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 (4)

무엇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일까?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많은 시간 “일”을 하는가 일까?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일”에 임하는가 일까?

물론 그런 것들이 성실함을 재는 기준이 될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성실함 자체를 재는 기준이라기 보다는 성실함의 열매의 일부를 재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것들은, 단순히 성실함의 열매뿐아니라 그 사람의 다른 면들의 열매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잘못 판단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실함은
외면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것을 재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성실함 (3)

성실함에 대해 핑계를 대는 사람들을 나는 매일 만난다.
누굴까?
당연히 나 자신이다.

좀 더 성실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핑계를 대는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자면 깊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몹시 부끄럽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다른 어떤 것들은 잘 하는데…
사람이 완벽할수는 없지…
이정도 마음의 평안과 여유는 있어야지…
내가 이정도의 여유를 누릴 자격은 되지 않나…

그러나 성실함은, 내 performance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 attitude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무엇일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기준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성실함 (2)

성실함은 능력(competency)일까 성품(character)일까?

나는 오랫동안 성실함을 성품으로 생각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기도 했고, 내 자신이 성실하지 못함을 많이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혹시 성실함이 능력은 아닐까?
어떤 이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성실함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닐까?

약속을 해 놓고도 반복해서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들,
늘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
큰 소리를 쳐놓고 뒷감당을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성실하기위한 노력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기 위한 노력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과연 성실하지 못함이 책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것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마 전문적인 심리학의 영역의 고민을 비전문가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이들을 대하면서 다른 이들을 양육하거나 훈련하거나 가르치거나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반복해서 마주치게 되는 고민이다.

성실함 (introduction)

직장 일이든, 직접적인 복음사역이든…
일을 하다보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가 하는 것을 많이 느낀다.

특히 어떤 일을 부탁한 후,
그 일을 다시 점검하지 않아도 알아서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하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생각만큼 많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실한 한 사람을 찾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그런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귀한 일임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과연 더 건강한 복음적인 삶을 사는 것일까.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더 건강한 성숙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더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인위적인 성실함과 건강한 성실함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실함과 영성과는 어떤 관계일까.
성실한 사람과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런 고민들이 성실함과 관련하여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앞으로 시간이 되는 대로 몇번에 걸쳐…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
최근 내가 ‘성실함’에 관하여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한번 써볼까 한다.

네 부류의 사람들

어떤 이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자신만을 돋보이게 한다. 이는 그 사람의 의도와 관계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그런 마음 없이 산다.

위의 두가지 분류를 종합하면 다음의 네가지 조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
(2)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은 있으나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지 못하는 사람
(3)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다는 마음은 없는데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
(4)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높이겠나는 마음도 없고, 주변의 사람들을 돋보이게하지도 않는 사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4)번의 유형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깎아 내려서라도 자신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죄된 본성의 자연스러운 증상일 것이다.

(3)번의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도 이론적으로 가능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2)번 유형의 사람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는 있으나, 막상 그 올바른 마음가짐을 제대로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미숙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높이고자 하지만, 어떻게 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높일 수 있는 것일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

(1)번 유형의 사람은, 매우 드물지만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오래 마음에 감동이 남는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도 2번과 4번의 중간쯤 되지 않을까.

특히,
내가 가끔 주변 사람을 높여주려고 마음을 먹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도,
때로 나의 미숙함과 지혜롭지 못함으로 결국 다른 이들을 깎아내리게되는 잘못을 범하는 일들을 최근 많이 겪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숙해져…
내 겸손도,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배려와 존중도…
짜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되는 날이 내게도 올까.

가장된 겸손

나는 자주, 겸손을 가장하곤 한다.

때로 ‘정치적’이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아는… 그러나 해야만하는 ‘아부’를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고 나면 자기전에 세수를 더 빡빡 해야 할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다.)

혹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다른 실제적인 필요때문에 실제 내 모습보다 나를 더 “low grade”로 present 해야 하는 경우를 만난다.

처음, 그런 일들을 겪을 때면… 정말 치가 떨리도록 싫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도 더 잘 견디어 내게 되어 가는 듯 하다.
(이게 성숙인지, 타락인지… 때론 나도 애매하다.)

그런데,
내가 나를 열심히 낮추는 가장된 겸손을 떨다보면…
내가 그렇게 낮게 present 한 내 모습을… 그냥 실제 내 모습인줄 알고…
심각한 충고도 해주고, 도움을 주려고도 하고, 일장 연설을 하기도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정.말. 난감하다.

요즘, 그런 경험들을 할 때가 좀 있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가장된 겸손이 아닌…
인격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겸손을 가지라고 주문하시는 sign이 아닌가 싶다.

긍정적 모델과 부정적 모델

다른이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자세는 건강한 신앙인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렸다.

그런데,
그 다른이의 모습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라고 하면서 따르게 되는 “긍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이의 모습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면서 피하게 되는 “부정적 모델”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부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쉽고, 주변에 매우 많고, 내게 오는 효과도 강력하다.
그러나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자칫 잘못하면 나는 성숙하지 못한채 비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긍정적 모델”은 대개 찾기도 어렵고,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긍정적 모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데까지도 때로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그 긍정적 모델을 보면서 강한 motivation을 갖는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긍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모델을 통해서 배우는 것에 비해 훨씬 스케일이 크고, 발전적이고, 부작용이 적다.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소위 신앙의 성숙이 깊어질수록 당연히 긍정적 모델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부정적 모델을 찾기가 쉬울 것 같은데..
때로 어떤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끊임없이 긍정적 모델들을 통해 자신의 성숙에 채찍질을 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물론 그 궁극적 긍정적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겠지.

나도 역시…
내가 스스로 신앙이 성숙하다고 자만할때면 주변에 늘 부정적 모델에 휩싸여 살게 되고,
내가 스스로 겸손하여 주님 앞에서 나를 낮추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긍정적 모델들이 성경 속에, 책 속에, 내 주변에 나타난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기, 해야 할 말을 하기

해야 할 말을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비교해 보자면…

1. 어떤 것이 더 힘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2.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것이 더 큰 damage를 만들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3. 했을때 더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4. 성숙함을 잴 수 있는 더 좋은 잣대는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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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렇게 되지 않을까.
20대와 30대에는, 해야할 말을 하는 데 내 성숙의 기준을 맞추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점점 해야할 말을 하지 않을 줄 아는 것이 내 성숙을 판단하는 더 좋은 기준임을 깨닫는다.

나의 성숙함은 왜 이리도 더딘 것일까…

말을 줄이기

나는, 정말 너무 말이 많다. 정말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잘 듣지 못하고, 듣는 일에 둔하다.
그러다보니 말 실수도 많고.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갈길이 멀다.

말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몇가지 생각해 보았다.

1. 나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나 중심적 사고방식
듣는 사람이 어떻든지 간에 내 생각을 이야기해야한다는 desire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생각이다.

2. 다른이들의 말과 생각에 비해 나의말과 생각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교만함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과는 정 반대의 idea 이다. 나의 짧고 얕은 생각의 결과에 흥분한 나머지 다른 이들의 깊고 풍성한 생각, 혹은 더 깊은 실존의 고민이 담긴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3. 다른이들로하여금 나를 accept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는, 일종의 열등감과 불안감
가만히 있으면 insignificant 해지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를 드러내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 있게 되는 듯 하다.

또 뭐가 있을까.