쯔빙글리가 여기서 설교를 했다고 한다.


어제도 올렸던 사진이지만 강 건너편에서도 Grossmünster가 잘 보인다.


그 옆에는 이렇게 쯔빙글리의 동상도 있었다.

나는 궁금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적이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스위스인들에게 쯔빙글리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중세 유럽의 종교개혁은 사실 종교개혁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개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사람들은 쯔빙글리를 종교개혁자라기 보다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나 사회개혁자로 해석해내고 있을까?

배덕만 교수가 짧게 설명한 쯔빙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