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cissism

나는 매우 자주 나 스스로를 지나치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머리 속에 잠깐 스쳐간 ‘멋진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오래 기억하여 내가 마치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이 생각하는 반면,
내 머리 속에 늘 남아 있는 ‘추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쉽게 잊어버린다.

자신 스스로를 지나치게 후하게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을때 내게 다가오는 당황스러움과 안타까움을 한번 곱씹어본다.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이러한 ‘narcissism’에 젖어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을까?
때로 다른이의 눈을 통해서 본 내가 더 정확할 때가 있을텐데.

신앙의 성숙을 잴 수 있는 여러가지 척도 가운데,
이러한 narcissism으로부터의 탈피도 중요한 척도인 듯 하다.
‘자기 비하’나 ‘열등감’ 혹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낮아짐이 아닌, 자신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경지.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한 말에는… 정말…

미성숙한 사람들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자신이 미성숙하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교회의 문화에 익숙해서,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많이 미성숙하다…
하는 식의 말을 하지만…

사실 이들과 정말 마음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보면,
자신이 전혀 미성숙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거나…
심지어는 다른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런 이들은,
대부분 성장 자체가 멈추어버린 상태에서 몇년, 십몇년, 심지어는 수십년씩 정체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성장/성숙에의 자극을 주는 것 자체도 매우 힘들다.

이런 사람들과 만날때마다,
나는 섬뜩하게… 내 자신의 모습을 본다.
신앙의 핵심이 아닌, 문화와 껍데기에 익숙해져 안주해버리는 모습,
피상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구체적이지 못한 삶,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선한 생각’들을 스스로 곱씹으며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나의 미성숙함을 내가 바라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늘 두렵다.

이메일 트래픽

요즘 여러가지 급박한 일들이 많이 겹쳐서 좀 정신없이 지낸다.
회사애선 곧 있을 학회에서 발표할 자료와 flexible display demo를 만들기 위해서… 정말 정신없이 실험을 하고 있고,
몇몇분들과 길게는 한시간 짧게는 30분 가량의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의견을 듣고 상의하고 해야할 일들이 계속 있었고… 아직도, 일주일 내에 heavy한 전화통화나 논의들을 해야할 것들이 5건 정도 더 남아있다. 어제 하루동안에도 그렇게 전화통화를 한 시간이 총 2시간이 넘었다.
그리고, 어제는 드디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이메일의 트래픽이 100개에 달했다. 아마도 기록이 아닐까 싶다. ^^ (그냥 읽을 필요도 없는 이메일 말고… 내가 읽고 생각하고 respond 해야하는 이메일 +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이메일을 더한 것이다.) KOSTA 관련 이메일이 그중 70% 이고… 회사 이메일이 15%… 그리고 이 지역에서 섬기는 것 관련된 이메일, 가족, 아는 사람 이메일들이 나머지이다. 그중 어떤 이메일은 그 이메일 하나를 쓰기 위해서 30분 가까이 고민하고 다시 생각하고 해야하는 것들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하고도 해야할 일들을 다 못하고… 이렇게 버벅대고 있지만.

때로는… 이런 짐을 좀 나누어 질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내가 물론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정말 faithful하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회사 일이든, KOSTA 일이든… 뭐든 간에)
혹, 함께 짐을 나누어지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짐을 나누는 것 자체가 내게 일이되어 이렇게 상황이 급박해지면 더더욱 그 짐을 나누는 것이 힘들게 된다. 해야할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하도록 돕고 잘 되었는지 같이 점검하고… (사실 리더로서 해야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리더쉽도 참 부족한 사람인 듯 하다)
그러다보면 지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고… 원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뛰는데… 저 사람은 내가 이런것을 알면서도 왜 도움의 손길 한번 내밀지 않는 걸까.

그런데,
내가 최근 배우고 있는 것은,
치열하게 사는 lifestyle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순발력, 체력, 열정, 기획력, 분석력… 등등이 모두 필요한 듯 하다)
따라서 그렇게 살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은 매우 부당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들 나름대로의 role이 있는 것이고… 나와는 다른 영역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을 알고… 처음 10-15년 동안은…
예수님을 위해, 영원한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사는 법을 배워왔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7-8년 동안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기 위해 struggle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진보가 때론 너무 더디게 느껴진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살아가다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대하기 힘든 사람들은,
나보다  어른이거나, 나를 감독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데… 나보다 미숙한 사람이다.
혹은, 분명히 나보다 현저하게 미숙한데 계속해서 나를 가르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대할때에는, 물론 내가 그런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노력과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점점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때로 ‘어른’의 위치에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내가 섬기고 가르치고 돌보는 사람들이 나에데하여 그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만 점검해보게 된다.

더 어렸을 때에는…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그저 답답하게만 느꼈는데,
이젠 그런 “미숙한 어른들”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내가 성숙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만 못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미숙하다.

동역을 하거나, 사역을 하거나, 그냥 함께 생활을 하거나…

함께 하는 그 사람들이 누가 되었건 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미숙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성숙함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때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을 해서 내어 놓을 때에도,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미숙함을 깊이 감안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함께 비이성적/감정적이 되는 오류를 많은 경우 피할 수 있는 듯 하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비이성적인 감정적 반응을, 마치 논리적인양 포장해서 내어 놓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내 미숙함을 나 자신과 상대에게 스스로 인정하고,

미숙함이 또 다른 미숙함을 낳지 않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듯 하다.

또한 내가 스스로 빠지기 쉬운 착각은,

내가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경우,

내 비뚤어진 성숙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고,

내 미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여 멈추지 말아야할 성화에의 노력을 그치게 되기도 한다.

내 부족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기도하고,

나의 작은 인격에의 열매를 크게 과장해서 보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을 그려내기도 한다.

내가 이땅에 사는 한,

나의 이러한 미숙함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미숙함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할수도 있겠지만,

날마다 조금씩, 내 안에서 이 모든 미숙함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넉넉함이 성령 안에서 키워지면 하는 바람이 크다.

세상의 많은 미숙함들을,

내 삶으로 감당하여 지고 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정말,

많이 듣고 적게 말하기 위해서 요즘 참 많이 노력중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끼고, 줄이고, 절제하고…

내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이 들으려 하는데…

얼마나 내가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참 많이 경험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요즈음 정말 하나님께 적게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데…

내가 말을 적게하면, 하나님께서 적게 말씀 하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껏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은,

결국…

내 생각(말) 이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것

얼마나 내가 성숙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과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 가운데 어떤 쪽에 더 신경을 쓰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95% 이상의 관심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에 맞추어져 있지만,
점점 성숙해 가면서 그것 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섬길까 하는 것에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